죽음이라는 글감

죽음을 소재로 글 쓰는 십 대 작가 딸

by 그랑바쌈

아내와 고딩딸의 다툼은 아무리 반복되어도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서로 찌르고 찔리는 건 두 모녀인데 사방으로 튕기는 파편에 다치고 피 흘리는 건 나다. 어느 한편을 들거나 어쭙잖게 중재하려 들었다가는 썩 좋은 결말에 이르지 못한다는 걸 경험으로 체득한 나는 웬만하면 기다린다. 싸움의 끝은 아름답지 않다. 딸의 내가 죽으면 되겠네 공격을 당해낼 재간은 없다. 딸은 엄마의 약점을 잘 알고 엄마는 방어할 비책이 없다. 싸움의 불길은 상대가 있는 자리에서 정점을 치고 그 기세가 꺾여야 한다. 활활 타오르는 채로 자리를 박차고 나가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죽으면 되겠네 라는 말을 남긴 상황이라면 더 그러하다. 그렇게 집 나간 딸을 찾아다니려면 자존심은 집에 두고 가야 한다.

여보 아해 절대 못 이겨. 아무리 설득해도 아내는 아랑곳하지 않고 무한반복 게임의 시작버튼을 누르고 또 누른다.


딸 방 벽 한편엔 코스프레 소녀의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피 흘리며 정신 나간 모습으로 욕조 안에 누워있다. 딸의 글에서는 늘 피비린내가 났다. 딸은 자신이 쓴 글 속에서 수없이 죽었고 죽였다. 죽음과 피, 지독한 우울감은 딸에게 매력적인 글감이다. 딸의 필력은 남달라서 나는 그 유치한 소재를 뚫고 나오는 송곳 같은 표현들에 나는 구독자로서 가끔 놀라곤 한다. 신춘문예 심사위원이 되어 출품작들을 대충 훑어보다가 기막힌 신인을 발견한 것처럼 가슴이 뛴다. 소재만 괜찮았다면 참 좋았을 텐데 하면서 탈락 박스에 원고를 던져버리겠지만.


수능이 끝나고 딸이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두 여자는 언성을 높이는 일이 잦아졌다. 죽으면 되겠네. 나는 딸의 죽는다는 협박에 과연 어느 정도의 진정성이 담겨 있는지 늘 궁금했다. 저러다 진짜 죽을 생각이 들면 어떡하나. 오늘은 확인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죽겠다는 뜻이 있다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이고, 지금 감정이 죽고 싶을 정도로 차올랐다면 그것도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 일이다. 그런데, 죽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고 그저 열받았다 화난다 정도의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이 죽으면 되겠네 라면 그것은 교정의 대상이다. 그렇게 죽음이라는 단어를 함부로 배설하면 안 된다. 누구나 딱 한번 죽는다. 감기에 걸렸다고 기분이 나쁘다고 죽을 수는 없다.


입버릇 같은 그 말이 다시 나왔을 때 나는 평소와는 다른 서늘한 분위기를 풍기며 끼어들었다. 나는 출장 갈 때 말고는 꺼낼 일이 없는 큰 캐리어를 딸의 방에 던지고서 짐을 싸라고 했다. 죽는 건 자유지만 일단 집을 나가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죽으라고 했다. 딸은 예상치 못한 전개에 멈칫했지만 당황한 기색을 들키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한겨울 추위는 매서웠다. 나는 딸이 집을 나가지 못할 거란 걸 99%쯤 확신했다. 혹여 1%의 선택을 하더라도 그것이 죽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었다. 가긴 어딜 간다그래 하며 붙잡으면 그만이니까. 체면을 좀 구기겠지만. 최소한 딸이 정말 죽겠다는 생각을 한 것인지는 확인할 수 있을 것이었다. 뭐로보나 해볼 만한 시도였다.


딸에게 죽음이 왜 그리 매력적인 글감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죽음이 멀리 있기 때문일 게다. 십 대에게 죽음은 먼 나라의 신화 같을 것이다. 그 멀리 있는 것이 쏜살같이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는 걸 알면 그러지 못할 텐데 말이다. 사실 죽음은 그다지 대단하고 특별한 사건도 아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최종적으로 딱 한 번씩 겪는 일이다. 그러니 그걸로 특별한 결말을 장식하려는 건 작가로서 진부한 시도다. 죽음은 끝이 아니다. 누구나 통과하는 관문이다. 그 문을 넘어 어떤 세상을 마주하게 될지는 살아있는 동안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달려있다. 그러니 죽음을 비장한 결말로 착각하고 그걸로 단번에 끝날 거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순진한 착각이다.


다행히 딸은 집을 나갈 생각도 죽을 마음도 없었다. 그 이후로도 두 여자의 전쟁은 끊이지 않았지만 딸은 죽겠다는 얘기를 쉽게 꺼내진 않았다. 내 계획은 그럭저럭 성공한 셈이다. 십 대에서 이십대로 넘어가는 딸에게 단단한 마디가 하나 생겼다. 사십 대에서 오십대로 넘어온 아빠는 주름이 하나 늘었다. 죽음 얘기 안 꺼낸다고 죽음이 달아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재미의 소재가 될 수 없는 것만큼이나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서도 안된다. 두려움은 준비되지 않은 자의 것이다. 딸아 준비된 채 죽음을 맞아라. 너에게 준비할 시간이 주어졌음에 감사해라. 진리를 만나라. 진리와 하나 되어 맞이하는 죽음은 거룩하다. 그런 죽음이야말로 진실로 대단하고 특별한 결말이란다. 그게 아빠가 너에게 보여주고 싶은 남기고픈 죽음이란다. 너는 모자란 아빠를 내내 무시해 왔지만 결국 그거 하나만큼은 배우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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