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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낯선 곳에서 Jun 08. 2024

[마드리드] 오, 나의 레알 마드리드!(5)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2023-24 시즌은 레알 마드리드 구단과 팬들에게 아주 행복한 시간이었다. 시즌 중 가장 중요한 리그인 스페인 리그 라 리가(La Liga)와 유럽 대항전(UEFA Champions League)을 우승했기 때문이다.


올해 라 리가에는 상대적으로 소규모 약체 팀인 지로나의 활약이 아주 대단했다. 지로나는 바르셀로나에서 북동쪽에 위치한 소도시로, 중세시대의 건축물이 잘 보존되어 있어 HBO의 수작 드라마 '왕좌의 게임' 촬영지로 알려진 곳이다. 지로나 팀은 소규모 팀임에도 불구하고 시즌 중반까지 레알 마드리드와 1위를 두고 경쟁하였고, 한동안은 레알 마드리드 보다 승점을 앞선 채로 1위 자리를 유지하기도 했다. 전통 강호인 FC바르셀로나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보다 좋은 활약을 보여주며 돌풍을 일으킨 것이다. 특히, 우크라이나 출신의 공격수 아르템 도우비크가 라리가 득점왕을 차지하고, 24/25 시즌 유럽 대항전 출전권도 따내는 등 미친 활약을 보여주면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스페인 리그도 다른 유럽 리그와 마찬가지로, 1부 리그 총 20개 팀이 각각 38경기(19개의 다른 팀들과 홈, 어웨이에서 2번씩 경기)를 치르고, 가장 높은 승점을 쌓은 팀이 우승하는 구조다. 이번 시즌 후반기 레알 마드리드는 리그 2위, 3위 팀과 승점을 많이 벌려놓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24년 5월 4일 바르셀로나(2위) vs 지로나(3위) 경기에서 2위인 바르셀로나가 패배하면 승점을 획득하지 못하게 되어, 레알 마드리드는 리그 4경기를 남겨두고도 우승을 확정 지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 날 펼쳐진 2위, 3위 간의 경기는 바르셀로나와 지로나 팬뿐 아니라, 레알 마드리드 팬들도 모두 주목하는 경기였다.


처음에 바르셀로나가 1:0으로 선제골을 넣어서 경기가 바르셀로나 쪽으로 기울 것이라 생각했지만, 곧바로 지로나가 동점골을 넣고, 바르셀로나가 다시 골을 넣으면서 경기가 2:1로 되었다. 그러다 지로나가 기세를 몰아 연이어 2골을 넣으면서 약팀 지로나가 강팀 바르셀로나를 4:2로 꺾고 승리하였다.

레알 마드리드 우승을 떠나서, FC 바르셀로나가 지로나에게 4:2로 패배한 것은 매우 충격적이다..

이로써 레알 마드리드는 23/24 시즌에 라리가 통산 36회 우승을 차지하였다. 레알 마드리드가 라 리가나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을 하면 반드시 하는 축제가 있다. 1980년대부터 시작된 이 전통은 시벨레스 광장(Plaza Cibeles)에서 펼쳐지는 우승 세레모니이다. 시벨레스 광장은 마드리드의 중요한 랜드마크이자 상징적인 장소이다. 이 광장은 아주 넓고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어, 수많은 팬들이 모여 함께 축하하기에 적합하다. 우리나라로 치면 서울 광화문 광장 같은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레알 마드리드가 우승하면, 팀의 주장이 마치 의식과 같이 광장 중앙에 사자들이 이끄는 전차를 타고 있는 시벨레스 여신에게 레알 마드리드 깃발과 목도리를 둘러준다. 그리고, 여신의 얼굴 바로 뒤에서 우승컵을 하늘 높이 들어 올린다.

시벨레스 광장과 시벨레스 여신 동상. 이 곳은 마드리드의 대표적인 랜드마크 공간이다.

레알 마드리드 팬(Madridista)이 된 이후로, 이 클럽이 우승 트로피를 차지할 때마다 우승 세레모니 장면을 인터넷을 통해 수도 없이 보았다. 축구 클럽의 찐 팬이라면 단순히 축구 경기뿐 아니라 이런 클럽의 축제 행사에도 참여해보고 싶기 마련이다. 무엇보다 실제 축구 선수를 가까이서 볼 수 있고, 그라운드에서 볼 수 없는 선수들의 노래, 춤, 각종 연설, 팬들을 위한 멘트 등을 직접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침 나도 마드리드에 거주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역사적인 순간을 놓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 행사에 가보기로 마음먹었다.


이 행사는 24년 5월 12일에 열렸다. 스페인은 5월 초에도 날씨가 매우 덥다. 스페인의 한 여름처럼 기온이 40도까지 치솟진 않지만, 30도 가까이의 기온을 보이는 시기이다. 그런데 이 날은 이상기후 때문인지 아침부터 공기가 매우 후끈했다. 그리고 시벨레스 광장에는 그늘이 없어서, 스페인의 강렬한 태양을 온몸으로 버텨야 했다. 나는 일생에 단 한번뿐인 기회를 제대로 누리기 위해, 미리 유튜브로 과거 세레모니를 시청하면서 어느 자리가 명당인지 미리 분석했다. 그리고 맨 앞줄을 사수하기 위해 선수단의 광장 도착 예정 시간보다 4시간 30분 전에 도착했다. 내가 시벨레스 광장에 도착했을 땐 이미 소수의 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우산, 물, 챙이 넓은 모자, 선풍기 등 더위와 햇빛을 이기기 위한 장비들을 구비하고 있었다. 그날따라 햇빛도 강하고 날씨가 너무 더웠지만 묵묵하게, 우직하게 인고의 시간을 견뎌냈다. 왜냐하면 고등학생 때부터 작은 모니터로만 보았던 것을 내가 직접 체험하고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해도 뙤약볕에서 가만히 서서 기다리는 것은 너무 힘들었고, 18년의 팬심이 없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실제로 기다리다 지친 몇몇 사람들은 쓰러지기도 했고, 탈수 증세를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앰뷸런스와 구급대, 경찰이 몇 시간 전부터 팬들을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 레알 마드리드 측에서 섭외한 DJ가 레알 마드리드 응원가, 스페인에서 유행하는 곡들을 틀어주면서 지루한 팬들을 달랬고, 대형 모니터에 이번 시즌 주요 장면을 무한 반복해 주면서 시간을 때울 수 있게 도와주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마침내 선수들이 퍼레이드용 버스를 타고 등장했다. 이 퍼레이드를 위해 마드리드 주요 도로를 사전에 모두 통제하였다. 텅 빈 도로에 레알 마드리드 스폰서인 BMW 스포츠카 2대와 말을 탄 경찰들의 호위를 받으며 레알 마드리드 버스가 광장으로 천천히 들어왔다. 이 장면은 마치 중요한 전쟁에서 우승하고 개선문으로 들어오는 장군들을 환영해 주는 모습 같았다.

작은 모니터로만 보던 레알 마드리드 우승 세레모니와 선수들을 가까이서 보니 그 간 기다린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비록 주말 반나절을 뙤약볕에서 날리고, 체력적으로 많이 힘들었으나 충분히 가치가 있었다. 레알 마드리드의 명장 안첼로티, 현시점 축구계의 슈퍼스타 주드 벨링엄, 비니시우스 주니오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선수인 페데리코 발베르데 등 모든 선수들을 아주 가까이서 보았다.

마지막 피날레인 시벨레스 여신에게 레알 마드리드 국기를 둘러주고 리그 우승컵을 드는 장면을 보면서 뭔가 한 가지 꿈을 이룬듯한 기분이 들었다. 평소에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하고 줄 서서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데, 가장 싫어하는 것들을 극복하면서까지 하고 싶은 게 바로 열정, 사랑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토록 사랑을 가득 담아 열정적으로 해본 일이 언제였는지, 무엇이었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살면서 이렇게까지 무엇을 깊이 좋아하고 탐구하고, 경험해 본 것은 단언컨대 없었다. 공부를 이렇게 좋아했다면 인생이 조금은 달라졌을까?

수많은 인파가 몰렸던 행사에서 맨 앞줄을 사수했다. 4시간 반동안 더위와 뙤약볕을 이겨내고.

23/24 시즌 나의 레알 마드리드 이야기는 챔피언스 리그 우승에 대한 감동으로 마무리되었다. 올해는 현시점 최고의 스트라이커인 킬리안 음바페(프랑스)가 옴과 동시에, 레알 마드리드의 백전노장인 토니 크루스, 나초 페르난데스 등이 떠나는 등 많은 변화가 예상된다. 올해는 이 구단이 나에게 어떤 재미와 감동을 선사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24/25 시즌에도 레알 마드리드가 멋진 활약을 보여주길 기대한다. ¡Hala Madr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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