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런던에서
2022년 9월, 아내와 나는 4박 5일간의 영국 런던 여행을 계획했다. 유난히 바빴던 여름을 보낸 탓에, 이번 여행에 대한 기대감이 한껏 부풀어있었다. 마침내 여행 전날이 다가왔고, 한창 짐을 싸던 중 갑자기 핸드폰에 알람이 울렸다. 그것은 바로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서거 소식을 알리는 뉴스 속보였다. 혹시나 여왕 서거로 인해서 여행에 차질이 생기지는 않을지 걱정을 하면서 잠에 들었다.
다음 날 오전, 우리는 런던에 도착했다. 새벽부터 마드리드 바라하스 공항에 가서 런던행 비행기를 타느라 몹시 피곤했다. 고풍스러운 풍경을 만끽하기 위해 공항 셔틀버스 창밖을 바라보며 멍 때리고 있는데,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서거 소식을 알리는 전광판을 보게 되었다.
런던 도심에 가까워질수록 수많은 추모 문구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사진을 계속 만나볼 수 있었다. 그리고 영국 여왕의 서거를 서서히 실감하게 되었다. 솔직히 우리 부부는 여왕 서거보다 코로나19 이후 처음으로 온 해외여행을 재밌게 할 수 있을지, 맛있는 건 많이 먹을 수 있을지가 더 관심사였다. 우리와 처지가 같은 다른 관광객들도 여왕님 서거 소식에 약간은 슬퍼하면서도 자신들의 일정에 차질을 빚지 않을지 걱정하는 듯 보였다.
우리는 먼저 호텔에 도착하여 짐을 맡기고 시내 관광을 하기로 했다. 호텔 직원이 말하기를, 현재 영국 전역이 국가 애도기간이기 때문에 관광에 제약이 있을 거라고 조심스럽게 얘기해 주었다. 짐을 맡기고 거리로 나오니, 도시 전체가 여왕님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는 분위기로 가득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만 보던 활기차고 분주한 런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고요함과 엄숙함이 느껴졌다. 특히,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은 여왕님께 마지막 인사를 위한 특별 기도회가 열렸다. 성당 외부에는 애도를 표하기 위한 사람들이 줄을 서있었고, 일부는 사원 앞에서 여왕의 안식을 기원하는 작은 기도를 올리기도 했다.
런던 특유의 흐린 날씨가 국가와 도시의 슬픔을 더욱 깊게 만들어 주는 것 같았다. 주요 공공기관과 빌딩에서는 영국 국기가 조기로 게양되었고, 런던의 랜드마크들은 조명을 줄이거나 끄기도 했다. 이러한 도시 분위기는 아무것도 모르고 관광하러 온 우리 부부에게도 묘한 우울감을 안겨주었다. 한마디로 초상난 집에 놀러 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큰맘 먹고 런던까지 여행을 왔는데, 이런 침울한 분위기에 휩쓸리기만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쇼핑이라고 하기 위해 리버티 백화점에 들렀다. 백화점에 사람도 별로 없고 뭔가 조용한 분위기여서 쇼핑할 맛이 나지 않았다. 예정에 없던 쇼핑을 하고 밖으로 나와 거리를 이곳저곳 다니면서도 어딜 가든 여왕님의 얼굴을 마주하였다. 마치 이 상황에 아랑곳하지 않고 관광을 즐기는 우리를 예의주시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여서 그런지 배가 고팠다. 그러나 많은 상점과 레스토랑이 문을 닫거나 영업시간을 단축해서 미리 조사해 온 맛집을 가는 것에 제약이 있었다. 영업 중인 가게를 힘들게 찾았는데 조용한 음악을 틀고 여왕을 기리기 위한 장식, 문구들로 애도를 표하고 있었다. 이 기간에는 신나게 웃고 떠들면서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 약간 눈치가 보였다. 주변에 런던 사람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얼굴이 뭔가 심각해 보였기 때문이다.
영국의 국가 애도기간에는 런던에서 개최 예정이었던 공연이 취소되거나 연기했고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EPL(프리미어리그) 경기들도 중단되었다. 그러니, 자연스레 영국의 대표 문화 중 하나인 펍(Pub)들도 문을 닫은 곳이 많았다. 런던을 여행했던 기간에 하필 토트넘과 맨체스터 시티 축구 경기가 있었는데 경기를 볼 수 없게 된 것은 큰 아쉬움으로 남았다. 축구 마니아로서 런던까지 왔는데 손흥민 선수와 당시 EPL 최강이었던 맨시티 경기를 두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한 것은 나에게는 여왕님의 서거보다 더욱 슬픈 일이었다.
수많은 상점이 문을 닫고 침통한 분위기에 빠져 있는 모습을 보고, 우리 부부는 이 기간에 정상적인 런던 관광이 어려울 것으로 생각했다. 어쩌면 영국의 역사적인 순간에 있는 만큼, 우리도 영국 여왕을 추모하는 것이 예의이고, 더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는 버킹엄 궁전으로 향했다. 버킹엄 궁전 앞에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여왕님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고 있었다. 손에 들린 꽃다발을 내려놓고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서 있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친구나 가족의 손을 잡고 슬픔을 나누었다. 그들의 표정에는 깊은 상실감이 묻어나 있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서거는 단순한 국가 원수의 죽음이 아닌 것 같았다. 마치 가족, 가까운 이웃과 같은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을 의미하는 듯했다. 이 장면을 보며 구시대적 유물이자 상징적인 존재인 줄로만 알았던 영국의 왕실, 그리고 왕이라는 존재가 영국인들에게 얼마나 큰 의미였는지 깨닫게 되었다.
현재 영국 국왕인 찰스 3세는 2022년 9월 9일에 공식적으로 왕위에 올랐고, 영국 국민과 전 세계를 향해 국왕으로서의 첫 번째 대국민 연설을 했다. 그리고 이 날은 우리 부부가 런던에 도착했던 날이기도 하다. 이처럼 우리는 얼떨결에 영국 역사에서 한 페이지가 넘어가는 순간을 현장에서 직접 느낄 수 있었다. 비록 런던에서 많은 관광은 하지 못했지만, 영국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역사적인 순간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특별한 여행으로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