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피츠로이에서
남미 파타고니아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운 풍경 중 하나가 피츠로이(Fitz Roy) 산에서 일출을 보는 것이다. 이 산은 파타고니아 한복판에 아르헨티나와 칠레 국경에 위치하고 있다. 산의 험난한 지형과 멋진 자연경관으로 전 세계 트레킹, 등산 마니아에게 인기가 높은 곳이다. 무엇보다 피츠로이가 가장 유명한 이유는 일출 때 산봉우리가 햇빛을 받아서 빨갛게 타오르는 장면 때문이다. 빨갛게 타오르는 3개의 높은 봉우리는 마치 불타는 고구마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위 풍경을 보기 위해선 험난한 과정이 필요하다. 시간, 장소, 계절, 날씨가 딱딱 맞아떨어져야 한다. 먼저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려면 일출 시간에 맞춰 전망대에 도착을 해야 하기 때문에 하루가 넘어가는 새벽 1시~2시 사이에 출발해야 한다. 게으르거나 늦잠을 잔 사람은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없다.
그렇다면 가장 잘 볼 수 있는 장소는 어디일까? 당연히 우리의 시야를 가로막는 것이 없는 탁 트인 장소일 것이다. 피츠로이 산봉우리에서 가장 가깝고 시원한 풍경을 즐길 수 있는 곳은 라구나 데 로스 트레스(Laguna de los Tres) 호수이다. 이곳에 가려면 엘 찰텐(El Chaltén)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출발해야 한다. 마을에서부터 호수까지의 거리는 왕복 약 20~25km 정도이고, 왕복 8~10시간 정도 걸린다. 새벽 1시~2시 사이에 출발하여 아침 6시쯤 호수 전망대에 도착해서 천천히 일출을 기다리는 것이 안전하다.
위의 요소들은 개인의 노력과 의지로 극복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의지대로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날씨이다. 확률적으로 파타고니아 날씨가 좋은 기간은 아르헨티나의 여름(12월~3월)이다. 그래서 나도 최대한 방해 요소를 제거하고자 1월 말에 피츠로이 산에 올랐다. 계절을 잘 맞췄다고 해서 다가 아니다. 피츠로이 산은 파타고니아 지역에 위치해 있어 여름에도 날씨가 변덕스럽다. 맑고 푸른 날씨가 풍경을 즐기기 가장 좋으며, 특히 바람이 적고 구름이 없는 날이 이상적이다. 고도가 높기 때문에 구름이 봉우리를 가려서 새벽부터 열심히 올라갔는데 구름 구경만 하고 내려와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를 종합해 보면, 피츠로이 산의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보기 위해선 '조상님의 덕'이 필요하다. 한국 사람들은 흔히 멋진 풍경을 완벽하게 즐기기 위해서는 "삼대가 덕을 쌓아야 한다"라고 한다. 우리 조상님들이 덕을 얼마나 쌓으셨는지 테스트를 해보고 싶으면, 피츠로이 산에 올라가서 3대 봉우리를 구름 한 점 없이 볼 수 있는지 확인하면 된다.
밤 12시에 기상해서 헤드랜턴을 착용하고 엘 찰텐 마을에서 라구나 데 로스 트레스로 향했다. 날씨가 급변할 수 있으니, 고어텍스 재킷, 따뜻한 물, 비상식량 등을 챙겼다. 아무리 트레킹 마니아라지만 새벽 산행 중 야생동물을 만날 수도 있어서 무서웠다. 그래서 '남미사랑'이라는 중남미 여행 카페에서 한국 동행 4명과 같이 올라갔다. 산이 워낙 캄캄해서 지금 날씨가 어떤지, 구름은 많은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멋진 풍경을 볼 수 없을 수도 있다는 불확실성 속에서 '부디 우리 조상님들이 덕을 잘 쌓으셨길' 바라면서 동행들과 즐겁게 올라갔다.
호수까지 가는 첫 3시간은 평탄한 길이 계속 이어져 약간은 지루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높은 전망대에 오르기 위한 마지막 1시간은 강한 체력을 요구한다. 새벽 1시에 출발해서 이미 4시간을 걸어 지칠 대로 지쳐있는데, 갑자기 급경사 오르막길을 맞닥뜨리니 너무 힘들었다. 날이 점점 밝아오는 것 같아 멈출 수도 없었다. 조상님 덕 좀 볼라다가 이대로 조상님 곁으로 가는 건 아닌지 걱정되었다. 한국 동행들과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면서 마침내 호수 정상에 올라왔고, 조상님의 덕을 확인할 수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새벽의 피츠로이는 청량 그 자체였다. 동트기 직전의 피츠로이 풍경은 정말 신비로웠다. 적당히 눈이 쌓여 있고, 향긋한 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구름 한 점 없는 날씨에 큰 감사함을 느꼈다. 지구 반대편 파타고니아까지 다시 와서 등산을 할 일이 내 인생에서 다시는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진으로는 잘 표현이 안되지만 저 봉우리가 상당히 커서 마치 홀로그램처럼 나에게 다가오는 것 같았다. 이런 압도적인 풍경 앞에서 잠시나마 조상님들께 감사의 묵념을 올렸다. 그리고 하산하자마자 멋진 사진과 함께 튼튼한 두 다리와 모험 정신을 심어 주신 부모님께 감사의 메시지를 보낼 것을 다짐했다.
이제 피츠로이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불타는 고구마'를 감상할 시간이다. 동행 분들과 각자 싸 온 도시락을 먹으면서 천천히 기다렸다. 그런데 맑았던 하늘에 갑자기 조금씩 구름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바람이 강하게 불어 구름이 빠르게 이동하였고, 해를 가리기 시작했다. 아쉽게도 사진으로만 봤던 불타는 붉은 봉우리는 볼 수 없었다. 그래도 아쉬운 마음에 날씨가 맑아질 때까지 조금 더 기다려보았다. 잠시 후 구름이 살짝 걷히면서 햇빛이 봉우리를 비춰서 노란빛을 띠었다.
내가 외치니, 동행분들이 모두 빵 터졌다. 원래 일반 고구마보다 호박고구마가 더 달달하고 맛있으니, 우리가 더 멋진 풍경을 본 것 아니겠냐며 훈훈하게 새벽 등산을 마무리했다. 불타는 고구마가 아니면 어떠냐. 당도가 더 높고 남녀노소 모두 좋아하는 호박 고구마를 봤으니 더 가치 있는 경험 아니겠느냐라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조심히 하산했다. 그리고 가족 카톡방에 피츠로이의 멋진 풍경과 부모님께 감사의 메시지를 보냈다. 아직까지도 나에게 피츠로이 등산은 당도 높은 호박 고구마처럼 달콤하고, 일상 속에서 가끔씩 생각나는 멋진 경험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