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둘리도 빙하 타고 오기 힘들었겠다

아르헨티나 페리토 모레노 빙하에서

by 이베리코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주재원을 하던 시절, 1년 내내 계절이 없고 고산 기후로 매일 날씨 변화가 없는 게 문득 지루하게 느껴졌다. 어느 주말, 뉴욕의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를 보던 중 갑자기 눈이 보고 싶어졌다. 콜롬비아에서 눈 내리는 지역을 폭풍 검색했다. 그러나 콜롬비아는 적도 인근 지역에 위치하고 대부분 열대 기후를 보이기 때문에, 눈을 볼 수가 없었다. 만약 눈을 보고 싶으면 안데스 산맥의 높은 곳까지 올라가서 만년설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그러던 중, 파타고니아 트레킹이 떠올랐다. 그 당시 나는 트레킹에 한껏 심취해 있었고, 파타고니아에 있는 '페리토 모레노 빙하(Glaciar Perito Moreno)'트레킹을 버킷리스트에 올려두었다. 보고타 서점에서 파타고니아 관련 책을 구입하고, 이번엔 꼭 가보자고 마음먹었다. 당장에는 바쁜 일들과 프로젝트가 산적해 있어 5개월 뒤로 여행 일정을 계획했다.


마침내 5개월이 지나고, 부에노스아이레스 공항에 도착했다. 페리토 모레노 빙하에 가기 위해서는 먼저 엘 칼라파테(El Calafate)라는 도시로 이동해야 한다. 보통 트레킹 마니아들은 경비 절약을 위해 아르헨티나의 버스를 타고 중간중간 소도시를 여행하면서 엘 칼라파테에 도착한다. 그러나 나는 돈 보다 시간이 더 중요한 K-직장인이다. 그래서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엘 칼라파테까지 1시간 만에 가는 비행기로 이동했다.

IMG_0904.JPG 젊은이들은 주로 버스를 타고 이동 하지만.. K-직장인은 시간이 없다

엘 칼라파테는 파타고니아 남부에 위치한 작은 도시로, '페리토 모레노 빙하' 하나로 먹고사는 작은 도시다. 이 도시에서 빙하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국립공원(Parque Nacional Los Glaciares)까지 버스로 1시간 30분 정도 이동을 해야 한다. 조금은 비좁고 불편한 버스를 타고 이동했지만, 파타고니아 대평원의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니 벌써부터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장인으로서 여행을 떠나기 직전에는 일도 바쁘고 힘들어서 귀찮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막상 떠나면 잘 왔다는 생각이 든다.

IMG_0948.JPG 눈앞에 펼쳐진 그림 같은 풍경
IMG_0958.JPG 페리토 모레노 빙하가 있는 국립공원 입구

마침내 국립공원에 도착을 했다. 국립공원에 도착했다고 끝이 아니었다. 공원에서 운영하는 대형 버스를 타고 또 국립공원 안쪽까지 이동을 하고, 약간의 산길을 걸어야 한다. 마침내 빙하가 한눈에 보이는 전망대에 도착했다. 페리토 모레노 빙하는 약 250 km²의 면적으로, 파타고니아 지역에서 가장 큰 빙하 중 하나이다. 사진으로 작게 보이지만, 빙하의 높이는 웬만한 건물 높이와 비슷했다. 수 천년에 걸쳐 빙하가 형성되어, 수면 위로 약 60m, 수면 아래로 약 170m에 이른다고 한다.

DSCF0555.JPG
DSCF0565.JPG
DSCF0572.JPG 빙하의 높이가 생각보다 아주 높아서 나도 모르게 압도되었다.

전망대를 바라보고 있으면 가끔 빙하가 녹아서 무너지는 장면을 볼 수 있는데, 그 소리가 하늘에서 천둥 치는 것처럼 엄청 크게 들렸다. 몇몇 여행객들은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가다가 이 소리에 깜짝 놀라기도 할 정도였다. 그리고 빙하 색깔이 우리가 아는 완전 하얀색의 얼음이 아니었다. 표면에 약간 푸른빛을 띠고 있어서 신기했다. 나중에 가이드가 설명해 주었는데, 빙하 분자가 일반적인 얼음 분자와 다르고 빛을 흡수하는 형태가 달라서 그렇다고 한다.


드디어 기다리던 빙하 트레킹 세션이 찾아왔다. 페리토 모레노 빙하 트레킹에는 2가지 프로그램이 있다. 하나는 30분짜리 코스이고, 내가 한 프로그램은 3시간짜리 '빅아이스'라 불리는 프로그램이다. 이왕 여기까지 온 거 조금이나마 더 오래 트레킹을 즐기고 싶어서 긴 코스로 했다. 시작 전에 가이드가 헬멧과 아이젠을 나눠주었다. 그리고 주의사항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DSCF0570.JPG
DSCF0582.JPG 가이드가 직접 아이젠을 채워준다.
DSCF0585.JPG 아이젠을 너무 꽉 채워줘서 발이 아프다고 했는데, 아이젠이 빠지면 위험하다고 그냥 참으라고 한다.

콜롬비아에서 근무하면서 안데스 산맥을 자주 트레킹을 했기 때문에 평탄한 빙하를 걷는 것은 별거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빙하 위는 일반적인 등산길과는 달랐다. 아이젠을 끼니 발이 무거워지고, 가끔 발이 푹푹 들어가서 다리 근육을 더 많이 쓰다 보니 힘들었다. 그리고 간간이 나오는 빙하 사이사이에 있는 작은 틈인 '크레바스'를 유의해야 했다. 지금 우리가 빌딩 꼭대기 높이에 있는데, 크레바스에 빠지면 구조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크레바스에 차있는 빙하 녹은 물은 워낙 투명하여 그 깊이를 알 수가 없다. 가끔 얇은 얼음 아래 크레바스가 있어서 눈에 잘 보이지 않기도 한다. 이로 인해 가이드의 지도 하에 긴장하면서 걸어야 하니 피로도가 증가했다. 한 살이라도 어리고 신체가 건강할 때 빙하 트레킹을 한 것에 감사함을 느꼈다.

DSCF0617.JPG
DSCF0604.JPG 빙하 사이의 좁은 틈인 크레바스. 빠지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힘들게 빙하 위를 한참 걷다가, 아기공룡 둘리 주제가가 생각났다. 빙하 타고 한강까지 내려온 둘리가 불쌍하게 느껴졌다. 만화 주제가처럼 둘리는 좋은 친구들을 만났지만, 엄마를 항상 그리워했다. 아무리 엄마가 보고 싶어도 고길동의 집인 쌍문동에서 나와 목숨 걸고 빙하 위를 걷고 걸어 엄마를 찾는 것은 많은 고민이 됐을 것 같다. 도우너의 타임 코스모스가 아니었으면 둘리가 얼음별에서 엄마를 다시 만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평소에는 하지도 않을 쓸데없는 공상을 하다 보니 어느덧 점심시간이 찾아왔다. 점심 식사는 개인이 사전에 미리 챙겨 왔어야 했다. 나는 풍경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샌드위치와 커피를 먹었다.

DSCF0621.JPG 미슐랭 식당 보다 더 음식을 맛있게 만들어주는 풍경 반찬

밥을 먹고 돌아가기 전에 가이드가 이 물을 마셔봐도 된다고 했다. 용기 내어 호수 가까이 가서 빙하 녹은 물을 마셔보니, 물 맛이 아주 맛있었다. 알프스 빙하 녹은 물인 에비앙 물이 왜 비싼지 조금은 이해가 됐다. 마침 숙소에 있던 컵라면이 떠올라서 빙하 녹은 물을 페트병에 담았다. 돌아가는 길에도 여전히 다리는 무겁고 피로감이 높았다. 그래도 드넓은 빙하와 안데스 산맥의 멋진 장관을 보면서 마지막까지 힘을 냈다. 정말이지 이런 풍경은 아마 수십 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을 것 같다.

DSCF0625.JPG
DSCF0580.JPG

트레킹이 끝나고 아이젠을 벗으니 이제야 좀 살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트레킹 투어의 유종의 미를 장식할 시간이 왔다. 그것은 빙하 얼음에 위스키를 타서 먹는 것으로, 프로그램 안에 포함되어 있다. 아쉽게도 나는 '알쓰'였기 때문에 아주 살짝 맛만 보았다. 내가 안 마시니 옆에 외국인이 자기가 마시면 안 되냐고 물어봐서 흔쾌히 잔을 건넸다.

화면 캡처 2024-08-22 124015.png 출처: Unsplash

내 빙하 트레킹은 숙소로 돌아와서 빙하 녹은 물에 컵라면을 끓여 먹은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빙하 타고 내려온 둘리만큼 고생했지만, 빙하가 만들어낸 멋진 풍경은 마음속에 평생 녹지 않을 추억이 될 것 같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