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스타에서 유행하는 문구가 있다. “우리는 사랑 아니면 여행이겠지.”
<더 랍스터>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사랑 아니면 죽음이겠지.”
21세기에 이토록 잔혹한 구조주의에 입각한 영화를 그려내는 감독이 있을까.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세계는 기이함을 넘어 괴랄하기까지 하다.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상황들을 나열하는 형태는 역겹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요르고스의 완벽한 구조들은 나를 매혹시키기에는 충분했다.
“전대미문의 커플 메이킹 호텔! 이곳에선 사랑에 빠지지 않은 자, 모두 유죄!
유예기간 45일 안에 짝을 찾지 못하면 동물이 되어야 한다!
이런 발칙한 상상이라니. 이 두 줄을 읽고 흔들리지 않을자가 있을까. 45일 만에 짝을 찾지 못한다면 동물로 만든다. 웬만한 사람의 상상력으로는 가당치도 않은 문장이다. 하지만 쪼개 뜯어보면 그리 새롭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다. ‘사랑에 빠지지 않는 자’. ‘ 모두 유죄’ 현실에서 얼마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관념인가. ‘결혼’은 왜 안 하니, ‘모태솔로’, ‘노처녀’, ‘노총각’, ‘결혼장려금’, ‘남자 친구는 없니’, ‘2인분용 음식’. 이미 세상은 짝이 없다면 유죄인 세상이다. 최근에 들어서야 <나 혼자 산다>로 조금이나마 인식이 개선되었을지 모르지만 아직도 ‘솔로’라는 단어에는 죄다 부정적인 수식어들만 가득하다. 달콤한 수식어만 따르는 커플과는 상반되는 형태다. 영화는 이러한 현실에 호텔, 유예기간, 동물(인간 삶의 죽음)을 부여해 ‘낯설게 하기’를 명확하게 표현한다. 아무렇지 않게 느꼈던 솔로에게 부여되는 부정적인 환경요소들이 단번에 감정의 파도로 휘몰아친다.
<더 랍스터>의 세계에서는 아래의 명확한 규칙을 가진다.
1) 홀로 된 인간은 호텔에 들어와 반드시 45일 동안 짝을 이룰 것.
2) 짝을 이루지 못한 이는 동물이 될 것
3) 혼자 살고 싶은 인간은 숲 속의 도망자가 될 것
4) 도시에서 짝을 이루지 않고 혼자 다니는 자는 검문을 받을 것
5) 숲 속의 도망자는 오직 혼자가 될 것
관객은 체계적으로 짜인 이 기이한 구조에 대해 의문점을 제기할 틈도 없이 수용한다. 이 영화는 첫 장면부터 ‘나는 괴상할 것이다’를 보여주며 시작한다. 비 오는 날 운전을 하다 당나귀를 향해 밑도 끝도 없는 총격을 가하는 여성. 그리고 이어지는 주인공 남자 데이비드는 관객을 이 말도 안 되는 호텔로 곧바로 이송시켜 버린다. 추가적인 설명 없이 형식/구조를 강요한다. 이는 꼭 현실세계에서 태어남과 동시에 구조에 강제로 노출되는 것과 유사하다.
호텔의 세계는 이항대립 그 자체다. 사랑 아니면 죽음뿐. 커플은 솔로보다 ‘우월하다’를 전제한다
입소과정에서 보다 명확히 드러난다.
(성적 취향) 양성애는 불가능하다. 이성애 아님 동성애
(신발 사이즈) 44반은 불가능하다. 44 아님 45
(성별) 여성 아님 남성을 제외한 다른 성별은 용납되지 않는다.
데이비드를 포함한 다른 호텔 이용자들은 ‘왜?’를 묻지 않는다. 근본적인 구조에 대한 질문은 하지 않는다. 단순히 구조 안에서 방법에 대해서만 묻는다. 구조 안에서 등장인물들은 너무나도 무력하고 수동적으로 그려진다. 인물들은 구조에 갇혀 구조를 넘어서는 것을 상상하지 못한다. 동물이 되리라 라는 공포감은 구조에 문제제기 혹은 탈피가 아닌 자살로 이어진다. 이곳에서는 중간이나 타협점은 존재할 수 없다. 모 아니면 도일뿐이다.
양 극단이 명확하게 존재한다는 것은, 중간도 존재를 하긴 한다는 의미다. 단지 이 세계에서는 중간이 존재하되 허용되지 않을 뿐이다. 영화는 양 극단의 심리를 시각적으로 표현해냈다.
영화는 유독 대칭구조를 많이 보여준다. 풍경. 창문의 모양. 특히 호텔을 배경으로 할 때 유독 대칭이 도드라진다. 이외에 거의 모든 씬에서 중심선을 그릴 수 있다. 피사체가 화면 정중앙에 위치하거나 혹은 중심선을 기준으로 한쪽 중앙에 위치하는 등 시각적으로 매우 안정적인 구도를 보여준다.
화면을 넘어서 데이비드의 룸 넘버 101, 옷은 각각 4장, 마취총 바늘 20개, 대부분 커플들의 호수(282,306,240)를 짝수 등으로 대칭을 표현한다. 영화 속 세계가 얼마나 대칭, 짝수에서 오는 안정감을 지향하는지 알 수 있다. 홀수에 대해서는 불안정성, 공포심을 부여한다. 혼자가 된다면 목에 무엇이 걸리면 죽을 것이고, 여자는 강간을 당한다는 등의 교육부터 세명의 인원이 도시에 가자 불안해하는 여자까지. 홀수, 짝수에 대한 관념들이 영화에 구조적으로 반영된 모습이다.
<더 랍스터>의 안정적으로 보이게 ‘짜인’ 구조는 개개인을 옥죄고 있다. 안정의 추구는 현실의 불안정에서 시작된다. 안정을 위해 호텔에서는 정형화를 강요한다. 입소한 이후 발에 맞는 신발 사이즈를 찾는 것이 아니라 발을 신발에 맞춰야 하고, 허리띠에 자물쇠를 채우며 정형화됨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육체부터 가둬버린다. 하지만 정형화된 안정감을 위한 이 행위 때문에 데이비드는 바지를 벗는데 큰 불편함을 겪는다. 안정을 지향하지만 더욱이 불안정해지는 꼴이다.
호텔은 선택지를 제시함으로 자유를 주는 듯 보이지만 이면은 불안감만 가속시킨다. 짝이라는 이상향에 도달하기 위해 ‘혼자’인 외톨이들의 노력은 너무나 불안정하다. 등장인물들은 안정화된 구조에 맞춰가기 위해 사이코패스인 ‘척’, 코피가 나는 ‘척’을 하며 스스로를 학대한다. 호텔의 규칙으로 인해 꾸며진 안정을 연기하는 것이다. 틀에 맞춰지기 위해 등장인물들은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
호텔에서는 많은 혜택을 제공한다. 의식주 등 기본 요소들 플러스 여가활동까지 제공한다. 이 안에서 선택의 폭은 넓어 보이며, 선택의 폭이 넓다는 것은 자칫 ‘자유가 있다’라고 느껴지기도 한다. 이에 상반되는 공간으로는 외톨이들이 사는 숲이 있다. 숲에서는 사냥을 해서 생활을 하고 명확한 거주지도 없다. 또한 사냥을 하는 호텔 투숙객으로부터 위험을 겪기도 한다. 그러나 동물이 되는 기한이 없으며 사랑만 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호텔보다 더욱 자유롭다. 호텔은 구속의 공간, 숲은 자유의 공간처럼 그려진다.
호텔은 다양한 색상으로 꾸며진다. 비록 여성과 남성에 대해 각각 동일한 옷이 부여되지만 풍경들의 색상은 대체로 다채롭다. 호텔은 자로 잰 듯 각지고 반듯하다. 명확히 구분되는 싱글룸, 더블룸. 작은 공간에 커플을 놓는다. 하지만 숲의 경우 낮은 채도의 초록빛으로 단색에 가깝다. 숲은 규칙 없이 어지러이 펼쳐져 있다. 혼자 넓은 경계 없는 곳에 개인을 둔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을 하기 위해 판을 깔아놓은 곳에서는 사랑을 하지 못하고, 사랑을 이외에 모든 것이 허락된 곳에서 사랑을 한다.
추가적인 공간인 도시의 경우에는 유토피아 그 자체다. 호텔처럼 동물이 될 두려움도 없으며, 숲에서처럼 생존을 위한 고군분투 또한 필요 없다. 그럼에도 도시가 매혹적으로 그려지지는 않는다. 도시에서는 늘 커플임을 증명하고 다녀야 하며, 혼자 다닐 시에는 검문을 받는다. 안정된 공간처럼 그려지나 아슬아슬해 보이는 공간이기도 하다.
더 랍스터의 세계는 커플이 아닌 환경에만 처한다면 호텔로 돌아가야 한다. 이는 이별을 하건, 사별을 하건 마찬가지다. 어떤 연유에서건 혼자가 되어버리는 순간 호텔에 귀속되어버리는 꼭 상품 같은 구조라는 것이다. 영원함이란 없으며, 영원한 평화와 안정도 없다. 한날한시에 죽지 않는 이상 이별이란 필연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물들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기보다 커플을 증명함에 바쁘다. 조건을 만들어 서로를 결속시키고 서로를 믿는 것이 아니라 그 조건에 신뢰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조건 있는 인위적 사랑. 어떤 공간에서도 그들은 영원한 평화를 가질 수 없다. 어디에서나 불안정 그 자체다.
음악감독 정재일 씨가 “데드라인이 가장 큰 영감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았다. 데드라인은 정말이지 인류의 발전에 큰 공헌을 했음에 분명하다. 마감일에 맞춰 쓰고 있는 과제도 그러하다. 더 랍스터에서는 데드라인이 두 가지 등장한다. 첫 번째로 호텔의 데드라인 45일이다. 두 번째 데드라인은 데이비드와 근시녀가 떠나기로 다짐한 날짜다..
데드라인, 즉 시간의 제한 불안을 조장한다. 여기서 부여되는 불안감은 긍정적으로 그들을 노력하게 만들 수도 있고, 오히려 부정적으로 파멸로 몰아넣기도 한다. <더 랍스터>의 시간제한은 모두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첫 번째 데드라인을 위해 대부분은 위선을 행하고, 두 번째 데드라인은 서로의 신뢰를 흔든다. 이들에게 명확한 시간이 규정되어 있지 않았다면 오히려 관계는 진실되고 견고 했을지 모른다. 약속이라는 규정이 시간과 합쳐지면 육체뿐 만 아니라 ‘정신’까지 구조에 의해 놀아나게 된다.
이 영화에서는 파롤이 중요하지도 않고, 많이 등장하지도 않는다. 영화를 끌어나가는 것은 랑그다. 오직 구조에 의해 흘러가는 주인공들의 이야기이다. 완벽한 구조주의 영화가 아닌가
아니, 우리는 다시 이야기해보자.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구조주의의 탈을 쓴 후기 구조주의자이다. 엔딩씬에서 보여주는 공백은 그가 얼마나 절실히 후기 구조주의자인지를 보여준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눈이 먼 근시녀가 꼭 눈이 보이는 것처럼 행동하는 듯한 장면이 나온다. 또한 데이비드가 실제로 눈을 찔렀는지도 나오지 않는다. 그들이 어떻게 되었을 지에 대한 결론은 마무리되지 않았다.
감독은 BIF 인터뷰에서도 “내가 여기서 많은 질문을 던졌으니 여러분이 답을 해보세요, 저는 의도적으로 관객들이 영화에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을 비워둔다.”라고 밝혔다.
그는 오히려 구조주의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며 구조주의의 한계점을 희화화하고 여실히 농락했다. <더 랍스터>의 장르도 코미디라고 밝힌 만큼 블랙코미디를 활용해 구조주의의 한계를 비틀어낸다. 영화의 도입부와 중간까지의 형식적인 틀들은 구조주의에 충실하다 착각하게 만드는 텍스트다. 하지만 후반부에 다다를수록 감독 본인이 후기 구조주의자임을 영화에서 드러낸다. 사랑은 무엇인가. 관객에게 물음을 던지며 능동적이고 생산적인 수용자로 만든다.
영화를 곱씹다 보면 이항대립 체계를 철저히 무너뜨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색이 있지만 결국 같은 옷을 입으며 통제받는 호텔에서 나오더라도, 자유로워 보이는 숲에서도 결국 통일된 검정 옷을 입으며 통제당한다는 것이다. 어디에나 규칙은 존재하고 어느 한편이 낫다, 더 우월하다 할 수 없다. 솔로보다 안정된 사랑을 가졌다고 생각한 커플(호텔 주인 부부)은 서로를 향해 총구를 겨누며 본인이 살겠다 외친다.
더 랍스터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소개팅을 하거나 이성을 처음 만나면 공통 관심사에 대해 묻곤 한다. 어떤 취향인지. <더 랍스터>에서는 매우 극단적이다. 공통점을 찾지 못한다면 절대 관계가 이루어질 수 없다. 물론 현실에서 취향이 일정 부분 비슷한 사람과 대체로 파트너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공통점은 어쩌면 좋아하기(사랑하기) 때문에 짜 맞추는 허상일지도 모른다. 공통점을 찾으면서 상대가 운명이라는 신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데이비드는 랍스터가 되지 않기 위해 사이코패스 인척을 해냈다. 데이비드의 친구는 코피를 자해를 해가며 만들어냈다. 모두 여성과 공통점을 만들어내기 위한 행위였다.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면 파트너가 될 것이라는 구조는 등장인물들을 움직였다.
하지만 공통점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유동적일지도 모르겠다.
사랑의 대상은 나인가 남인가? 나의 모습을 상대에 비춰 사랑하는 것인가?
영화의 마지막에서도 주인공들은 이 구조를 탈피하지 못한다. 서로를 그대로 사랑하거나 또는 체제를 변화시킬 생각은 하지 못한다. 그저 사라진 근시라는 공통점에 불안해하며, 자신의 눈을 똑같이 멀게 할 생각부터 한다. 공통점이 사라지자 사랑은 흔들린다. 조건이 있는 사랑. 근시 여자는 이렇게 밝히기까지 한다. “왜 그 사람이 아니고 나예요!”
사랑은 이토록 잔인한 죽음의 형태다.
*학교 과제로 제출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