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후 845일의 기록
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 1917에서 영화 후반부에 통신병인 스코필드가 함정에 빠진 영국군 부대의 수장인 매켄지 중령에게 공격 중지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포탄이 쏟아지는 벌판을 미친 듯이 달려가는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은 관객이 보는 화면 방향으로 달려오고, 공격을 진행 중인 나머지 영국군은 화면을 가로로 가로질러 공격을 진행 중이다. 도대체 매켄지 중령은 왜 빨리 안 나타나는 건지, 일분일초가 귀하다. 조금이라도 빨리 중지 명령을 전달해서 철수를 해야 영국군의 목숨을 한 명이라도 구할 수 있을 텐데. 스코필드 역을 맡은 조지 맥케이는 그렇게 영화 내내 정말 사력을 다해 뛰어다닌다.
모든 일이 그러하듯 육아도 매 순간 낭만적일 수 없다. 로맨스의 순간보단 오히려 스코필드처럼 목숨 걸고 전쟁터를 죽어라 달리는 듯한 순간이 더 많다. 그리고 전쟁터처럼 인간의 본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평소 내가 몰랐던, 아니 숨겨왔던 나의 적나라한 날 것의 감정을 거침없이 드러내게 한다.
이제 겨우 3살짜리 아이인데, 놀랍게도 이 생명체는 어떻게 하면 내가 화가 나고, 불안하고, 지치는지 정확하게 아는 듯 행동한다. 방금 거기서 내가 원하는 대로 멈췄으면, 아마도 나는 화가 나지 않았을 것이고 짜증을 내거나 큰 소리를 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는 귀신 같이 꼭 한두 번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나는 또다시 폭발한다.
이 짓거리를 수백 아니 수천만 번을 반복하다 보면, 나 자신에 환멸스러워진다. 아이에게 한바탕 내 감정을 쏟아내고 나면 암전 된 연극 무대에 핀 조명이 나한테만 툭 떨어지면서 모든 관객이 날 쳐다보고 있는 느낌이 든다. 관객들이 싸늘한 눈으로 ‘너라는 년은 어디까지 더 내려가야 바닥이냐'라며 쳐다보는 듯한 느낌. 자기 환멸의 끝.
아..! 이번 주 잘 참았는데, 오늘 하루 잘 참았는데 결국 이렇게 삑사리가 나는구나! 공들여 쌓은 도(道)의 탑이 또 와르르 무너진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젠가 게임의 늪에 빠진 느낌.
난 오늘도 폭탄을 안고 한참을 뛰느라 눈썹을 그리지 못했다. 그래도 잘 버티고 있다고 칭찬부터 해주고 싶은데 늘 먼저 튀어나오는 건 넌 왜 이따위냐는 질책뿐이다.
비가 온다던 오늘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쨍쨍하다. 대신 내 마음에 비가 오는 연휴를 앞둔 금요일 오후.
2021. 09. 17.
눈썹 못 그린 날이 어떤 기분이 드는 날인지 대충 감 잡겠지만, 더 자세한 것은 네이버카페 ‘언니 공동체’ 혹은 오소희 님의 ‘엄마의 20년’을 읽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