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원했던 것은
나는 극도로 예민해져 있었다.
모든 것이 쌓일 대로 쌓여있었다. 만 2년의 세월 동안 모든 것이 진하게 농축되어 나를 미치게 만들고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이 무서웠다. 매일 밤 최소 한 시간에서 길게는 두 시간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희한하게 아이는 집에 내가 있으면 잠들기 약 두 시간 전부터는 나만 찾는다. 내가 아예 집 안에 없으면 괜찮은데 있으면 나만 찾는 아주 신기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아이를 재우기 위한 작전에 돌입해야 한다. 그렇게 전쟁 같은 퇴근 의식을 치르고 나면 내 영혼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온종일 육아로 지친 내 몸, 껍데기만 남는다.
내 껍데기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외친다.
내일 아침 내 눈이 안 떠졌으면 좋겠어..
하지만 다음 날에도 어김없이 내 눈은 떠졌고 아니 아이에 의해 떠져야만 했고, 또다시 공포스러울 만큼 똑같은 하루가 이른 새벽부터 시작된다.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고 싶지 않은데 내 눈은 자꾸만 거실 창을 향한다. 그리고 내 머릿속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본다.
아파트 13층에서 떨어지면 즉사하겠지. 어설프게 살아서 생명을 연명하거나 몸 어딘가가 다친 상태로 살고 싶지 않은데. 거실 창으로 떨어지면 내가 떨어지는 곳이 단지 내 어린이집 입구라 아이들이 등원하다 기절할 수 있으니 반대쪽 창문을 노려야 하나.
아냐, 죽진 말자. 너무 억울하잖아.
여태껏 멀쩡히 잘 살다가 엄마로 2년 살았을 뿐인데. 그 전의 3n 년의 세월을 다 날려버리기엔 나름 열심히 살았잖니.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 내 삶을 다시 되찾을 방법. 뭐가 있을까. 이혼을 해야 하나? 이혼을 하면서 양육권과 친권을 모두 남편에서 넘기면? 그럼 내 삶은 자유로워지나? 그래, 이혼을 하자. 이혼 후에 미련 없이 이 나라를 떠나는 거야.
여기까지 생각이 뻗치니 더 이상은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생각보다 겁이 많고 소심하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뜬금없는 순간에 어느 누구보다 실행력이 빠르기도 한 사람이다. 결심하기 전에 이미 실행해버리는 경우도 있는 내가 내 암울한 상상 속의 미래 중 뭐라도 하나 덜컥 선택해 버릴까 두려웠다. 방법이 필요했다. 재빨리 다시 생각 회로를 작동시켜 보았다.
지금 내가 그리운 것은 무엇인가?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지금 내가 절실하게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나만의 공간이었다.
온전한 나만의 공간을 만들기로 했다. 물론 이따금 주말에 쉬는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고 카페에 가서 책을 읽거나 지인들을 만나 밥을 먹는 정도의 시간은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지금의 나를 일으켜 세울 수 없었다. 두세시간의 외출로는 나를 채울 수 없었다. 그래, 외박을 하자. 호텔을 가자.
남편에게 상의 같은 통보를 한 뒤 나는 재빨리 서울 모처에 위치한 호텔을 예약했다. 부대시설이나 조식 포함 여부, 룸 컨디션 등 평소 호텔 예약을 할 때 고려하는 모든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모든 것으로부터 나를 1박 2일 간 안전하게 격리해 줄 공간이면 충분했다. 그렇게 엄마의 인생 첫 호캉스가 시작되었다.
엄마가 된 이후 처음으로 혼자 호텔 체크인을 하고 말끔하게 정리된 객실로 들어선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가방을 내려놓고 사각거리는 호텔 이불에 내 몸을 누였을 때의 해방감. 그때 나는 알 수 있었다. 내가 정말로 간절하게 그 어떤 것보다 무엇을 원하고 있었는지.
고요함이었다.
어떠한 힐링 뮤직도 나에게 줄 수 없었던 경건함과 안정을 고요함이 주고 있었다. 나 자신의 숨소리가 들릴만큼 고요한 일상을 언제 마지막으로 누렸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첫 호캉스를 예약한 뒤 거창한 계획을 많이 세웠었다. 평소 맘 편히 듣지 못한 음악도 실컷 듣고, 원 없이 책을 읽고 집에 없는 TV도 실컷 보고 올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뭐라도 봐야지'라며 TV를 억지로 틀었지만 이내 꺼버렸다. 그랬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고요함이었다.
그렇게 고요함 속에서 누구의 방해도 없이 원 없이 책을 읽었다. 고요 속에 읽어 내려간 책은 그 어떤 음식보다 맛있고 달콤했다. 수년간 가뭄에 시달린 메마른 땅처럼 쩍쩍 갈라진 채 위태롭게 하루하루를 버티던 나에게 드디어 비가 촉촉하게 내리는 기분이었다.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쾌감이었다.
방해받지 않고 온전히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
끝없는 고요함으로 지친 내 귀를 달래주는 것.
그것이 간절히 필요한 엄마는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그렇게 원없이 책을 읽고 고요를 즐기며 1박 2일을 보내고 돌아온 나는 한층 생기가 돌았다. 더 이상 창문을 바라보지 않았고, 이혼을 한 뒤 어떤 나라로 도피를 하면 좋을지 고민하지 않았다.
아마 약효가 떨어지면 난 또다시 창문을 바라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어떤 약으로 처방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나만의 고요한 공간과 책. 두 가지 단비만 있다면 난 또 얼마간의 시간을 끈질기게 버텨낼 수 있을 것이다.
아이가 너무 어려서 혹은 아이를 누군가에게 맡기는 것이 여의치 않아서 외박은 꿈꿀 수 없는 엄마들도 많은 것 알고 있어요. 제일 좋은 것은 무리해서라도 잠시 숨통 트일 시간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처음엔 30분, 다음엔 1시간, 2시간.. 억지로 내가 날 위해 만들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엄마의 시간을 만들어 주지 않아요. 이 세상의 모든 엄마들을 존경하고 응원합니다. 우린 생명을 키워내는 위대한 일을 하고 있어요. 그렇기에 잠시 쉴 자격,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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