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 소비자의 마음을 이해하는 언어

글로벌 BM, 캐스키드슨과 설화수 현장스케치

by The Color Curator

매장, 소비자을 연결하는 현장


석사 과정을 마무리하던 시절,

간절한 마음으로 100곳이 넘는 회사에 이력서를 보냈다.

기대와 실망을 수없이 반복하면서, 내 기준은 점점 또렷해졌다.


첫째, 상품 기획이 중심에 있는 마케팅 포지션.

둘째, 세계 시장으로 확장할 수 있는 브랜드.

셋째, 영국에 본사가 있는 회사.


런던에서 이 세 가지 조건을 동시에 갖춘 곳은 드물었다.

줄어드는 비자 기간에 조급해지는 마음을 달래며 나는 무작정 기다렸다.

다른 프로젝트도 하고,

생로랑, 멀버리 매장에서 판매직으로 일하며 기다리고 기다렸다.

반드시 나에게도 좋은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고 믿으면서.

그 기다림 속에서의 깨달음 두가지.

하나, 매장에서 직접 판매를 해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둘, 고객과 상품을 몸으로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훗날 그 경험은 나의 BM(Brand Manager) 생활에 든든한 기반이 되었다.
브랜드는 추구하는 이미지나 스토리가 아니라,

사람들의 기억 속에 켜켜이 쌓이고 문화와 감각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언어였다.

그래서 나는 그 언어를 설계하고 번역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

소비자와 브랜드 사이에 다리를 놓는 사람으로서.




아시아 BM, 영국스러운 감각

처음 발을 내디딘 곳은 영국의 꽃무늬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캐스키드슨(Cath Kidston).

드디어 나에게도 기회가 왔다!

아시아 런칭을 위해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을 우대한다고 했다.

어떻게 하면 인터뷰에서 임팩트를 남길 수 있을까 100만번은 고민했던 것 같다.

그래서 준비한 비장의 무기, 브랜드 분석자료와 아시아 런칭 기획안.

그 노력 덕분일까, 인터뷰 후 단 3일 만에 합격 통보를 받았다.


그렇게 시작한 첫 영국 회사 생활.

당시 캐스키드슨은 가방, 패션, 키즈, 홈 4가지 카테고리로,

한 시즌당 1,000개가 넘는 상품(SKU)을 가지고 있었고, 꽃무늬 프린트만도 100종류가 넘었다.

나에게 주어진 첫 번째 미션은 상품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

처음에는 이렇게 많은 상품을 어떻게 외워야 할지 막막했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는 법’, 그 때 엉망으로 쌓여 있는 샘플실 창고가 눈에 들어왔다.

같은 프린트의 다른 가방을 구분하기 위해 샘플실을 카테고리별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정리는 일주일 남짓 걸렸다. 그 후, 제품 이미지를 엑셀에 추가해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그때부터 시즌별 상품과 주력 제품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고, 브랜드를 이해하는 나만의 기반이 생겼다.


브랜드와 상품을 충분히 이해하게 되자, 우리 매니저는 하나씩 새로운 업무를 맡기며 나를 시험해보기 시작했다. 영국인 팀장과 일본인 매니저 사이에서 소통은 생각보다 훨씬 까다로웠다. 이메일의 톤앤 매너, 브랜드가 지향하는 감성까지 지속적으로 피드백을 받으며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다.

영국의 전통적인 플라워 패턴과 빈티지 무드를 담은 브랜드는 그 자체로 충분히 매력적이었지만, 아시아 시장에서는 그대로 통하지 않았다. 내 역할은 영국 본사의 상품과 아시아 소비자의 취향 사이에서 번역가이자 다리가 되는 일이었다. 단순한 언어 번역이 아니라, 문화와 감각의 차이를 해석하는 번역이었다.


캐스 카페 ⓒ Hyun Oh

그 중에서도 일본 국제 장미와 정원쇼 (International Rose and Garden Show)에 마련한 팝업 매장은 잊지 못할 경험이었다. 영국 첼시 플라워쇼(Chelsea Flower Show)에서 영감을 받아 준비한 이 작은 실험은 현지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고, 화장품과 카페 사업으로의 확장이라는 새로운 기회를 열었다. 꽃 한 송이가 브랜드의 가능성을 바꾸어 놓은 순간이었다. 이 팝업은 우리 브랜드가 카페와 화장품 영역으로 자연스럽게 확장되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는 일본에 첫 캐스카페를 열었다. 홈 제품과 함께 꾸며진 이 공간은, 영국의 티 문화를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장소로 구성되었고, 기대 이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그렇게 우리 브랜드는 일본에서 시작해, 현지 소비자들의 일상 속으로 스며들며 한국, 태국, 홍콩 등 아시아 전역으로 자연스럽게 뻗어나갔다.


그 여정에서 나는 배웠다.

브랜드는 ‘전달자’가 아니라 ‘소통자’여야 한다는 것.

소비자가 브랜드를 만나는 맥락과 생활 방식을 관찰하면서, 브랜드의 DNA는 지키되 각 지역의 정서에 맞게 경험을 조율해야 했다. 국가마다 선호하는 분위기는 달랐다. 같은 꽃무늬라도 일본 소비자는 은은한 파스텔 톤을, 한국 소비자는 강렬한 대비를, 홍콩과 대만은 또 다른 꽃무늬의 색감을 좋아했다.

일방적인 메시지가 아니라, 고객들의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공감할 수 있는 대화가 될 때 비로소 사랑받는다는 것을.





글로벌 BM, 한국스러운 감각


런던에서의 배움과 기다림이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갈 때쯤, 내 인생에 새로운 챕터가 열렸다.

비자 만료로 아쉬운 마음을 품은 채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아모레퍼시픽 설화수 PM(Product Management)팀으로 입사하였다. 설화수가 홍콩 매장을 오픈하며 글로벌 무대에 첫발을 내디딘 시점, 나는 설화수 글로벌 BM(Brand Management)팀 초기 멤버로 합류하게 되었다. 해외에서 거의 인생의 반을 살아온 내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한국적인’ 브랜드에 들어오게 되었다.

세계 속의 ‘한국 럭셔리 브랜드’를 지향하던 설화수. 그 브랜드에 내가 잘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하나씩 만들어갔다. 설화수의 대표 상품 윤조에센스. 그리고 진설 라인, 자정 라인, 쿠션 메이크업. 브랜드의 얼굴이자 심장 같은 상품들을 맡았고, 미국 전용 상품을 기획하고 FDA 승인도 준비하였다. 그리고 ‘홀리스틱 뷰티(Holistic Beauty)’라는 컨셉으로 글로벌 360도 캠페인을 진행했다. 다양한 방법으로도 마케팅을 진행해도 미국고객은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우리가 몰두해야할 것은 브랜드의 철학.

미국 소비자를 이해하기 위해 글로벌 소비자 조사를 진행하면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설화수의 본질—동양의 철학, 홍삼의 힘, 한국적 미학—이 세계 시장에서 어떤 언어로 해석되고 수용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었다.

특히 미국을 비롯한 서양 고객들은 ‘상생’이나 ‘여백의 미’ 같은 개념을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동서양의 철학적 접근을 병행했다. 제품 원료와 미용법에도 철학적 근거를 담아 고객이 설화수의 경험과 가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한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부 고객의 이해였다. 나는 글로벌 지사가 동일한 메시지를 공유할 수 있도록 제품 정보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자료를 영어, 중국어, 한국어로 제작했다. 이 자료는 단순한 번역을 넘어 설화수의 핵심 가치를 전달하는 도구가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교육과 런칭 행사까지 직접 진행했다.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에 매화, 백자, 한지의 색감을 담았다. 설화문화전과 설화수 스파를 통해 소비자들이 한국적 미학을 온전히 감각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했다. 이후 설화수 쿠션을 글로벌 시장에 선보이면서, 각국 고객의 피부 톤에 맞는 색상을 개발하는 일이 필요했다. 연구소와 협업해 지역별 피부 톤에 맞는 새로운 색상을 개발하며, 하나의 색이 국경을 넘어 소비자의 피부 위에서 설화수라는 경험을 구현하는 순간을 만들었다.

결과는 숫자로도 증명되었다. ‘홀리스틱 뷰티’ 캠페인은 글로벌 매출 1,000억 원을 달성했고, 윤조에센스와 쿠션은 연매출 1조 원을 기록했다. 그러나 내게 더 큰 성과는 따로 있었다.

단기간안에 과장으로 진급.

브랜드와 사람 사이의 경험을 설계하는 능력.

그 경험을 완성하는 핵심 중 하나가 바로 ‘컬러’임을 알게 되었다.




브랜드와 사람 사이에서


캐스키드슨과 아모레퍼시픽에서의 시간은 내게 한 가지 확신을 주었다.
브랜드는 결국 사람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감각의 언어라는 것.

상품의 성능이나 디자인을 넘어, 그것을 사용하는 순간의 느낌, 문화적 맥락에서의 의미까지 기획해야 한다. 그리고 그 언어를 설계하고 번역하는 일.

그것이 내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며, 앞으로도 이어가고 싶은 기획자로서의 여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