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치 앞도 모르는 길에서의 시작
박사 논문을 제출하마자, 나는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논문을 1년 안에 완성하기 위해,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한 수험생 생활을 잘견뎌낸 나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하나,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기.
둘, 건강한 라이프스타일 만들기.
셋, 진짜 재미있는 일 찾기.
그렇게 한 달동안 너무도 사랑하는 닌텐도 게임을 하고, 석 달 동안 여행도 다니며 신나게 놀았다. 고민없이, 압박 없이 그냥 편하게 웃고 즐기는 시간이었다. 고된 시간을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놀다 보니 다시 몸이 근질거렸다. '이제 다시 일해야겠다'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겼다.
혹시나 하고 지원했던 예비창업자 패키지. 한 번에 합격했다는 소식이었다. 놀랍게도, 그 주제는 내가 박사 과정에서 연구하던 색채 데이터 기반 프로젝트의 연장이었다. 그 동안 했던 연구가 스타트업 아이템이 되고 특허가 될 거라고 상상도 못했는데, 어느새 자연스럽게 그 길을 걷고 있었다.
당시 내가 제안했던 아이디어 제품은 파운데이션과 립스틱을 원하는 색으로 즉시 제조하는 디바이스였다. 원리는 프린터와 같다. 디지털 앱에서 원하는 색을 고르면, 그것이 기계와 연동되어 즉시 구현되는 방식. 지금은 로레알에서 유사한 제품을 출시했지만, 그 당시에는 ‘색을 데이터로 구현해내는 새로운 경험’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흥분되었다. 이 기기를 중동이나 미국을 타겟으로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열심히 준비했다.
예상치 못하게 코로나 펜테믹이 터졌다.
모든 게 멈추고, 계획이 흔들렸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혼란 속에서 나는 더 빠르게 실행하고, 더 과감하게 움직을 수밖에 없었다. 예비창업자 패키지를 최우수로 졸업하기 위해, 나는 내가 제일 잘하던 일부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시작한 남성화장품. 그 과정을 마칠 즈음, 글로벌 창업사관학교에 합격했다. 350시간이 넘는 AI 수업과 리더십 훈련, 멘토링과 투자 피치까지—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불확실성을 끌어안으며, 실행으로 답을 찾는 법을 배웠다.
그때는 그것이 곧 성공의 길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정작 핵심은 아직 보지 못하고 있었다.
컬러 프로젝트를 이어가면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연구의 발견’과 ‘사업화의 현실’은 다르다는 것.
그리고 선택과 집중이 너무 필요하다는 것.
끝없이 실험하고, 부딪히며 불편함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하는 것이야말로 스타트업의 본질이 아닐까.
무엇보다 크게 다가온 깨달음은,
사업이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성찰이었다.
내가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두려워하며, 어떤 순간에 가장 몰입하는 사람인지—
그 과정을 통과하며 비로소 또렷하게 마주할 수 있었다.
캐스 카페(Cath’s Cafe) 기획을 하면서 쌓은 노하우와 커피에 대한 애정은 또 다른 시작으로 이어졌다. 컨설팅 프로젝트처럼 가볍게 시작했던 포스톤즈 커피로스터즈 브랜딩은 어느새 내 손끝에서 직접 현실로 구현해야 하는 일이 되었다.
6개월 된 로스터리 카페, 매장은 하나, 함께할 멤버는 단 다섯 명. 불안정한 상황에서 내가 맡게 된 역할은 단순히 매장을 살리는 일이 아니라, 브랜드의 가능성을 어디까지 넓힐 수 있을지 실험하는 일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구축’이라는 단어에 집중했다. 브랜드, 운영, 커머스, 매장이 유기적으로 연결될 때, 비로소 브랜드 경험이 완성된다. 커피 한 잔에서 끝나는 경험이 아니라, 그 커피가 고객의 삶 속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순간을 만드는 것. 도심속에서 느낄 수 있는 자연공간을 선물하고 싶었다. 특히 코로나 19 이후 사람들는 자신만이 즐길 수 있는 공간을 더 찾게 되었다. 더이상 매장은 단순한 브랜드가 살아 숨 쉬는 쇼룸이 아닌, 사람들이 일상 속에서 작은 행복을 발견하는 장소였다.
나는 두 개의 신규 매장을 직접 기획하고 런칭했다. 입지를 고민하고, 컨셉을 세우고, 건축사와 작은 디테일 하나까지 브랜드의 결을 입혔다. 새로운 매장이 문을 열 때마다 “이곳에서 우리는 어떤 경험을 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그 경험을 온전히 고객이 느끼게 만들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좋은 멤버였다. 그 좋은 멤버와 함께하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브랜드였기에, 새로운 멤버를 맞이하는 순간마다 우리의 철학과 비전을 처음부터 전해야 했다. 한 잔의 커피에 진정성을 담아낼 바리스타, 브랜드의 가치를 이해하고 함께 호흡할 사람을 찾아야 했다. 나는 유명한 매장을 직접 찾아다니며 조언을 구했고, 감사하게도 결국 15년 경력의 리브레 출신 해드 로스터를 팀에 영입할 수 있었다.
그렇게 입사한 지 1년 만에 광화문점과 삼성 파르나스점이 문을 열었다. 특히 파르나스 입점은 신생 브랜드로서는 난이도 높은 도전이었다. 우리가 입점한 공간은 원래 패션 브랜드 구역이었고, 두 개의 장소를 합쳐 쓰다 보니 강남구청 대수선 승인까지 받아야 했다. 그렇게 차근차근 과정을 밟아 나갔고, 지금도 삼성동 파르나스몰에서 자리를 지키며 브랜드의 가능성을 증명하고 있다. 그렇게 우리는 50명의 조직이 되었다.
또 하나의 큰 도전은 포스톤즈 신축 프로젝트였다. 브랜드의 철학과 미래를 담아낼 공간을 짓는 일은 시작부터 챌린지 투성이었다. 좋은 부지는 가격적 매리트가 없고, 수요와 공급의 논리에 따라 어렵게 삼청동 부지를 매입했다. 한 곳을 확보한 뒤, 옆 부지까지 설득하고 매입하는 과정도 계속되는 설득 끝에 겨우 가능하게 만들었다.
처음으로 건축 설계 공모를 진행하며, 건축사와 함께 우리가 생각하는 공간을 그려가기 시작했다. 또 하나의 난관은 국무총리실 민원. 주말에 걸려온 한 통의 전화에 어안이 벙벙했지만, 민원도 차근차근 해결하며, 여러 난관을 하나씩 정리하면서 건축 시안은 현실이 되어갔다. 나아가 디테일을 조율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지만, 그 모든 순간이 하나의 거대한 브랜드 경험을 만들어가는 여정처럼 느껴졌다.
주말에는 가장 중요한 커피의 맛을 위해 커피를 제대로 배우기 시작했다. 좋은 원두를 착한 가격에 구매하기 위해 리브레 및 더드립 등 다양한 커피 구루가 주최하는 커핑도 하기 시작했다. 코엑스에서 하는 전시 커피 팝업도하고, 1년반이라는 시간동안 브랜드가 제대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이 신사업은 커머스적 확장을 끊임없이 요구했다. 매장에서 원두를 판매하는 것을 넘어, 고객이 집에서 커피를 내리고, 출근길 텀블러로 향을 느끼고, 여행지에서 브랜드 굿즈로 순간을 기록할 수 있게 만드는 것. 커피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과 연결되는 매개체가 되었다.
스타트업에서 익힌 빠른 실행과 실험의 감각은 이곳에서도 여전히 유효했다. 아이디어를 빠르게 시도하고, 고객의 반응을 확인하며, 다시 다듬어가는 과정. 그렇게 깨달았다. 확장은 단순히 무언가를 늘리는 것을 넘어, 브랜드가 사람들의 삶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정의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돌이켜보면, 이러한 경험은 나 자신의 장점과 단점을 알아가는 과정이었다. 모르는 일을 마치 잘아는 듯하게 진행하는 스킬을 획득했다. 그 동안 경험했던 연구와 데이터, 브랜드와 공간, 커머스와 사람의 삶이 하나로 연결되는 느낌. 그때 비로소 나는 내 커리어가 새로운 길 위에 서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