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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존재 Aug 18. 2022

돈에 잡하먹힌 작가


이것도 작가라면 작가지. 먹고살기 위해 글을 활용하는 인간이니까. 인간은 글을 벌기 위해 글을 쓸 때 비로소 작가가 된다. 어디선가 읽고 깊게 공감한 문장 아니었나. 나는 책이라는 매체를 활용하지 않을 뿐 엄연히 작가로서 살아가는 중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내게 전혀 위안을 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내게 위안을 줄 수 있는가. 새로운 지식, 새로운 음악, 작품들에서 얻을 수 있는 짤막한 카타르시스의 순간. 그다음으론 능력의 향상. 나의 재능으로 돈을 버는 것.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능력들을 개발해가는 것.


그리고 인간들. 내가 마음을 쏟을 가치가 있는 드문 인간들. 그것들이 내게 위안을 준다.


운 좋게도 나는 우울의 굴레를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한때는 내가 우울을 위해 태어난 인간이라고 생각하며 다자이 오사무와 이승우와 홀든을 동경하고 그들의 이미지와 나의 자아를 비교하는 것에서 즐거움을 얻던 인간이었는데 말이다. 믿기지가 않아. 인간이 이렇게도 변할 수 있다는 게.


어쩌면 변하기 때문에 인간인지도 모른다. 동물과 식물은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변해도 크게 변하지 않는다. 번식을 위한 행동양식들은 정해져있고 긴 시간에 걸쳐 일어나는 미세한 변화들 외엔 차이가 생기지 않는다. 멍멍이는 어제도 주인에게 간식을 받기 위해 애교를 부렸고 오늘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루는 누군가의 자선을 기쁘게 받아들여 그걸로 음식을 사 게걸스레 먹어치우다가도 다른 하루엔 돈을 받으면 심히 기뻐하며 그를 총으로 쏴 죽일 수도 있다. 땅부터 하늘까지의 비약 같지만,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는 것을 보아 내 생각은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뭐 이런 논증방식은 중세 철학자들이나 할 짓 같지만 아무래도 좋다. 인간의 심리적 변동성은 예측할 수 없고 단언할 수 없다. 그 뇌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본인조차도.


돈을 위해 자신을 가공한다는 건 참 비참한 일이다. 나는 여전히 그렇게 생각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산발적인 사고의 흐름을 몇 가지로 다듬어야 한다는 사실이 그렇다. 창의력과 비례하는 확장성을 있는 그대로 두지 못하고 가지를 꺾는 일은, 그것도 스스로 그러는 일은 비애 그 자체이다.


어쩔 수 없지. 나는 돈이 없으니까. 비참하지만 그건 창의력에 가치를 뒀을 때 생기는 비참함일 뿐, 창조란 자의식에서 벗어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별로 비참하지도 않다.


한 가지 염두에 둘 것. 돈을 벌고 사고 회로를 저 차선화시키는 것에 익숙해져가더라도 근본에 해당하는 사고 회로는 살려야 한다. 있는 그대로 떠들고 웃고 벽을 부수는 뇌는 포르말린에 절여 생생히 살려야 한다. 생체 표본이 되는 게 싫다면 끝없이 피를 수혈하는 한이 있더라도 가장 신선한 상태로 유지시켜야만 한다.


그걸 유지하지 못한다면 물질과 명성을 얻더라도 아무 의미 없다. 물질의 정복이 주는 쾌락은 창조력의 발산이 주는 쾌락을 대체할 수 없다. 내적 표현의 갈망을 타고난 인간들은 그걸 만족시키지 못하면 행복할 수 없다. 표현 없는 안정은 공허해져만 갈 것이다.


그렇기에 그걸 할 수 있는 최고의 자원, 신선한 감각을 유지해야만 한다. 글을 쓰고 말을 해야 한다. 상업적으로 지양되는 길고 입체적인 문장들을 적어야만 한다. 그래서 표현하려면 불가피하게 복수의 형용사와 부사가 들어가야만 하는 관념을 떠올리고 그걸 문장화시켜야 한다. 창의력의 피는 누군가에게 수혈받을 수 없다. 그 피를 펌프질하는 것은 창의력의 공장을 가동하는 자기 자신, 그 공장에서 흘러나오는 부산물들을 씹고 소화해서 배설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자기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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