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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ipping with the Enemy

by BumBoo

면회실로 향하는 복도 내내, 이안의 흙먼지 묻은 뇌는 쉼 없이 회전했다. 가족이라곤 없는 자신에게 도대체 누가 찾아왔단 말인가. 알 수 없는 불안감과 희미한 기대감이 뒤섞여 발걸음을 무겁게 했다. 드디어 면회실 문이 열리고, 그곳에 앉아 있는 여인의 모습은 이안의 얼어붙은 시간 감각을 더욱 혼란에 빠뜨렸다.


긴 붉은 머리카락, 검은 선글라스, 회색빛 감옥의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빈틈없이 정돈된 차림새. 흡사 다른 차원에서 불시착한 존재처럼 현실감을 잃은 모습이었다. 이안과는 확연히 다른 세계에서 온 듯한 그녀, 류세린이었다. 그는 삐걱거리는 몸을 움직여 마주한 자리에 앉았다. 뻣뻣하게 굳은 어색한 침묵 속, 류세린의 차가운 시선이 이안의 만신창이가 된 몰골을 천천히 훑었다. 그 시선은 상처투성이의 육체를 스캔하듯 지나쳤다.


"어디 한바탕 크게 구르기라도 한 모양이군요. 꼴이 말이 아니네요." 류세린의 목소리는 미약한 비아냥거림과 차가운 평가가 뒤섞여 있었다.


이안은 자신도 모르게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네, 소동이 좀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례지만… 혹시 제가 아는 분이신가요? 뇌사 상태에서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머리가 온전치 않아서 기억이…."


류세린은 싸늘하게 일축했다. "아뇨. 이안 씨는 저를 모릅니다. 저는 이안 씨를 잘 알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단호함과 함께 알 수 없는 오만함이 배어 있었다.


"무슨 볼일이라도…." 이안은 문득 불안감에 휩싸였다.


류세린은 작게 헛웃음을 흘렸다. "정말 전혀 의식이 없었나 보군요. 좋아요, 제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이안 씨는 저의 아버지를 죽인 살인자입니다."


이안의 뇌는 번개 맞은 듯 순간적으로 정지했다. 지금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가 어느 영화의 시놉시스인 양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네? 그게 무슨… 살인자라니요?"


"당신은 지금 제 아버지, 시냅스 코어 류현수 소장을 살해한 혐의로 이곳에 수감된 사형수라는 말입니다." 류세린은 교도관을 의식하듯 나직이 속삭였지만, 그 내용은 강철처럼 견고했다.


이안은 자신의 헐벗은 기억 속을 헤집었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게 무슨 말이죠? 제가 당신의 아버지를 살해했다니요."


"그럼, 당신은 영문도 모른 채 지금 이 감옥에 갇혀 있다는 말인가요?" 류세린의 질문에는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


"의식이 돌아온 후, 그 누구도 지금 제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왜 수형복을 입고 여기에 갇히게 되었는지 설명해주지 않았습니다." 이안의 눈에는 혼란과 억울함이 뒤섞여 있었다.


류세린은 선글라스 너머로 이안을 꿰뚫어 볼 듯 응시했다. "하. 한심하기 그지없군요. 이런 멍청한 자를 구하려고 했다니." 그녀의 말끝이 살짝 흐려졌지만, 이안은 그 안에서 자신을 구하려 했다는 의외의 정보를 포착했다.


"그럼… 제가 그쪽 분의 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로 사형판결을 받았다는 말인 거죠?" 이안은 다시 한번 되물었다. 믿을 수 없었지만, 이 상황 자체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혐의가 아니라, 당신이 우리 아버지를 살해했어요. 증거라도 보여드릴까요?" 류세린은 당장이라도 작은 손 안의 태블릿을 이안의 얼굴 앞에 들이밀 기세였다.


"저는 도무지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것이라고는… 대리운전을 해서 차를 주차해 주고, 이상한 연기를 마신 후 의식을 잃은 것이 전부입니다." 이안의 목소리는 희미한 과거의 파편을 더듬고 있었다.


"그 대리운전을 시킨 사람, 기억해요? 누군지?" 류세린의 눈빛이 순간 예리하게 빛났다.


"뚜렷하지는 않지만, 얼굴을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60대 중반의 아주 부유하고 지적으로 보이는 남자였습니다."


"생각보다 멍청하지는 않은 모양이네요.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저는 당신의 사형 집행일에 사형을 중지시키러 갔었어요." 류세린의 고백은 이안에게 또 다른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안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 의문 가득한 시선을 피하지 않고, 류세린은 마치 차가운 강철 같은 확신에 차 있었다.


"미치지 않았으니 그런 눈 하지 말아요." 류세린은 단호하게 말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 아니 당신에게 살해당하기 전에 저에게 유서처럼 이 태블릿을 남기셨어요. 이 태블릿 안에는 아버지의 3년간의 연구일지가 담겨있죠. 당신의 사형 집행일 전날 저는 이 태블릿을 발견했고, 그때 당신이 살인범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사형 집행을 중지시키려고 했던 거고요."


이안은 그녀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이야기들이 도무지 무슨 의미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마치 외계어가 난무하는 강연을 듣는 외국인처럼 그녀를 응시할 뿐이었다.


"또 얼빠진 표정을 하고 있군요. 아무튼, 저는 아버지의 살인 사건에 숨겨진 진실을 알아야겠어요. 그리고 그 진실을 밝히려면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류세린의 목소리에는 미약한 절박함이 묻어났다.


"네? 그러니까 그쪽 말은… 제가 살인범이 아니라는 거죠?" 이안은 한 단어 한 단어 겨우 확인하듯 물었다.


"그쪽이 아니라 류세린이에요. 인사가 늦었네요. 저는 현재 시냅스 코어 연구소장으로 있습니다." 그녀는 명함을 내밀 듯 건조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네, 안녕하세요. 이안이라고 합니다." 이안은 얼떨결에 맞인사를 건넸다.


"아무튼, 저는 당신이 살인 누명을 벗고 저를 도와 이 진실을 파헤칠 의지가 있는지 확인하러 온 거예요. 그런데 조금 실망스럽네요. 이렇게 얼빠진…." 류세린은 불쾌한 듯 말끝을 흐리며 선글라스 너머로 둘의 대화를 감시하고 있던 교도관을 힐끗 노려보았다.


이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칠흑 같은 절망 속에 드리운 한 줄기 빛. 그는 그 빛을 향해 몸을 던지려는 듯, 굳게 결심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살인 누명을 벗을 수만 있다면 백번이고 천 번이고 돕겠습니다."


류세린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저는 이제부터 당신의 무죄를 입증하는 일에 착수할 거예요. 당신도 알다시피 이미 항소 기간은 지났습니다. 따라서 항소는 더 이상 불가능해요. 남은 방법은 오직 재심 청구뿐입니다. 저는 당신을 위해 재심을 신청할 거예요. 그러니 당신은 교도소 내에서 사고 치지 말고 모범수가 되세요. 그러면 교도소 내 도서관 자료들에 대한 접근이 가능해질 테니, 어떻게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낼지 그것만 생각해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리고 이렇게 쥐어 터지고 다니지 않게 몸도 좀 만들고요."

이안은 그녀의 현실적인 조언에 겸연쩍은 듯 상처투성이인 머리를 긁었다.


"그럼, 전 이만 가봐야겠네요. 면회 시간도 끝나가는 모양이니. 그럼 다음에 또 봐요." 그녀는 인사하는 둥 마는 둥 휑하니 면회실 문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는 이안의 머릿속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살인자를 돕는 여자라니. 어쨌든 지금 그에게는 그녀가 유일한 조력자이며, 이 시궁창 같은 곳에서 그를 꺼내줄 유일한 구원이자 희망임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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