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1 낯설지만 그리던 땅
인천에 있는 목재 합판 전문기업 E산업은 해외에 법인 사무소가 몇 군데 있다.
미국, 칠레, 중국, 그리고 솔로몬 군도이다. 여기서 나는 솔로몬 군도에 가게 되었고 일할 때 필요한 서류를 기다리며 (Workpermit을 비롯한 일련의 서류가 필요하다.) 짧게는 3개월 길게는 수개월 시간이 소요된다. 그 때 알았지만 예전 한국에도 '코리아 타임' 이 있듯 솔로몬 군도에도 '솔로몬 타임'이 있고 그 의미는 생각하는바와 같다.
그 기간동안 솔로몬 군도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 무엇을 준비하고 가야 하는지? 기후, 언어, 문화 등 전반적인 OJT를 받게 된다고 보면 된다.
집은 서울이고 회사는 인천이라 출퇴근 시간이 꽤 걸리고 당사 자차가 없어 대중교통으로 하였다. 다행히 신길역에서 인천까지 급행노선이 있어 그 시간을 잘 맞춰야 하고 계산을 해보니 거의 첫차를 타야 회사까지 지각을 면한다. 종착역인 도화에서 셔틀버스를 타면 그 순간부터는 맘이 편하다. 차마 자리 앉을 엄두는 나지 않지만 그래도 맘편하게 회사까지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장거리 출퇴근 길을 하다가 서울에서 출근하는 직장 선배들과 카풀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 그때부터는 편하게 다녔던 생각이 난다. 그 때 솔로몬 군도외 칠레 법인에 가는 직원도 같이 교육을 받았는데 브라질인가 스페인인가? 아예 살고와서 의사소통은 문제 없었지만 되게 힘들게 보내는 그 직원은 혼자 뽑혔고, 나를 포함한 3명이 솔로몬 군도에 근무하여 늘3명이 함께 붙어있었으니 그것만 봐도 외로웠을 것이다. (반전은 솔로몬 군도 가는 직원도 나중에 1명이 남게 된 것이다.)
대략 인천에서 브리즈번까지 7,645KM가 넘는다.
[출처 : 구글지도]
브리즈번에서 솔로몬 군도까지는 대략 2,191km 거리이다.
[출처 : 구글지도]
나를 포함한 신입직원들은 때로는 항구에 가서 선적된 원목을 보며 실제 솔로몬 군도에 갔을 때 선적 작업이라든지 원목 크기를 재는 등 무역에 관련된 실무를 하게 될텐데 회사에서는 수시로 항구에 보내 직접 보고 경험을 시켰다. 당시 막 2월이 지나서였는데 아직도 바닷바람이 거세고 생각보다 추워서 혼났다. 그리고 무엇보다 원목의 크기와 적재된 모습에 스케일이 엄청나게 컸다. 선착장 한 곳에 수입된 원목들을 모아두고 세관작업이 끝나야 공장으로 다시 이동을 시키는데 그 전까지는 약도 치며 (원목을 보호하는 것도 있고, 벌레를 죽이는 것도 있고 소독의 의미로 시행한다.) 야적장이라 불리는 이곳에 수 많은 원목의 찌꺼기와 흔적이 남아 있기도 해서 이 곳에 가면 원목 특유의 향에도 취하게 된다.
가끔 윗년차 선배들과 함께 가게되면 그래도 가만히 사무실에서 있어서 높으신 분들(?) 눈치보는 것보다 차라리 추워도 현장에 가는게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더 편하다. 그래서 어쩔때는 선배들이 갈 때 그 기회를 잘 포착해서 함께 가서 거기서 점심도 (소위 말하는 함바) 먹고 오후 4시쯤 다시 사무실로 복귀하면 거의 퇴근시간이 다 돼어 시간이 금방 지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잘못 걸려서 계속 야외에만 있어야 하는 상황도 발생하는데 그럴때는 후회도 든다. 가끔 신입에게 원목 상태를 본다고 위에 올라가라 하는데 위에서 움직일 때는 안전에 조심해야 해서 그럴때는 긴장의 연속이었던 순간들도 있었다.
계속해서 본사에서 교육을 받고 대기하는 중 점점 회사 분위기도 익숙해지고 선배들과도 어느정도 편해지기 시작할 무렵 함께 솔로몬 군도에 가기로 한 3명의 동기 중 제일 성적이 좋고 제일 영어를 잘 했던 친구가 갑자기 개인 사정으로 먼저 회사를 그만뒀다. 당시는 그게 충격으로 받아들였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 결혼하고 배우자와 함께 가려고 생각했으나 그 곳 상황이 녹록치 않아 어렵다고 판단을 해서 고심끝에 내린 결론이라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가족이 먼저라는 생각인데 당시는 2000년대 초반이기도 해서 현재의 분위기와 많이 다르다. 내가 만약 그 상황이었더라면 어찌했을까?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할 것 같다. 아직도 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나의 발목을 잡을 때도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1개월이 더 지난 시점에서 가장 활발하고 밝고 제일 젊었던 친구는 본인의 꿈을 이루고 싶다고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솔로몬 군도 가는 것을 포기하고 다른 회사로 들어가서 국내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싶다는 것이다. 이렇게 총3명 중에 2명이 도중에 자의에 의해 사표를 내고 결국 나 홀로 가게 된 것이다. 이 중에서 내가 제일 나이도 많고, 영어도 딸리고, 체력도 약했는데 유일하게 생존자(?)가 된 것이다. 회사의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면 당시 가장 유능하고 젊은 직원에 대한 기대가 있었을 터인데 가장 떨어지는(?) 나만 홀로 남았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충격이 컸을까 하는 생각도 지금에서야 든다.
다시 직원을 뽑고 그러기에는 너무 시간이 지체되고 우선 나 혼자라도 가게 되었다. 3명이 받던 교육을 나 혼자 받게 되고(물론 타부서 동기들도 있지만 거의 만날 기회가 없었다.) 모든 관심과 집중이 오롯이 나한테만 쏟아져 심적으로도 부담감이 많이 들었다.
입사해서 두 달이 지나도록 계속 교육을 받고 서류가 되기 전까지 대기하던 중 부사장님께서 나를 데리고 동남아 출장을 가신다는 것이다. 일행은 부사장님, 차장님, 그리고 나 까지 총3명이 말레이시아 지사, 인도네시아 그리고 싱가폴을 경유해서 9박10일동안 현지 지사 방문, 거래처 발굴 등 해외출장 업무를 가게 되었다.
직장을 다니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입사한지 두 달 밖에 안돼는 신입사원이 해외에 가서 업무를 하고 지사 방문하고 거래처 발굴은 그야말로 듣기 좋은 말이다. 냉정하게 아무것도 할 수 있는게 없다. 정말 부사장님, 차장님 하는 업무 방해하지 않는 것 만이라도 다행이다. 더군다나 부사장님은 그룹에서 해외출장을 가장 많이 하시는 분이라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으셔도 될 정도이다. 진짜 나는 짐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는 숨은 뜻이 있었다.
부사장님께서 내가 해외에 나간적도 없고 처음으로 해외 가는 곳이 솔로몬 군도이니 그 전에 동남아 출장을 통해 출국심사 부터 입국심사 그리고 공항에서의 매너, 호텔에서의 매너, 비즈니스 상대방에 대한 매너 등 다양한 국제매너를 익히고 곁에서 보고 배우라는 의미에서 안 가도 전혀 이상하지 않는 나를 포함시켜 주신 것이다. 차장님도 나를 배려해 주신다고 이것 저것 자세히 가르쳐 주셨고 정말 출장 동안 많은 것을 느끼게 되었다. 출발 전부터 출장계획서, 귀국해서 출장보고서 작성 등 만만치 않은 작업도 있지만 무엇보다 인천공항 내리자 마자 바로 본사에 가서 업무를 보시는 모습에 시차적응이고 뭐고 없었다. 이게 진정 비즈니스맨의 정석이라고 해야할까? 교과서 읽고 듣는 것보다 살아있는 경험과 배움이었다.
솔로몬 군도에서 모든 서류가 준비 되고 출국 날짜가 정해졌다. 인터넷으로도 많은 정보가 나와 있지않고 미지의 섬나라로 가는 기분이 셀렘과 흥분 그리고 기대와 걱정으로 내 도파민을 극도로 뿜어냈다. 다행히 휴가 나와서 복귀하는 선배가 있어서 동행 할 수 있었다. 솔로몬 군도로 가는 비행기는 직항이 없어 호주 브리즈번을 통해 가거나 싱가폴로 가서 파퓨아뉴기니를 경유해서 가는 편이 있다. 나는 운좋게도 호주를 통해 갈 수 있어서 싱가풀쪽보다는 경유를 한번 줄일 수 있었다. 긴 비행시간을 마치고 브리즈번에 잘 도착했고 다음 날 솔로몬 군도로 가게 되어 하루 숙박을 해야한다. 공항 근처 레지던스를 알아봤는데 이미 예약이 다 차서 시내까지 택시를 타고 갔다. 간신히 숙소를 잡아 짐을 풀고 시내로 나가 구경을 하였다. 오후4시가 되니 벌써부터 상점들이 문을 닫고 있어서 한국과는 다른 분위기라 적잖이 놀랐다. 그리고 길거리에서 젊은 친구 3명이 나에 대해 소리지르고 시비를 걸었지만 그냥 무시하고 지나갔다. 대꾸하면 그 순간 문제가 발생할 것이고 나는 이곳에서 이방인이기 때문에 무조건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저녁이 되어서 도착한 날이 수요일이라 한인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싶어서 지도를 펴서 찾아갔는데 중간에 길을 잘몰라 시민들에게 물어보면 모두가 친절하게 내가 알아들을때까지 설명을 해주어 어렵지 않게 교회에 도착하여 한인 교회에서 예배도 드릴 수 있어 감사하고 내일 솔로몬 군도 입국도 아무 문제없도록 간절히 기도로 마치고 숙소에 일찍 도착하여 잠을 청하였다.
브리즈번에서 솔로몬 군도로 출국을 할 때 이민국에서 서류를 까다롭게 살피고 무슨 목적으로 왜 가려는지 꼬치꼬치 캐물었다. 나는 준비한 서류를 차근 차근 보여주고 설명을 해서 이내 도장을 받고 비행기를 탔다. 브리즈번에서 호니아라(솔로몬 군도 수도) 공항까지는 또 3시간이 넘는 시간이 걸린다. 한국에서 브리즈번까지는 아시아인, 서양인 등 반반씩이었다면 브리즈번에서 호니아라 까지는 대부분 멜라네시아인들이 대부분 이었다.
영어도 아닌 피진어를 사용하고 있어서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중에 다시 피진어를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 때는 핸드폰도 지금처럼 스마튼폰이 아닌, 2G형식으로 번호룰 꾹꾹 눌러야 해서 핸드폰으로 인터넷을 하고 유투브를 보거나 또 구글을 통해 서치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이런 말은 내가 나이가 들기는 들었다 보다.)내리기전 입국 심사 카드를 작성하고 드디어 첫발을 내딛을 준비가 다 되었다.
이제 이 곳이 내가 앞으로 근무하고 살아야 할 개척의 땅인 것이다.
P.S
1. 많은 사진 자료들이 있었지만 세월이 지나 유실되고 또 싸이**에 (당시 최고인기...) 대다수 기록이 있지만 날라가 버렸고 디지털 카메라도 비에 흠뻑 젖어 SD카드도 건지지 못할 정도라 아쉽게 사진 및 영상 자료는 많이 올릴지 못할 것입니다.
2. 천혜의 자연, 스킨스쿠버의 천국, 평화로운 거리, 순수한 사람들과 함께한 그 추억이 생생하여 시각적 자료가 없어도 최대한 자세하게 묘사할 생각입니다.
3. 지금은 인터넷이 발달하여 구글링을 몇번 만 해도 손쉽게 정보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중복되거나 많이 접할 수 있는 것들은 과감히 스킵하고 현장에서 직접 느끼고 보고 깨달은 내용 중심으로 게재할겁니다.
4. 아직도 현지에서 근무하고 있는 한국인들, 또는 거주하는 교포들이 있어 최대한 실명 처리를 하지 않으려 합니다. 혹시나 그 분들에게 피해나 어려움을 주는 일은 안하는게 제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발생할 수 있는 예측 불가한 상황은 너그러이 양해를 해주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