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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알바였는데

나의 천직의 시작

공부방을 천직으로 삼은 지 벌써 22년째이다. 이렇게 오랫동안 아이들과 함께 할 줄은 몰랐다. 공부방 창업에 관심이 있으시거나, 아이들을 가르치시는 데 어려움을 겪고 계신 선생님이나 부모님들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나의 이야기를 매주 한 편씩 풀어 볼 까한다.


처음으로 아이들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대학원 장학조교로 근무할 때였다. 집안 사정도 어렵고 생활비가 필요해서 알바를 알아보게 되었다. 나의 적성과 시간에 가장 맞는 것이 학원이었다. 그중에서 사회과목이 가장 자신 있었다. 학창 시절부터 사회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과목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사회선생님 알바. 내가 잘하는 것을 가르치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머릿속은 실타래 꼬이 듯 꼬이고, 혀는 굳어버리고, 시선처리는 불안하고 총체적 난국이었다. 나에게 집중하고 있던 아이들의 호기심 어린 눈빛을 잊을 수 없다. '저 선생님은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일까?' '덩치는 산만한 사람이 왜 저렇게 떨고 있을까?'라고 생각했을 것 같다. 어떤 일이든 많이 해보면 잘하게 된다는 말은 진리였다. 왕초보였던 나는 조금씩 천천히 적응하고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만의 수업방식이 만들어져 갔고, 나는 여유를 찾고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수업 중에 아이들과 농담도하고 웃을 수 있는 경지(?)에 오르게 되었다.



나는 오후 3시부터 10시까지 수업을 진행하였다. 오후 3시부터 5시까지는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사회를 가르쳤다. 저녁식사 후, 6시부터 9시까지는 중, 고등학생들을 가르쳤다. 초등학교 3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가르치다 보니, 연령별 아이들의 특징이 재미있었다. 초등학교 3, 4, 5년들은 대부분 순한 양 같았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가르치면 가르치는 잘 따라와 주었다. 반면, 사춘기가 시작되는 초6, 중1, 중2, 중3들은 장난기와 반항기가 넘쳐났다. 무슨 얘기를 할 때마다 꼬투리를 잡고 비아냥거렸다. 그래도 뭔가 반응을 해 주는 것은 양반이었다. 무슨 얘기를 하든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아이들이 정말 힘들었다. 아무리 인풋을 쏟아부어도, 돌아오는 아웃풋은 없었다. 벽에다 얘기하는 느낌이었다. 미워하는 것보다 무서운 것이 무관심이라고 했던가. 돌아보면, 극심하게 사춘기를 앓았던 나도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입장이 바뀌다 보니,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사춘기의 정점에 서 있는 아이들과 소통하기 위해 돌파구를 찾고 또 찾아보았다. 결국, 해답은 관심사였다. 사람마다 백인백색이 듯, 아이들마다 관심사가 모두 달랐다. 어떤 아이는 야구를 좋아하고, 어떤 아이는 핑클을 좋아하고, 어떤 아이는 만화를 좋아하고 어떤 아이는 먹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매시간마다 한 명의 아이와 그 아이의 관심사에 대해서 5분 정도 얘기를 나누었다. 나의 전략은 성공적이었다. 석고상처럼 입을 굳게 다물고 있던 아이들이 어느새 조잘조잘 떠들고 있었다. 자신의 관심사에 대해 질문해 주고 경청해 주고 공감하고 맞장구쳐 주는 사람을 그 누가 싫어하겠는가. 나는 그렇게 인기선생님으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나나 아이들이나 수업만족도도 점점 높아져갔다.

그렇게 한창 재미있는 나날들을 보내 던 중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되었다. 학원이 문을 닫는다는 소식이었다. 원장님의 무리한 사업확장으로 인해서 부도가 난 것이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동안 정든 아이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이렇게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허무했다. 돈을 벌기 위한 알바였지만, 새로운 인연을 떠나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렇게 진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나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어느새 마지막 대학원 학기가 지나고 졸업식을 한 달 즈음 앞둔 시점에서 누나에게서 연락이 왔다.


이제, 수다스러운 공부방의 재미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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