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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홍수정 Sep 06. 2024

지금 한국의 공포를 건드리다,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SBS의 '스브스 프리미엄'에 기고한 글입니다.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예고편 캡처

넷플릭스의 시리즈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는 이달 공개되기 전부터 주목받았다. <부부의 세계>를 연출한 모완일 감독 작품이고, 김윤석 배우가 17년 만에 복귀한 드라마다. 외진 숲속 펜션에서 벌어지는 스릴러 사건을 다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작품의 만듦새가 뛰어나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드라마는 중간중간 길을 헤매고, 그때마다 긴장감도 떨어진다.


그러나 이 시리즈에서 정작 흥미로운 부분은 따로 있다. 바로 이 작품이 콕콕 건드리는 공포의 근원이다. 스릴러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포가 어디에서 오느냐의 문제다. 그렇다면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가 자극하는 두려움의 근원지는 어디일까? 어설픈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8월 말 기준으로) 넷플릭스 시리즈 1위를 달리고 있다. 만일 시청자가 이 작품 속 스릴에 반응했다면, 과연 그것의 실체는 무엇일까? 아래부터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에 관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으니 유의하기를 바란다.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예고편 캡처

전영하(김윤석)는 자신이 운영하는 펜션에서 살인 사건이 벌어졌음을 직감한다. 살인마는 펜션에서 묵었던 미스테리한 여인 유성아(고민시)다. 영하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하나다. 펜션의 안녕. 살인 사건이 벌어졌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이 펜션은 어떻게 되는 걸까? 누구도 오지 않는 흉가가 되는 건가? 펜션 하나 관리하며 사는 내 인생은? 나의 가족은?


영하의 속마음을 눈치챈 성아는 점차 더 대범하게 다가온다. 그가 자신을 신고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한 것이다. 그녀는 이윽고 펜션에 눌러앉아 그것을 빼앗으려 든다. 이때 영하는 하나의 감정에 휘말린다. 이건 내 펜션이야. 너 같은 것에게 빼앗길 수 없어.


평범한 가정의 평범한 가장, 영하. 그는 홀연히 나타난 살인마를 바라보며 생각을 거듭한다. 피해자는 안타깝지만 나까지 이 비극에 휘말릴 수는 없다고. 나의 소중한 펜션을 지키겠노라고. 피해자를 연민하면서도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무서워 몸을 웅크리는 영하의 모습은 그다지 낯설지 않다.


그렇다면 영하가 이다지도 두려움에 떠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어떤 생각이 전제돼 있다. 남의 불행에 휘말린 이들은 피해를 볼 것이라는 확신. 그렇게 입은 피해를 국가도, 사회도, 어느 누구도 보상해 주지 않으리라는 의심. 한마디로, 까닥 잘못하면 망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이 세계에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인가. 이 작품에서는 정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누구도 정의감을 바탕으로 행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이곳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밑바닥의 본능이다. 호기심, 복수심, 소유욕 같은 것들. 살인마도, 영하도, 심지어 경찰조차도 사명감보다는 살인에 대한 본능적 호기심으로 사건 주위를 어슬렁거린다.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예고편 캡처

이곳에는 시스템도 작동하지 않는다. 모든 정의 구현은 오로지 사적 복수를 통해 이뤄진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분노한 이들은 직접 총을 쏘고, 경찰은 한발 늦게 도착해 잔해를 더듬을 따름이다. 마지막에 인물들은 서로를 죽이고 용서하지만, 이것은 모두 사적인 차원에서 이뤄진다. 법, 규칙 따위를 바로 세우려는 노력은 없다. 시스템은 마지막까지 침묵할 뿐이다.


특히 충격적인 부분이 있다. 살인마를 처단한 이들은 결국 처벌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 명은 자기만의 동굴에 들어가고, 다른 한 명은 제대로 언급조차 되지 않은 채 시리즈가 끝이 난다. 그러니까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는 사적으로 악인을 처단한 이들을 사실상 묵인한 채 끝을 맺는다.


통상 대중 예술에서 범죄를 저지른 이는 어떤 방식으로든 처벌받기 마련이다. 악인을 죽인 경우 정상 참작을 받아 가볍게 처벌받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을 죽이고 아무런 벌도 받지 않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죄를 저지르면 어떤 방식으로든 벌을 받는다는 것이 대중 예술의 관행이자, 암묵적인 룰이다.


그래서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의 결말이 더 충격적이다. 사람을 죽이고도 벌받지 않는 인물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 삶을 흔드는 이를 만난다면 공격을 감행해서라도 자신을 지켜야 한다'라는 생각이 우리 사회에 공유되고 있다는 시그널이다. 달라진 관객의 의식이 새 작품에 녹아든 것이다.


고장난 시스템과 너무 느린 공권력. 여기저기서 출몰하는 나쁜 놈들. 언제 허물어질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인생. 이런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누군가 자기 손에 피를 묻힌 들, 과연 그를 욕할 수 있을까. 이것이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가 보여주는 지금 우리 사회의 무의식이다.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예고편 캡처

이런 기조는 내가 앞서 기고한 <"어떻게든 살아남아라"... 생존게임에 내던져진 이들의 공통점>이라는 글에서 짚은 맥락과 일맥상통한다. 당시 나는 올 상반기 흥행한 국내 영화를 통해 볼 때, 한국 사회는 현재 생존게임을 벌이고 있다고 해석했다.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을 볼 때, 한국 사회는 여전히 생존게임에 던져진 상태다. 다만 그 게임은 외롭고 잔혹하다. 언제 내 것을 빼앗길지 모르기 때문에 공포스럽고, 그 두려움조차 함부로 내색할 수 없다. 작품 속에는 '누군가 던진 돌에 맞은 개구리'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언제 돌에 맞을지 몰라 전전긍긍하며 다음 수를 이어가는 개구리들의 세계가 여기 있다.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는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지적을 많이 받았다. 그런데 그 지적은 대체로 스토리의 개연성에 대한 것이었다. 살인마 캐릭터가 과하다거나, 그에 대한 영하의 반응이 과도하다는 지적은 별로 없었다. 그러니까 이 작품이 펼친 공포에 대해 시청자는 대체로 수긍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스릴러 작품에는 그 사회의 공포가 녹아 있다. 지금 우리가 감각하는 한국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원문 https://premium.sbs.co.kr/article/d7VxgqdRh8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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