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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홍수정 Oct 07. 2024

관객에게 아양 떠는 조커라니

<조커: 폴리 아 되>가 앙상하게 느껴지는 이유

※ SBS의 '스브스 프리미엄'에 기고한 글입니다

<조커: 폴리 아 되> 스틸컷

빨간 정장 위로 찰랑대는 머리. 계단 위에서 추는 괴상하고 멋진 춤. 전 세계적으로 무수한 짭(?)조커를 양산했던 <조커>(2019)가 5년 만에 돌아왔다. <조커: 폴리 아 되>라는 낯선 이름으로. '폴리 아 되(Folie à Deux)'는 프랑스어로 '둘의 광기'라는 뜻이다. 언론도 앞다퉈 '미친 자'들의 '미친 사랑' 이야기라 일컬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영화가 그다지 미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아니, 오히려 이 영화는 지극히 제정신이며 관객의 이쁨을 받기 위해 치열하다. <조커: 폴리 아 되>에는 여러 문제가 있지만, 이 영화가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를 얼마나 무가치하게 소모해 버렸는지에 대해 집중적으로 말해보려 한다. 아래부터 <조커: 폴리 아 되>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나온다.


<조커: 폴리 아 되> 스틸컷

실은 전작 <조커>에 대한 평가도 부풀려진 경향이 있다. 이 영화는 만듦새가 그다지 훌륭하다 말하기 어려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데는 주역을 맡은 호아킨 피닉스의 열연 덕이 컸다. 감독 토드 필립스도 이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지, 호아킨 피닉스의 얼굴과 움직임을 잡아내는 데 매달린다. 그러다 보니 영화 자체가 감독의 작품이라기보다 최애를 담은 덕후의 영상같이 느껴지는 측면이 있다(이런 영상을 비하하는 것은 아니고, 영화가 그런 인상을 풍기는 것이 특이하다는 의미다). 이 작전은 오히려 먹혀들었다. 호아킨 피닉스는 제 몫을 제대로 해냈고, 완성도와 별개로 영화는 많은 사랑을 받았으니까.


<조커>에서 가장 강하게 뇌리에 남는 장면은 단연 조커가 계단에서 춤을 추며 내려오는 장면이다. 무어라 설명하기 어려운 춤사위인데, 호아킨 피닉스는 이 움직임을 또 찰떡같이 소화한다. 이 씬은 유튜브 영상, SNS 프로필 등에서 무수히 재생산되며 인기를 입증했다.


조커의 춤이 그다지도 강렬한 것은 단순히 호아킨 피닉스가 느낌 있게 소화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것이 아서 플렉의 실패와 좌절, 그로 인한 조커의 탄생, 그 이면에 담긴 슬픔과 짜릿한 해방감을 동시에 뿜어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에 관한 서사가 춤 장면의 앞뒤를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 없이 단순히 춤만 덩실덩실 춘다면, 아무리 호아킨 피닉스라 할지라도 폭발적인 사랑을 받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조커>를 대표하는 바로 그 춤. 이런 동작이 뽐새나 보이다니, 호아킨 피닉스가 얼마나 잘 살렸는지 알 수 있음.

그런데 토드 필립스는 <조커>의 성공이 단순히 춤 때문이라 생각했는지, 후속작에 댄스를 꽉꽉 채우고 거기 어울리는 노래까지 가득 담아 가져왔다. 이런 추측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영화가 캐릭터 '조커'를 둘러싼 서사나 감정 일체에 무관심한 채로 조커의 춤을 자랑하는 데 여념이 없기 때문이다. 조금 과장하자면, <조커: 폴리 아 되>는 <조커>의 계단 신을 2시간으로 늘려놓은 작품에 불과하다.


사실 조커에 관한 서사는 전작에서 충분히 나왔고, 후속작은 그 서사마저 뛰어넘는 조커만의 세계관을 보여주길 바랐다. 아서 플렉의 사연으로도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조커의 광기와 카리스마, 자신만의 철학, 그런 것들 말이다. <다크 나이트>의 조커(히스 레저)가 레전드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이런 요소를 예리하고도 풍부하게 내면화했기 때문이다. 그가 말한 헛소리 중 진실은 무엇일까? 그가 말한 '악당의 품격'이란 무엇인가? 끊임없이 윤리적 딜레마를 꼬집는 질문에 우리는 뭐라 대답해야 할까? <다크 나이트>의 조커는 무수한 의문과 그 뒤로 이어지는 긴 탄식을 자아냈다.


반면 <조커: 폴리 아 되>의 조커는 어떤가? 그는 아서의 망상 안에서 끊임없이 휘청대고 악쓰듯 노래한다. 그러나 이 유별난 몸부림은 정작 조커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 전혀 보여주지 못한다. 그가 환희에 차있든 사랑에 취해있든 마찬가지다. 그것은 조커가 약간 다른 상황에 처했을 때 짓는 약간 다른 표정을 얄팍하게 관찰할 따름이다. 이 소란스러운 장면들은 조커의 내면으로 들어가 그의 정체성을 탐구하지 못한다. 그저 앙상한 어깨와 메마른 얼굴의 표면에 달라붙어, 우리가 이미 아는 조커의 이미지를 거듭거듭 소진할 뿐이다. 이토록 소모적으로 과시되는 이미지는 공허하다.


<조커: 폴리 아 되>가 이런 선택을 내린 이유는, 이런 방식이 관객에게 먹힐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상업 영화는 흥행을 노리고 제작된다. 하지만 캐릭터가 지나치게 흥행에 초점을 맞춘 채로 구성되는 것은 좀 다른 문제다. 만일 <조커: 폴리 아 되>가 조커에 대한 자기 만의 해석을 보여줬다면 그 나름의 평가를 받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조커에 대한 해석이 앙상하다. 시작부터 캠프파이어를 하듯 조커의 이미지를 불사르고, 후반부에는 이해될 수 없는 이유로 캐릭터를 회수한다. 그렇게 조커 쇼는 막을 내린다.


<조커: 폴리 아 되> 스틸컷

그러므로 영화 속 조커가 아무리 심각한 표정을 지어도, 아무리 예술적인 춤을 선보여도, 이 모두가 실은 관객을 향한 아양에 불과하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척하는 조커는 실은, 관객의 반응에 신경을 곤두세운 채 그들이 원하는 이미지를 주는데 정신이 팔려 있다. '세상과 불화하는 외톨이'는 자기 이미지를 열심히 팔아 가며 그 누구보다 세상에 잘 녹아들고 있다.


하지만 정작 관객이 이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점을 그는 모르는 것 같다. 철학 없이 요란하기만 한 빌런이 얼마나 초라한지도. 나는 관심에 목말라 춤을 춰대는 아이가 아니라 진짜 조커가 보고 싶다. 영화의 마지막까지 현란한 움직임과 학대당한 몸, 기이하게 구겨진 얼굴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가 누구인지 잘 모르겠다. 이렇게 허무하게 하나의 캐릭터가 사라지는 것은 퍽 아쉬운 일이다.



원문 https://premium.sbs.co.kr/article/8Qtk_Hf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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