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주제는 요즘 내가 '글쓰기'에 관해 생각할 때,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이다.
예전에는 많은 이들은 글쓰기를 출산에 비유했다. 글쓰기는 자식을 낳는 일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이 말에는 글이 곧 '자식'이라는 생각이 전제돼 있다. 글은 그야말로 유기체이며, 따라서 한 편의 글은 유기성이 있어야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완결성이 있어야 하며, 쓰고자 떠올린 내용을 함뿍 담아야 한다.
하지만 이제 글쓰기는 디지털의 속성을 띤다. 무슨 말이냐면, 마치 블록과 같다. 글은 내가 쓰고자 하는 아이디어 하나만 선명하게 담고 있으면 된다. 이런 글이 쌓이면서 내게는 활용할 수 있는 블록이 늘어난다. 그럼 나중에 이 블록들을 이리저리 조합해서 블록 쌓기를 하면 된다. 블로그를 운영해도 되고, 제목만 따서 인스타그램을 운영해도 되고, 이리저리 조합해서 책을 내도 된다.
예를 들어 <미키 17>에 관한 글을 쓴다고 치자.
머릿속에 SF, 노동자, 봉준호, 생태주의 등등의 내용이 떠오른다. 이전에는 이것들을 모두 포괄하며 유려하게 흐르는 글 한 편을 완성하는 것이 바람직한 글쓰기라고 여겨졌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각각의 키워드마다 글 한 편을 쓰는 것이 유리하다. 분량이 좀 더 짧고, 형식이 좀 더 가벼워도 좋다. 이런 방식으로 글을 여럿 써놓으면 나중에 SF에 관한 글만 모아서 SF 장르론 책을 내도 되고, 봉준호에 관한 글만 모아서 감독론을 내도 된다. 이제 글 하나하나는 디지털 기호에 가깝다. 처음에는 단순해 보이지만 나중에 모여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게 된다.
글쓰기의 속성이 변한 이유는 트렌드 때문이다.
첫 번째로 영화와 글을 소비하는 텀이 너무 짧아졌다. 생각을 모두 담아서 폭 고아서 글로 내는 사이, 이미 영화는 내려가고 관련 글에 관한 대중의 흥미는 사라진다. 타이밍을 놓치게 되는 것이다. 영화에 관한 어떤 생각이 떠올랐을 때 즉시 짧은 글이라도 한 편 쓰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
두 번째로 글을 소비하는 방식도 달라졌다. 긴 글 한 편보다 SNS에 쓴 문장 한 줄이 파워를 발휘하는 시대다. 긴 글과 책은 한 텀 늦게 찾아온다. 영화가 화제성이 올랐을 때, 일단 파도에 몸을 맡겨 글을 쓰고, 시간이 지난 후 콘셉트를 잡아 책을 내는 편이 작가에게 좋다.
또한 출판에서도 단순히 영화에 관한 비평글이나 에세이를 모아 내는 유행은 지났다. 이제는 선명한 콘셉트를 잡아서 여러 글을 엮어 내는 것이 대세다. 이런 경우 여러 콘셉트의 글이 다양하게 있으면 선택할 수 있는 조합이 많아진다. 출판이 결정된 후에 글의 길이가 너무 짧다고 느껴지면, 이미 쓴 글을 토대로 긴 글을 다시 쓰면 된다. 너무 길고 유기성이 강한 글은 오히려 활용도가 떨어지기도 한다.
또한 작은 글을 여럿 쓰는 것이 글쓰기를 연습하는 입장에서도 지치지 않아서 좋다. 짧든 길든 일단 글을 자주 출고해야, 성취감이 쌓이며 글쓰기에 재미를 붙이기 때문이다.
오해를 막기 위해 덧붙인다. 길고 유기적인 글을 쓰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지금의 창작/출판계에서는 짧고 선명한 글을 여럿 쓰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는 뜻이다. 이를 강조하며 인식을 전환하기 위해 '글은 디지털'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어찌 보면 굉장히 단순한 내용이다. 하지만 나는 이것을 글을 쓴 지 10년이 지난 후에야 깨달았다. 혹은 그만큼의 시간을 들였기에 비로소 얻을 수 있었던 노하우일지도 모르겠다. 고정관념은 발전을 자주 저해한다. 글에 관해 품은 이미지도 고정관념이 아닌가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