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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0월 말 극장가 소식과 분석

오랜만의 풍년, 한국영화 기근, 저물어가는 봉과 박, AI와 K-무비

by 영화평론가 홍수정
ㅇㅈ4.jpeg <어쩔수가 없다> 스틸컷

1. 오랜만의 풍년

최근 지인들로부터 "요즘 볼 영화가 많다"는 말을 자주 들어요. 그간 영화계 망했다는 소리만 듣다가, 오랜만에 접하는 기쁜 반응입니다.


일단 박찬욱의 <어쩔수가없다>(실제 반응은 갈렸지만)가 극장으로 시선을 모았고, 개봉 당시 주목받지 못하다가 입소문의 힘으로 50만에 육박한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가 있죠. 하반기 극장가를 휩쓴 일본 애니메이션 3콤보(귀멸의 칼날, 주술회전, 체인소 맨)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작품성으로 주목받은 <그저 사고였을 뿐>, <미러 넘버 3>, 의외의 선전을 보여주며 100만을 돌파한 연상호의 <얼굴>. 독립영화의 저력을 보여주며 일반 관객까지 사로잡은 <3학년 2학기>, <3670> 등도 한 몫을 했죠.


내일(22일)은 <우리들>, <우리집>을 연출한 윤가은 감독의 <세계의 주인>이 개봉하는데요, 이미 "굉장히 좋다"는 입소문을 타고 있어 열풍을 이어갈 것으로 보입니다. 넷플릭스 작품이지만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프랑켄슈타인>도 같은 날 선을 보이죠. 다음 달에는 한국영화 <지구를 지켜라>를 리메이크한 <부고니아>도 찾아오고요, 베니 샤프디의 <더 스매싱 머신>도 올해 개봉하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찾아온 풍년이니, 올가을 주말에는 부지런히 영화관을 찾으시길 추천합니다.



2. 돌아온 한국영화계 기근

하지만 지금 영화계를 찬찬히 살펴보면 안 좋은 시그널을 찾아볼 수 있는데요. 그건 이런 열기를 일으키는 작품이 대체로 "해외 영화"라는 것입니다. 물론 올해 가장 흥행한 영화는 (오늘 기준으로) <좀비딸>이죠(563만). 하지만 여전히 상영 중인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547만)과, <F1 더 무비>(521만)가 이 기록을 바짝 쫓고 있습니다.


또 객관적인 수치를 떠나, 한국 영화 대작은 기대에 못 미친 반면(<전지적 독자 시점>, <미키 17>, <어쩔수가없다>) 해외 작품들은 예상 외의 선전을 보여줬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F1 더 무비>와 일본 애니메이션은 흥행을 이끌었고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서브스턴스>, <콘클라베>를 이어 100만 이하 관객을 모으며 탄탄한 매니아층을 형성했는데, 같은 위상의 한국 영화는 찾아보기가 힘들어요.


반면 한국 영화 중에서는 <야당>, <히트맨2>, <보스> 등이 손익분기점을 넘기며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지만 비교적 휘발성 높은 상업영화의 카테고리에 몰려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이미 5년 전부터 전문가들이 경고해 온 것인데, 이제 본격적으로 현실화하고 있어요. 소위 말하는 "볼 만한 영화", 존재감 강한 영화의 자리는 해외 작품들이 차지하고, 한국 영화는 일시적으로 소비되는 오락 영화에 머무는 현상 말이죠. 한 마디로 한국 영화 중에서는 작품성과 상업성을 동시에 갖춘 대작이 나오지 않는 상태.


가장 큰 이유는 홍상수, 봉준호, 박찬욱 등 2000년대 전후를 이끈 한국영화계 거장을 이을 세대가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전히 주목할 만한 훌륭한 감독님들은 많은데요, 선배를 집어삼킬 정도로 새로운 돌풍을 일으키는 감독이 이미 나와야 했을 시기이건만 소식은 들려오지 않습니다. 물론 저는 거시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고요. 이런 말들이 여러 성취를 무시하고 누군가의 마음을 상하게 할 것을 알지만, 큰 시선에서 본 것을 이야기하는 일은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이런 현상은 심화할 것입니다. 홍상수 봉준호 박찬욱이 만개한 꽃이라면 튼실한 줄기나 봉우리는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능성을 보였던 감독들이 너무 일찍 거대 자본이나 OTT와 만나며, 자기 색을 잃은 채 표류해 버리고는 합니다. OTT는 한국 작품을 세계에 알리는 동시에, 한국 토양의 잡초를 제거하고 보기 좋은 식물로 균질화하는 제초제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독특한 빛깔로 자라날 수 있는 거목은 일찌감치 싹이 잘리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90년대 감독들이 허허벌판에서 작가로서의 청년기를 보낸 것은 일종의 축복입니다. 가능성이 충만한 신예들은 여전히 많은데요. 이들이 어떤 길을 걸어 나갈지, 이런 영화판에서 생존해 자기 세계를 펼칠 수 있을지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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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저물어가는 아버지 세대

올해 개봉작들을 보며 느낀 것은, '봉준호'와 '박찬욱'의 시대는 이제 저물어간다는 것입니다.

그건 이들의 작품이 이전보다 별로라는 의미와 달라요. 사회를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이, 그것을 연출해 내는 에너지가, 당대를 치열하게 살아가는 현역이라기보다 이미 자기 세계를 이룬 채 저 멀리서 내려다보는 거장의 그것처럼 느껴진다는 뜻입니다. 저는 영화에서 동시대성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지금, 여기서, 나의 이야기를 하는 작가의 생명력이 무엇보다 중요하죠. 그런 의미에서 봉과 박은 한창 뜨거운 여름을 지나 서늘하게 성숙해 가고 있습니다. 지금 한여름의 시기를 보내는 젊은 한국영화 감독은 누구일까요.


그렇다고 봉과 박의 다음 작품이 기대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이들은 이제 전략을 달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자기 청년기를 모방하지 말고 지금 그들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고백해야 하죠. 젊은 날의 봉준호와 박찬욱을 따라 하는 것은 도리어 그것의 불능을 드러내기 때문에 우습고 슬프기만 합니다. 새로운 이야기를 찾되 박찬욱은 강렬한 정념으로 밀어붙이던 야성을, 봉준호는 시대의 아픔을 통찰하던 날 선 시선을 되찾아야 합니다.


감각을 되살리되 이야기는 새로 찾는 것. 하지만 지금 이들은 반대로 가고 있습니다. 감각은 이전과 달리 푸근해졌는데, 이야기는 예전에 하던 신자유주의 비판을 디테일만 바꿔서 재탕하고 있죠.


그런 점에서 저는 <기생충>이 전 세계에서 호평받던 시기에 이 작품이 나태하다고 비판했고(https://brunch.co.kr/@comeandplay/274) 여기서 인지한 안 좋은 시그널은 <미키 17>에서 강화되었습니다. <미키 17>의 아쉬움은 <기생충>에서부터 이미 예고되었던 것이죠.


반면 박찬욱은 <헤어질 결심>을 보며 '제대로 가고 있구나' 하고 안심했는데, <어쩔수가없다>는 홍보 단계에서부터 불안함을 느꼈습니다. 이 영화는 다른 작품과 비교해 나쁘지 않지만, 그간 이어오던 색이 옅어졌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깁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더 길게 다시 쓸게요.



4. AI로 K-무비 살릴 수 있을까?

한국 영화만 생각하면 하소연을 늘어놓게 되는데요ㅋㅋㅋ흐엉엉 그래도 저를 진정시키는 것은 AI 영화인데요. 한국의 최초 AI 장편영화를 표방하는 <중간계>가 최근 개봉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최초의 AI 장편영화'라는 타이틀은 100% AI 제작 영화, 혹은 최소한 주인공을 AI로 연출한 작품에 붙이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중간계>의 경우 주연은 모두 실제 배우들이 맡았죠.


<중간계>를 아직 보지 않았지만, AI로 만든 캐릭터들이 생각보다 자연스러운데 영화는 아쉽다는 평이 많더라고요. 제가 인터뷰한 기사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는데요. AI영화는 역설적으로 시나리오가 중요해요. AI 효과를 구경하는 맛으로 2시간을 버티기는 지루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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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화제를 다시 꺼낸 이유는, AI가 망해가는 한국영화판을 살릴 기회가 되지 않을까 싶어서인데요. AI 영화로의 전환은 어느 순간 급격하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에이, 그런 게 가능할까 싶다가 어느 순간에 우리의 일상을 차지하겠죠. 그때 한국이 AI 영화의 기술과 노하우를 미리 갖추고 있으면, 전환의 시기에 휩쓸려 내려가지 않고 변화를 이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더구나 우리는 AI 영상화에 적합한 웹소설, 웹툰 IP를 풍부하게 보유하고 있어서 이들과 결합할 때 더 큰 시너지가 발생할 수 있어요. 넷플릭스에서 한국 작품들이 대대적인 성공을 이루면서, 우리는 그 성취에 취해 우리는 '유통' 분야를 완전히 잃어버린 채 '콘텐츠'라는 위로 내몰렸다는 점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누구도 넷플릭스와 경쟁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국내 방송사와 OTT의 쇠락을 고소하게 여기는 것 같기도 해요(물론 그 감정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저는 여전히 한국이 자체 OTT를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이 이야기도 다음에).


저는 넷플릭스와 같은 사태가 AI 분야에서 벌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아주 힘 있고 기술 좋은 AI 영화 기업이 국내에 들어와, 한국 IP 작품을 세계로 수출하며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고 있다"라고 평가받는 일 말이죠. 오해를 막자면 저는 '넷플릭스' 기업 자체는 좋아하고 높이 사고 있어요. 한국 콘텐츠 산업의 차원에서 볼 때 좀 다르게 평가할 뿐입니다.



5. "나만의 영화를 만들어주세요"

또 한 가지 생각. AI 영화는 기존의 상영, 배급의 시스템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 것 같아요. 영화의 제작비가 혁신적으로 낮아질 테니까 개인을 위해 영화를 만들고, 개인적으로 영화를 사고팔고, 개인이 소장할 수 있지 않을까요? 어디에도 없는, 나만을 위한 영화. 우리 집에 온 손님에게만 보여주는 영화. 제작비 문제가 해소된다면 가능한 일입니다. 그때 잘 만든 AI 영화는 미술품처럼 거래되고 소장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사적인 영화를 외주를 맡겨 만드는 일도 늘어나겠죠. 브래드 무비, 기업 안에서 상영할 영화, 우리 가족의 역사를 담은 영화 등. 분명한 건 '영화'라는 매체가 대단히 개인화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제 제작비를 회수하기 위해 대중을 상대로 상영할 필요가 없는 것이죠. 영화는 개인의 사적인 취향을 위해 제작되고 관람되는 매체가 될 것입니다. 새 기술은 상상력을 자극한다는 점만으로 즐거운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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