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기생충>은 봉준호의 예쁜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봉감독이 <기생충>에서 하고싶은 말을 그는 자신의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에서 이미 했다. 훨씬 신선하고 포장없는 방식으로. 그리고 <플란다스의 개>는 2000년에 태어났다. 무려 19년의 시간이 흘러 제자리로 돌아온 아티스트를 두고 평자로서 나는 무슨 말을 해야하나.
봉준호의 걸작?
영화를 극찬한 이들에게 묻고싶다. <기생충>이 정말 봉준호의 걸작인가?봉준호는 <기생충>을 통해 새로운 어디론가 나아갔나?
나는 봉준호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기생충>에서 흠칫하긴 했지만 나는 여전히 그를 지지한다. 그의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가 일상 속 작은 폭력을 잡아낸 뒤 이것을 한국사회 전체로 확장시킬 때, 나는 봉준호 특유의 세공술에 압도됐다. 3년 뒤 나온 <살인의 추억>은 그가 한 시대를 회상하는 시선이 얼마나 예리하며 감각적인지를 알게 했다. 다시 3년이 흘러 <괴물>이 나왔다. 그 좁고 더러운 매점에서 이루어지는 한심한 작당모의와, 목적지를 모를 정신없는 질주, 결국에는 피할 수 없는 상실까지. 그리고 봉준호는 <괴물>의 초대박 뒤에 무려 <마더>를 들고 나타났다. 이 영화는 국민엄마 김혜자의 얼굴에 불온하며 섹슈얼한 광기를 새겨넣었다. <플란다스의 개>부터 <마더>까지 봉의 성장은 눈부셨다. <설국열차>와 <옥자>가 나왔을 때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가 변했다 했지만 나는 여전히 봉을 지지했다. 거기에는 자신의 모든것을 건 질주와 그 끝에 마주치는 더러운 진실이 있었고, 그가 불분명한 시공간에 새겨넣은 창조적인 세계가 있었다.
그러나 <기생충>은 아무리 거듭보아도 내게 의문을 남긴다. 20년 전에 <플란다스의 개>를 찍고 <괴물>과 <마더>를 연이어 내놓던 감독이 2019년에 만든 것이 <기생충>이라고? 정말 이게 다인가.
물론 <기생충>은 재미있게 볼 만한 수작이고, 최근 나온 웬만한 영화들보다 훌륭하다. 그러나 이 영화가 거둔 성취의 많은 부분은 이미 봉준호가 과거에 이룩한 것들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며, 심지어 그 색깔은 희미해졌다.
게다가 내가 결정적으로 <기생충>에 실망한 이유는 봉준호의 태도가 바뀌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살인의 추억>과 <괴물>에서 엿보이던 날선 적대감이 없고, <마더>에서 드러나던 맹렬함이 없으며 <옥자>에서 느껴지던 호기심이 없다. 이런 태도를 두고 평자로서 나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2019년의 봉준호는 지금 나태해졌거나, 감이 떨어졌거나, 늙어버렸다고.
재활용, 희미해진
<플란다스의 개>에서 주인공은 회사와 집에서 내몰리며 옆집 개에게 화풀이를 하는데, 그의 모습은 결국 개와 동일시된다. 이건 봉준호가 가장 애용하는 연출방식이다. 그는 싸움판을 펼쳐놓고 관객과 함께 난장을 구경하다가, 그 경기장 속 피흘리는 선수가 곧 우리의 모습임을 자각하게 한다. 여기에 경제적 계급문제를 더하면 <기생충>이 나온다. 그러니까 주제의 디테일이 달라도 나는 <기생충>이 봉준호의 자기복제라고 느낀다.
<기생충>에서 추한 진실을 품은 어두운 지하실. 이것은 <플란다스의 개>에서 이미 등장했다. 또 홀로 지하실의 남자를 보는 '다송'이 캐릭터는 <살인의 추억>의 '백광호'와 닮았다. 그들은 진실의 유일한 목격자지만, 미쳤거나 아프다는 취급을 받고 종국에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악의 존재를 물리치고도 가족 구성원을 잃는 설정은 <괴물>과 동일하다. 기택(송강호) 가족이 사는 좁은 집도 봉 영화에 흔히 등장하는 공간(예를들어 <괴물>의 매점)이지만, 그 특유의 기이한 생명력은 약해졌다. (이 집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사실 감독이 자기 영화에서 주제나 설정을 반복하는 것이 나쁘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내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지점은 이것들이 예전의 예리함을 잃으며 반복되기 때문이다. 좋은 아티스트는 그 반복 사이에 시대와 시간의 흐름을 새기지만, 적어도 나는 <기생충>에서 그런 변화를 보지 못했다.
현실인식
또 하나 이상한 점은 <기생충>의 현실인식이 <살인의 추억>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플하다는 것이다. <살인의 추억> 속 80년대는 허술하고, 폭력적이고, 우스꽝스럽고, 불길하고, 오만하며 축축했다. 봉준호는 마치 얇은 반죽을 층층이 쌓은 페스츄리처럼 시대의 공기를 겹겹이 쌓아 <살인의 추억>을 완성했다.
그러나 <기생충>에서 묘사된 2019년 한국의 현실은, 아이들은 과외를 하고 어른들은 가정부와 기사를 한다는 설정은, 딱히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봉준호 특유의 예리함이 안보인다. 그건 여린 맨살로 직접 감각한 현실이라기보다, 마치 머릿속으로 상상해서 재구성한 현실같이 보인다. 그런 투박함이 못내 아쉽다.
친절해진 태도
<괴물>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강두(송강호)가 자기 딸의 영정사진 앞에서 대자로 뻗어서 자다가 바지춤 안에 손을 넣어 사타구니를 벅벅 긁는 장면이 나온다. 누구나, 특히 한국사람이라면 경악할 이 장면을 봉준호는 찰나의 유머로 활용한다. 봉준호 특유의 공격적인 도발성이랄까. 그래서인지 봉의 영화는 대체로 장면마다 밀도가 높은 느낌인데 <기생충>의 장면들은 대체로 밀도가 낮고 말랑말랑하다. 끝까지 가지 않고 적당한 선에서 머무는 느낌이 강하다.
<기생충>을 두고 "한국사람이 아니라면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언급을 한 것으로 알고있는데, 내가 볼 때 그건 오히려 <마더>나 <살인의 추억>에 적합한 말이다. <마더>에 그려지는 엄마라는 존재, 그 음침한 시골 동네는 한국에서 나고 자라지 않는 이상 절대 이해할 수 없다면, <기생충>에서 보이는 한국색은 외국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할 정도로 적당하다. 이순신장군의 학익진, 종북 개그, 짜파구리.. 봉준호의 유머가 이렇게나 친절한 적이 있었던가.
<기생충>이 외국에서 극찬받는 것도 이해못할 바는 아니다. 내 생각에 이것은 봉준호가 과거에 평가받지 못했던 성취를 뒤늦게 몰아서 인정받는 부분이 크다. 또 <기생충>은 여러모로 외국 관객이 사랑할 만하다. 언제부턴가 외국 영화제가 동양의 빈곤층 이미지에 매혹돼 있다는 인상도 있고, 봉준호도 여러모로 세련돼 지고 매끈해졌다.
애정의 철회
그러나 내가 봉준호를 단순히 좋아하는 것을 넘어 지지했던 것은 위의 이유들 때문은 아니었다. 그것은 봉준호만 가진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불경스럽고 발칙한 시선. 관객과 함께 노는 듯하면서도 끝내 화합하지 못하는 습성. 아닌 척 비꼬고 찌르는 버릇. 안주하지 않고 떠도는 기질. 다른 말로, 성장. 그러나 과연 <기생충>에 이것들이 있었나.
한 명의 아티스트를 지지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의 작품을 소비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예술에 대해 갖는 태도를 옹호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봉준호가 예의 맹렬함을 버린다면 나는 그의 작품을 여전히 재미있게 소비하겠지만, 더이상 그를 지지할 이유는 없다. 반대로 그가 자신의 태도를 지킨다면 나는 작품의 완성도를 넘어 봉준호라는 아티스트를 끝까지 지지할 것이다. 내가 <설국열차>나 <옥자>를 옹호했던 것도 이 작품들이 너무 훌륭해서가 아니라 봉준호라는 사람의 필모에서 여전히 의미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의 다음 작품은 좀 다른 의미에서 정말 기대가 된다. 한 명의 평자로서, 봉에 대한 나의 애정을 철회할 것인지는 다음 작품에서 결정이 날 것 같다. 보잘것없는 애정이지만 돌려받게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