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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홍수정 Apr 14. 2019

그의 새로운 걸작, <강변호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홍상수에 대한 말을 하기가 늘 어려웠으나 이 영화를 보고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언급하고픈 유혹을 참기가 힘들어졌다. <강변호텔>(2018)은 홍상수의 새로운 걸작이다. 도입부에 시작되는 홍상수의 나레이션부터, 이 영화는 줄곧 충격을 안겨준다. 완연한 충격이자 또 다른 진전이다.


<강변호텔>에 대해서 가장 많이 회자되는 것은 홍 감독이 처음으로 '죽음'을 언급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나,  내게 그 부분은 이상하게도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오히려 내가 영화를 보며 가장 놀랐던 것은 끊임없이 구획되어 등장하는 영화의 공간이다. 이 영화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강변호텔은 끊임없이 객실, 복도, 1층 카페, 눈 쌓인 공터, 인근의 식당으로 나뉘며 이 영화의 공간들을 구획 짓는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이토록 공간이 조각조각 나뉘었던 작품이 있었던가. 하지만 그 공간들은 완전히 분리되지 않은 채 서로 밀어내고 끌어당기며 영향을 주고받는다. 상희(김민희)와 연주(송선미)가 밖을 내다보며 아버지를 찾는 병수(유준상)에 대해 말할 때 창 밖의 풍경은 책 속의 이야기로, 스크린 안의 영화로 느껴진다. 또 카페 유리 밖의 영환(기주봉)이 카페 안 쪽의 아들을 건너다볼 때, 유리창 밖의 그곳은 죽음을 품은 이세계처럼 느껴진다. 영영 들어오지 못하리라 예상한 영환이 문을 열고 카페 안으로 들어올 때, 분명 분리된 것으로 느낀 두 세계가 하나의 공간으로 이어질 때에 스크린 위로 작은 충격이 던져진다. 적어도 내가 기억하기에 홍상수의 공간들은 어느 정도 열린 채로 서로 몽환적으로 이어지는 세계였다. 강변호텔처럼 칸칸이 분리된 채로 구획된 공간들을 꾸역꾸역 생산해내는 장소를 나는 그의 영화에서 본 적이 없다. '꾸역꾸역 생산되는 구획된 공간'. 이것이 내가 <강변호텔>에서 가장 강하게 받은 느낌이다. 그것은 건강한 생명력이라기보다 이상증식하는 병적인 출몰에 가깝다. 그러면서도 그 공간들은 서로 긴장을 주고받으며 하나의 뿌리를 공유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단단히 구별되는 공간들의 연결지점도 눈에 띈다. 꿈과 잠을 연결되는 장면은 예와 다름없이 자주 출몰하며, 메마른 나뭇잎은 상희 손의 흉터로 연결이 된다. 상희는 나무가 꾸는 꿈일까. 영환의 죽음은 상희와 연주의 흐느낌으로 연결이 된다. 그러나 이 연결점들은 어딘가 모르게 비틀어져 있고 어긋나있다. 상희가 식당에서 영환 쪽을 바라볼 때 그녀의 시선은 영환이 선 장소와 미묘하게 엇갈린다. 또 먼저 출발한 것 같았던 영환은 어느새 식당으로 돌아와서 상희의 곁에 앉아있는 것이다.

영화 안을 향하여 열렸다가 목표점을 상실한 채로 어디론가 사라지는 지점도 있다. 영환이 손에 인형을 들고 어두운 복도를 향해 걸어갈 때, 그는 어디로 사라지는 것일까. 그는 과연 자기가 원하는 곳에 도착할 수 있을까. 영환의 집에 있다는 고양이를 연상케하는 새로운 고양이가 호텔의 문 밖에서 나타난다. 그 고양이는 어딘가를 바라보다가 프레임 밖으로 사라져버린다. 인형을 든 영환, 그리고 그 고양이는 분명 영화 안 어디론가를 향하는 듯 하나 알 수 없는 구멍속으로 사라져버린다. 그러니까 구획되고, 다시 연결되고, 비틀어지고, 모호히 증발하는 공간들이 <강변호텔>을 휘감고 있다.



<강변호텔>에는 한 쌍을 이룬 사람들에 대한 홍상수의 관심도 드러난다. 경수(권해효)와 병수(유준상)는 같은 프레임에서 투 샷으로 자주 등장하고, 상희와 연주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대게 이성의 관계에서 실패하고서 동성과 붙어다닌다. 경수는 아내와 이혼했고 병수는 여자를 만나기를 힘들어한다. 상희는 유부남과의 연애를 끝냈고 연주도 순탄한 연애를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 간에도 차이를 보인다. 경수와 병수는 이름의 한자도, 뜻도 다르고 상희와 연주는 '사인'을 받는 것을 두고 의견차를 보인다.

이곳에서 쌍을 이루지 못한 사람은 영환 뿐이다. 그는 사랑과 아름다움을 자주 언급하지만, 홀로 강변호텔을 떠돌며 죽음과 직면한다. 그는 심지어 호텔의 사장과도 알 수 없는 이유로 사이가 틀어진 채 호텔을 떠날 생각을 한다. 그리고 사랑에 실패한 두 쌍의 동성커플이 그의 곁을 떠도는 것이다. 사랑을 긍정하는 한 명의 노인과 회의적인 두 쌍의 남녀.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것이 있다. 굳이 영환의 죽음을 언급하지 않아도 나는 <강변호텔>이 홍상수의 어느 영화보다도 강하게 죽음의 기운을 품고 있다고 느낀다. 그것은 주로 붕괴와 자포자기의 감각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틀어지고 비틀어지며, 또 불안하게 확장되며 <강변호텔>은 이 영화적 세계가 언젠가 붕괴되고 말리라는 사실을 직감케 한다. 그러면서도 이 영화는 붕괴의 순간을 굳이 피하려 하지 않는다. 정확하게는 새로운 탈출구에는 관심이 없어보인다. 하다못해 <그 후>에서 김민희의 얼굴을 비추던 감각적인 순간이나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 등장했던 곱게 죽으리라는 다짐이 이 영화에는 없다. 오직 해맑은 것인지 절망적인 것인지 알 수 없이, 죽음을 투명하게 응시하는 시선만이 영화가 끝난 자리를 지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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