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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홍수정 Mar 03. 2019

비극의 거리,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영화비평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내가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를 보며 가장 매료되었던 부분은 화려하게 치장한 앤 여왕(올리비아 콜맨)이 천천히 부서지는 과정이다. 물론 외설스러운 생각이다, 타인의 고통에 매료되다니. 그래도 나도 할 말은 있다. 비싼 인형처럼 치장한 앤 여왕. 관절인형처럼 조각조각 부서지는 신체. 괴이하며 유머러스한 파국의 진행. 당신에게 묻고 싶다. 정말 이 과정을 즐기지 않았다고? 영화를 잘 보았으나 그들의 고통을 즐기지 않았다는 말을 나는 믿지 않겠다. 혹은 이 영화는 그런 영화가 아니라는 말까지도. 왜냐면 이 영화에서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정확히 그런 욕망을 자극한다. 이쁜 인형을 손에 쥐고 놀다가 어느샌가 부숴버리고픈 욕망. 잔인하다고? 하지만 이런 욕망은 실재한다. 어린아이들은 솔직하다. 바비 인형이든 공룡 장난감이든, 그들은 애지중지 하던 무언가를 어느샌가 바닥에 쾅쾅 찧고 있다. 혼자만의 생각일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믿는다. 아름다움은 자주 폭력과 붙어먹는다. 사람들은 아름다움이 처참히 부서지는 광경을 구경고 싶어 한다. <더 페이버릿>은 이런 쾌감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그러나 <더 페이버릿>은 란티모스의 화려한 인형놀이에서 그치지 않는다. 언급하고 싶은 것이 많으나 여기서는 한 가지에 집중할 것이다. 바로 '비극의 거리'. 사실 이 영화의 비극은 거리감에서 온다. 이미 너무 가까운 앤 여왕과 사라(레이첼 와이즈)의 사이에 애비게일(엠마 스톤)이 끼어든다. 터질 듯 팽팽한 관계의 밀도. 높아진 밀도는 파국을 예비한다. 비극에 관한 한 <더 페이버릿>의 원칙은 명확하다. 가까워지면 비극이 온다는 것. 그리고 영화의 카메라는 거리에 따른 비극을 조금 색다르게 지켜본다.


찰리 채플린이 남긴 명언 하나가 떠오른다. 인생은 가까이에서는 비극, 멀리서는 희극. 동시에 이 말은 <시티 라이트>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찰리 채플린은 좋아하던 여자 앞에서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들켜버리고서 멋쩍게 웃는다. 클로즈업으로 잡힌 그의 얼굴에는 웃음 뒤에 가까스로 감춘 비극의 표정이 너울거린다. 클로즈업과 비극의 관계를 생각하게 하는 명장면이다.


<더 페이버릿>에서도 클로즈업이 등장한다. 다리가 아픈 앤 여왕이 의자에 앉아있고, 그 앞에서 사라가 다른 남자와 함께 춤을 춘다. 나만의 느낌일까. 다리를 들어올리고, 앉았다 일어서길 반복하는 춤의 동작들은 마치 다리의 건장함을 과시하는 것만 같다. 그때 카메라가 앤 여왕의 얼굴을 향하여 천천히 다가간다. 신체에 대한 동경 때문일까, 혹은 다른 남성에 대한 질투 때문일까. 그녀의 표정이 서서히 굳다 이내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며 심장이 철렁함을 느꼈다. (올리비아 콜맨은 이 장면 하나로 여우주연상을 휩쓸기에 충분하다.) 카메라가 가까워짐에 따라 앤의 비극은 점차 표면 위로 부상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영화의 카메라는 <더 페이버릿>의 비극을 몸소 체화한다고. 가까워지면 파국이 찾아온다는 규칙. 그것은 카메라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되고 있다. 그래서 마치 비극의 여신이 주인공을 찾아가듯, 인물들이 파국을 맞은 순간에 카메라는 그들의 얼굴 앞에 다가선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카메라는 비극의 위치에 서 있는 것이다.


빼놓을 수 없는 장면이 있다. 영화의 엔딩 장면. 애비게일에게 화가 난 여왕은 그녀에게 가까이 와서 다리를 주무르라고 한다. 두 사람은 엉겨붙은 채 서로의 몸을 뒤흔들고 있다. 그리고 카메라는 어느새 그들의 얼굴 앞에 바싹 다가다. 클로즈업으로 화면이 터질 듯하다. 다음 순간, 토끼가 화면을 가득 채운다. 현실이 붕괴하는 순간이다. 이것은 대체 무슨 결말인가.

여왕은 자식을 보낼 때마다 자신의 일부도 보냈다고 했다. 그녀는 자식이 떠난 자리에 토끼를 키운다. 토 여조각이다. 그런 토끼로 가득 찬 화면 파괴된 채 산산조각 앤 여왕을 떠올리게 한다. 모든 관계에서 실패하고 조각나버린 여왕. 완전한 파국. 이때 영  거리의 비극, 그리고 그것을 체화하는 카메라를 드러낸다.

 

엔딩과 함께 언급하고 싶은 장면이 있다. 애비게일은 여왕의 토끼를 몰래 발로 밟는다. 이때  영화는 애비게일의 발아래 눌린 토끼보여준다. 힘껏 누르는 발 터질 듯한 토끼의 몸. 이 장면은 목숨을 위협할 정도로 가까워진 여자들의 관계를 상기시킨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나는 애비게일의 발을 '카메라'로, 토끼를 '앤 여왕'으로 보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그렇게 해석할 때 이 장면은 근접한 카메라가 초래하는 비극을 생각하게 한다.

좁아지다 붕괴하는 관계. 클로즈업과 함께 붕괴하는 영화.


많은 사람들이 <더 페이버릿>을 두고 란티모스의 화려한 평작이라 칭하는 것 같다.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유폐된 공간, 유사부모의 관계, 부서지는 신체, 택일의 선택. 모두 그의 전작에 등장한 것들이 아닌가.

하지만 적어도 나는 그의 전작 중에서 '앤 여왕의 클로즈업'과 '엔딩 장면'을 대체할 장면을 떠올리기 힘들다. 인물들은 관계의 비극적 속성을 품은 카메라 앞에서 결국 붕괴하며, 카메라는 스스로 선 비극적 위치를 자각한다. 이 영화가 단순하게 파괴의 쾌감에 젖은 평작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다. 적어도 내게 <더 페이버릿>은 란티모스가 그의 작품 중에서 '거리의 비극'을 가장 깊이 탐구한 영화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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