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평
※ 씨네21에 기고한 글을 약간 수정하였습니다.
※ 결말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로마>에는 클레오(얄리트사 아파리시오)가 걷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그녀는 걷고 또 걷는다. 걸레질을 할 때, 아이들을 깨울 때, 조명을 끌 때에도 클레오는 사뿐사뿐 걸으며 집안 구석구석을 누빈다. 그녀가 잠시 바닥에 앉자 차를 내달라는 부탁이 떨어진다. 다시 몸을 일으켜서 계단을 내려가는 걸음이 스크린 위로 새겨진다. 그녀의 걸음은 늘 아주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으며 제 속도를 유지한다. 걸음뿐만 아니다. 설거지를 하거나 걸레질을 할 때에도, 그녀의 움직임은 돌출이나 막힘없이 부드럽게 이어지고 어딘가 세상사에 초연한 느낌도 풍긴다. 알폰소 쿠아론의 영화에서 이런 움직임은 낯설지 않다. <그래비티>(2013)에서 라이언(샌드라 불럭)이 우주선 안을 유영할 때나 <위대한 유산>(1998)의 에스텔라(기네스 팰트로)가 화폭 앞에서 포즈를 취할 때 보여주는 움직임들은 이상하게도 클레오와 겹쳐 보인다. 느리고 부드럽게 지속되는 초연한 움직임. 이것은 대개 너른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로마>에서 2층을 비출 때 특이하게도 방문이 모두 열려 있다. 그 덕에 우리는 방 안 깊숙이까지 들여다보이는 깊은 공간감을 배경으로 클레오를 보게 된다. 빨래가 가득 널린 옥상 혹은 클레오가 소피(다니엘라 데메사)를 구한 바다를 회상해보자. 그녀의 주변에는 자주 광활한 공간이 펼쳐져 있다. 마치 고래가 너른 바다에서 유유히 헤엄치듯, 클레오는 넓은 공간 위를 부드럽게 움직인다. 탁 트인 공간에서의 유려한 움직임. 알폰소 쿠아론은 자꾸만 애정을 듬뿍 담아 이런 운동을 주시한다. 거기에 특별한 이유나 어떤 당위성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다만 그런 공간, 그런 속도, 그런 움직임이 옳다고 알폰소 쿠아론은 굳게 믿는 것 같다.
이런 움직임을 이해하기 위해 그와 상반되는 운동을 지켜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안토니오가 좁은 길에 주차를 하는 장면은 시종 긴장되며 위태롭다. 이 장면의 긴장은 후에 소피아(마리나 데 타비라)가 엉망진창으로 주차하는 장면에서 반복된다. 차가 겨우 지나갈 좁은 공간과 기어이 비집고 들어가는 세단의 불편한 움직임. 이것은 앞서 설명한 클레오의 부드러운 움직임과는 상반된다. 아이들도 어른들처럼 차를 가지고 위태로운 장난을 친다. 두 아이는 장난감 차로 경주를 한다. 좁은 레일 위를 달리는 장난감의 거친 질주는 아이들의 싸움으로 번지고, 결국 유리가 깨지며 끝을 맺는다. 상대를 제압하려는 폭력적 움직임은 파국을 부른다. 클레오의 연인 페르민(호르헤 안토니오 게레로)은 사람들이 밀집한 장소에서 자주 등장한다. 극장은 관객으로 가득 차 있고, 그가 훈련을 받는 운동장에는 열을 맞춘 이들이 빼곡하다. 이곳은 클레오의 공간과는 달리 움직임이 자유롭지 않다. 페르민은 갑작스레 막대로 위협하거나 소리 지르는 행동을 자주 한다. 이것은 늘 돌출 없이 평온한 속도를 유지하는 클레오의 행동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그는 심지어 권총을 클레오에게 들이대고, 제자리에서 꼼짝하지 못하던 클레오의 양수가 터진다. 그리고 차로 꽉 막힌 도로 위에서 그녀는 고통스러워한다. 빽빽하게 밀집된 공간, 상대를 향해 돌출되는 행동들. 이것은 결국 죽음으로 이어진다. 클레오의 아이가 죽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그녀의 뒤에 고정되어 있다. 이때 한자리에 고정된 채 얼어붙은 카메라는 그 자체로 클레오의 슬픔을 체화하고 있는 것 같다. 카메라는 이 자리에 가만히 선 채로 클레오의 비극을 애도한다. 제한되고 정지되며 과격한 모든 것, 유려한 움직임과 대조되는 그 모든 것들이 <로마>에서는 부정적인 맥락으로 등장하는 것 같다.
그런데 그 유려한 움직임들은 어째서 알폰소 쿠아론의 영화에서 반복되는 것일까. 그 움직임이 어떠한 목적을 지니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나는 그 유려한 운동이 그 자체로 이미 목적이라는 느낌을 자주 받았다. 다만 그런 활동 끝에 등장하는 이미지에 대해 자세히 살펴볼 필요는 있는 것 같다. 허문영 평론가는 그의 글에서 “<그래비티>의 주된 운동 이미지는 막의 관통”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씨네21> 929호, ‘무중력의 카메라, 외설적 카메라’). 나는 ‘관통’이라는 표현에 주목하며, 그의 말을 조금 비틀어서 알폰소 쿠아론을 언급하고 싶다. 그의 영화에서는 다른 세계로 ‘건너가는’ 활동이 중요하다. <그래비티>에서 대기권을 뚫고 지구로 복귀하는 우주선의 운동은 말할 것도 없다. <칠드런 오브 맨>(2006)은 집과 집 사이를 건너가며 새로운 세계를 찾는 영화다. <소공녀>(1995)는 원작 동화를 영화화한 소품 정도로 보이지만 주인공 사라(리젤 매슈스)가 비를 흠씬 맞으며 옆집으로 건너가는 장면만은 인상적이다. 알폰소 쿠아론의 인물들은 자주 온 힘을 다해 지금 이곳이 아닌 다른 어딘가를 향한다. 그의 영화 엔딩에 유독 바다와 물이 자주 등장한다는 질문에 그는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며 어떠한 메타포도 아니라는 취지로 대답한 바 있다. 나는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래비티>와 <칠드런 오브 맨>의 엔딩에 등장하는 바다, 그리고 <위대한 유산>에서 핀(에단 호크)이 뉴욕에 도착할 때나 <소공녀>에서 사라가 아빠와 재회할 때 내리는 비는 모두 ‘물’의 성질 그 자체로 존재한다. 그것은 다른 의미를 내포하지 않으며, 오로지 세계를 구별 짓는 이질적인 물성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외국어와 마찬가지다. 이때 외국어는 이질적인 언어의 장막으로서 존재하며, 그 말의 의미는 중요하지 않다. 의미를 모를 중국어를 듣고 삶의 의지를 다지는 라이언처럼(<그래비티>), 뜻 모를 말을 내뱉으며 임신부를 살리는 노파처럼(<칠드런 오브 맨>) 언어적 장벽을 무심히 건너서 전달되는 감정의 파동이 중요한 것이다. 이제 <로마>를 다시 생각해보자. 클레오는 소피아 가족과 달리 미스텍어(멕시코의 아메리칸 인디언 언어)를 쓰며 보모 신분이다. 바다에 빠진 소피를 구하러 갈 때에 클레오는 안간힘을 쓰며 바닷물을 헤친다. 이질적인 언어, 신분, 물질이 그녀와 가족 사이에 버티고 있다. 그러나 클레오는 헤엄치지 않고 예전과 다름없이 천천히 걸어서 소피에게 도달한다. 그리고 해변으로 돌아온 클레오는 자신의 이야기를 토해낸다. “그 애를 원치 않았어요.” 우리는 이 말의 의미를 모두 이해할 수 없으며 그런 작업은 필요하지도 않을 것이다. 울먹이는 고백과 이어지는 포옹 그녀와 가족 사이를 관통하고 있음을 우리는 느낄 수 있다. 그 눈부신 해변에서 클레오는 여러 층위의 장벽을 천천히 넘어서 이들 가족의 세계와 만난다. 부드럽게 지속되는 활동, 이질적인 세계의 장막, 마침내 다른 세계로 건너가는 유려한 움직임. <로마>는 그 일련의 과정을 펼쳐서 우리에게 보여준다.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집으로 귀환하는 차 안에서 ‘사랑한다’는 나지막한 고백이 이어진다. 부드럽게 전진하는 운동과 고백. 해변에서 클레오가 보여준 활동이 이 장면에서 다시 한번 반복되고 있다.
<로마>는 자주 사실주의 영화라고 언급되어왔다. 그 말에 동의하면서도 나는 이 영화가 품은 모종의 비현실성을 강조하고 싶다. 내가 느끼기에 그 비현실성은 영화가 응시하는 초연한 움직임에서 오는 것 같다. 클레오의 느린 걸음은 현실에서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크린에 당당히 버티고 지속되는 저 유려한 움직임만은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라게 된다. 내게 <로마>는 그것으로 충분한 영화다.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92119
이번 원고는 유독 힘겨웠던 기억이 납니다. 이 영화에 언어로 접근하는 일이 그만큼 어려웠기 때문이죠. <로마>가 보여주는 그 속도, 그 질감, 그 움직임을 따로 지칭하는 용어는 세상에 없기에, 이것을 언어로 표현하는 일이 막막하게 느껴졌습니다. 어쩔 수 없이 영화에 대한 독자들의 기억을 믿으며 글을 썼습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제가 느낀 막막함과 난감함이 이 작품의 성취를 반증하는 것 같습니다. 언어로 접근할 수 없는 영화만의 영역을 <로마>는 만들어낸 것이겠죠.
이 글에서는 "부드러운 유영"과 "안간힘을 써서 세계의 장막을 건너가는 활동"에 주목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알폰소 쿠아론의 영화에서 자주 포착되는 운동입니다. 우주 안에서 부드럽게 유영하다가 대기권을 건너서 지구로 가거나(<그래비티>), 첫사랑과 빙글빙글 춤을 추던 시골의 아이가 마침내 뉴욕으로 건너가는(<위대한 유산>) 것처럼 말이죠.
그리고 이런 활동들은 태아의 탄생을 상기시킵니다. 양수 안에서 노닐던 태아가 출산의 고통 끝에 힘겹게 모체를 관통하여 세상 밖으로 나오는, 그 일련의 활동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알폰소 쿠아론의 영화 세계가 원형적으로 품는 테마는 "태아의 탄생"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그의 영화 곳곳에서 이와 관련된 이미지가 보입니다. <그래비티>에서 라이언(산드라 블록)은 우주선 안에서 태아와 같은 모습으로 웅크리고 자고 있죠. <칠드런 오브 맨>에서 흑인 임산부가 등장하는 장면을 보면, 알폰소 쿠아론이 산모의 배가 지닌 둥근 형태를 얼마나 신성하게 생각하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의 영화에서 '원'은 대체로 신성한 형상에 가깝게 등장합니다.
출산과 탄생은 역사상 무수히 반복되어 온 주제죠. 그럼에도 그것이 알폰소 쿠아론이라는 거장과 만나, 그의 영화 곳곳에서 은밀하게 뿜어져 나오는 것을 목격하는 것은 참으로 즐거운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개인적인 감상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영화를 볼 때에는 오히려 잘 느끼지 못했던 것 같아요. 클레오가 바다를 건너던 장면의 감상을요. 그런데 꽤 시간이 지난 요즘 그 장면이 문득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새로운 길을 찾을 때, 그 길의 막막함을 생각할 때 저는 어쩐지 그 장면을 떠올립니다.
아이를 찾는 목소리, 찰박찰박 바다를 헤치는 소리, 바다 가운데서 만난 세 사람. 평범한 여인 클레오가 바다를 건너서 아이에게 가는 그 느린 리듬은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위안을 건넵니다. 그리고 내게 주어진 장벽도 깨거나 부수지 않고, 그저 물을 건너듯 부드럽게 관통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죠. 여느 명작이 그렇듯 <로마>도 관객의 기억에 박힌 채로 계속해서 새로운 감상을 남기는 영화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