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형철 문학평론가, 박찬욱 감독의 대담이 화제여서 보았는데, 과연 배울점이 많은 수준높은 대담이었다. <올드보이>를 탁월하게 비평한 바 있는 신형철다웠고, 그와 대화하는 박찬욱은 편안해보였다.
이번 대담에서도 '개연성 논란'이 언급되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주인공 만수(이병헌)가 납득되지 않는다는 관객들의 반응이다. 실직을 했다는 이유로 경쟁자들을 제거하며 극단적으로 행동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이런 반응은 <어쩔수가없다>의 흥행 부진에 한 몫을 했다.
신형철과 박찬욱의 이야기를 여기 다 옮기지는 않겠다. 오해의 소지가 생길 수 있으니. 다만 신형철은 최근 주인공에 공감하기 바라는 경향이 강해졌다고 했고, 박찬욱은 자기 영화 주인공을 관객들처럼 마냥 착하고 반듯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언급했다.
뇌피셜을 가미해서 투박하게 요약하자면, 요즘 관객들이 주인공에 과하게 공감하고 개연성을 바라는 경향이 있는데, 거리를 두고 감상하며 이해해주길 바란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나는 박찬욱이 여전히 논란의 핵심을 보지 못한다고 느낀다. 이번 개연성 논란의 핵심은 '관객들이 만수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대수도, 금자씨도, 서래도 공감했던 관객이) '유독 만수만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실 박찬욱의 작품은 대체로 개연성이 부족하다. 길가는 남자를 납치해서 15년 동안 가둬두고 만두만 먹이는 것도(<올드보이>), 한 명의 남자에게 복수하기 위해 장대한 계획을 실행하는 것도(<친절한 금자씨>) 모두 너무 극단적이다. 만수처럼. 그런데 어째서 <어쩔수가없다>에 이르러 관객은 갑자기 개연성을 찾았을까?
나는 그것이 '감정'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박찬욱의 영화는 늘 인지적 설득력(저 사람 행동은 이치에 맞아)은 부족했으나, 정서적 설득력(저 사람 감정에 공감돼)은 강렬했다. 그는 논리가 아니라, 화마처럼 모든 것을 삼키는 뜨거운 정념으로 관객을 설득했다. 우리는 서래(<헤어질 결심>)의 논리가 아니라, 그녀의 사랑에 공감하기 때문에 극단적인 결말도 받아들인 것이다.
<어쩔수가없다>가 실패한 지점은 바로 여기다. 이 영화는 벼랑에 내몰린 만수의 감정을 다각도로 설득하지 못한 채, 실직하였고 집도 팔게 생겼다고 강조한다. 그러니 관객도 정서적 설득을 내려놓고, 인지적 설득에 집중한다. 그런데 하필 부동산과 노동은 대한민국 사람들이 가장 현실적으로 판단하는 부분이다. 그러니 결과는 설득 실패. 많은 이들이 "저렇게 행동할 정도의 상황은 아닌데?"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만수의 '남성으로서의 위기'가 부각되지 않은 점이 의아했다. 박찬욱의 필모를 고려하면 그 방향으로 가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내 미리(손예진)와의 관계, 첫째 아들과의 관계에서 더 큰 균열과 불화가 보일 법한데, 영화에는 이런 점이 부족하다. 각본집에는 관련 내용이 더 풍성히 다뤄진다고 들었다. 아마도 영화에서 편집되었으리라 추측한다. 만약 이런 부분이 충분히 다뤄졌다면, 그래서 남자로서의 절박함이 드러났다면 개연성 논란 따위 없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신형철 평론가는 이 영화가 남성성을 다룬다는 점을 읽었다고 했고, 나는 그것을 의도한 것 같은데 너무 약했다는 입장이고, 어떤 관객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작품 독해에 익숙한 평론가와 달리, 관객은 해당 부분을 놓친 경우도 많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어쩔수가없다> 개연성 논란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박찬욱이 (이전 작품과 다르게) 만수를 관객에게 정서적으로 설득하는 데 부족했다는 점이다. 작품으로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뭐, 정서적으로 공감이 안 되는 영화도 있지. 다만 (홍보 초기에 언급한 것처럼) 천만을 노릴 정도로 큰 흥행을 바랐다면, 반드시 염두에 두었어야 할 부분이다.
이것을 '주인공에게 과몰입하는 관객', 혹은 '논리적으로 설득되어야 만족하는 관객'의 문제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그건 관객의 반응을 오독하는 일이다. 그렇게 이해한다면 관객 욕을 하면서도, 다음 작품에서 개연성을 높이려고 할 테니까. 이건 잘못된 디렉션이다. 관객들은 박찬욱의 작품에서 논리를 요구한 바 없다. 다만 <어쩔수가없다>에서 느껴지는 정서적 위화감과 설득력 부족이 '개연성'이라는 언어로 표출되었을 뿐이다.
<어쩔수가없다>는 마지막 편집만 조금 달랐어도 관객 반응이 아예 달랐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유독 안타까움이 크다. 하지만 이런 과정 모두가 영화인 것을 어떻게 하겠나. 그런 점에서 박찬욱은 관객의 반응을 이해하고, 다음 작품에서 휘몰아치는 정념으로 다시 돌아올 필요가 있다. 그건 박찬욱이 가장 잘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