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괴의 이유를 작품에서 찾지 마
연말이 되니 드디어 한국영화가 망해간다는 이야기가 진지하게 나오기 시작한다. 이전까지 "아니, 올해는 일본 애니가 1위네?" 같이 짧은 논의가 나왔다면, 이제 영화판을 종합 진단할 시기가 온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아직도 "좋은 영화를 더 많이 만들자" 수준의 논의를 못 벗어나고 있다. 미안하지만, 나는 여기 동의하지 않는다. 2010년대에 한국영화가 천만 관객을 줄줄이 소환하던 시기에도, 솔직히 극장까지 봐야 하는 영화는 거의 없었다. 물론 보석 같은 작품도 있었다. 하지만 산업의 차원에서 거시적으로 보았을 때 한국영화의 수준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러니 지금의 위기는 창작자들의 나태 때문이 아니다. 이전에도 부족한 작품은 많았고, 지금도 뛰어난 작품은 충분하다.
그럼 대체 뭐가 문제인가? 최근 영화계의 위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1. 극장의 위기 2. 한국영화(작품)의 위기
여기까지는 대체로 공감하지만, 정확한 이유를 짚는 사람이 잘 없다. 어떤 이들은 이유를 모르고, 어떤 이들은 잘 알지만 너무 암담해서 차마 입밖에 꺼내지 못한다. 이제는 솔직한 이야기를 해보자.
극장이 지금과 같이 '집단 관람' 형태로 굳어진 데는 '수익'이 영향을 미쳤다. 초기 에디슨이 발명한 키네토스코프는 혼자서 구멍을 들여다보며 20~30초짜리 짧은 영상을 구경하는 형태였다. 그러다 지금처럼 여러 명이 한 공간에 모여, 2시간짜리 긴 영화를 보는 형태로 굳어진 것은, 이러한 방식이 더 큰 수익을 올리는 데 유리했기 때문이다. 한 번에 여러 명에게, 더 비싼 관람비를 받을 수 있으니까. 이런 방식이 고착되고 걸작들이 나오자 '극장' 자체가 낭만화되기 시작한다. 꿈의 공간. 영화를 보는 바람직한 방식.
그러다 넷플릭스가 등장한 것이다. 온라인 영화관. 모든 오프라인 공간과 활동이 온라인으로 옮겨간 것처럼. 이건 특별한 발명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넷플릭스가 아니라도, 분명 누군가는 영화를 온라인으로 유통하는 방식을 고안해 냈을 것이다.
OTT가 등장하자 극장은 낭만 뒤에 가려졌던 단점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기 시작한다. 생각해 보면 영화관이라는 공간은 적잖이 비효율적이다. 거기까지 가야 하고, 극장에서 정해준 시간에 봐야 하며, 두 시간 동안 일어서지 못하고, 옆관객에게 방해를 받을 수도 있고, 영화가 끝나면 다시 집까지 돌아와야 한다. 노약자에게는 이 모든 과정은 쉽지 않아서, 영화를 보는 것조차 결심이 필요하다. 연극 같은 경우 배우가 거기 있으니까 공연장에 가는 것인데. 실연자가 없는 '콘텐츠'를 이런 방식으로 봐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거기에만 영화가 있으니까. 다시 말해 극장 시스템이 영화 콘텐츠를 독점해 왔기 때문이다(오해는 말아주었으면. 극장 관람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단점도 충분히 있다는 것).
그러므로 OTT의 등장과 함께 독점이 깨어지며 시작된 극장의 하락세는 자연스럽고, 막을 수도 없다. 넷플릭스와 디즈니+가 망하지 않는 한 극장은 이전의 호항기로 돌아갈 수 없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긍정적인 변화라 생각한다. 이 말로 "평론가 맞냐"라는 욕을 먹겠지만, 내게는 이것이 진실이다. 하나의 매체가 콘텐츠를 독점하는 것은, 아무리 극장을 낭만적으로 표현한다 하더라도, 마땅하지 않다. 집에서 편하게 누워서, 중간중간 끊어가며 뒤로 돌려가며, 거의 공짜에 가까운 비용으로 영화를 보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불필요한 모함은 그만했으면 한다. OTT로 영화를 보는 관객은 나태하지 않다.
그래서 영화를 아무리 잘 만들어도 극장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건 오프라인 미팅이 매우 훌륭하면 줌 미팅이 사라진다는 것과 마찬가지 논리다. 나는 이것을 많은 이들이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 하지만 냉정히 생각해 보자. <좀비딸>은 가장 잘 만들어져서 올해 한국영화 관객수 1위를 찍었나?
지금 극장의 위기는, 영화관이라는 공간 자체를 새롭게 인지하고 디자인하지 않으면 타개할 수 없다. 변신에 성공해 생존한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축소는 감수해야 한다. 이전의 극장은 이미 종말을 맞았다.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이야기는 바로 이 지점이다. 그런데 여전히 영화 탓을 하고 있으니, 도리어 효과적인 논의가 안 되고 있다.
다만 영화 탓을 하는 이유는 알 것 같다. 그래야 희망이 생기니까. 더 좋은 영화를 만드는 것이, 넷플릭스를 뛰어넘는 것보다 쉬우니까. 하지만 잘못된 진단은 병을 키울 뿐이다.
또 한 가지 의문.
극장이 하락세인 와중에 도대체 왜 한국영화는 유독 고전하는 것일까? 그건 여태 한국영화가 극장 시스템에 더 많이 의존해 왔다는 방증이다. 달리 말하자면, OTT가 없던 시절부터 OTT에 어울리는 작품을 찍어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쌍천만 영화인 <신과 함께> 시리즈는 심플한 서사와 화려한 VFX로 넷플릭스에 더없이 어울리는 작품이다. 이걸 부정적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는 것이, 오히려 OTT 시대에 맞는 기량을 갖추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한국영화의 생존법은 극장과는 달리해야 한다. 극장과 OTT라는 두 가지 갈림길에서, 내게 어울리는 쪽을 파악해 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 요즘의 까다로운 관객에게 어울리는 극장용 작품인가, 보다 관대한 OTT 시청자에게 잘 소비될 콘텐츠인가. 그 사이 어딘가에서 그럭저럭 잘 만들어진 웰메이드 영화는 이전보다 훨씬 큰 타격을 입게 된다.
하지만 이조차 단기적인 전략. 장기적으로 OTT가 더 성장하며, 넷플릭스에서 선택받은 작품, 그리고 남아있는 극장가에서 성공한 작품으로 양분화될 것이다. 중규모, 보편적인 영화의 붕괴. 이를 막기 위해 한국만의 OTT를 기업과 국가가 손잡고 본격적으로 키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넷플릭스 같이 전방위적인 초대형 플랫폼이 아니라 일부 장르에 국한된 형태라도. 예를 들어 애니 전문 OTT인 라프텔처럼.
지금 극장의 위기에 '코로나'가 영향을 미쳤다고 하는데, 나는 코로나 이전부터, 넷플릭스의 등장으로 극장은 이미 끝났다고 영화계 사람들에게 말했다. 하지만 대체로 '저 어마어마한 극장이 설마 넷플릭스 따위 때문에 망할까' 하는 반응이었다.
나는 2년 전에도 기고에서 같은 말을 했다(https://www.pd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75143). 극장의 시대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관객들의 상당수는 영화관에 새로이 실망한 것이 아니"라 "기술의 미비로 어쩔 수 없이 영화관을 찾았다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2~3년 이내에 한국 영화계가 위기라는 말조차 쓰지 않을 것"이라고. 이제 그 경고가 현실화된 시점에서도, 여전히 좋은 영화의 힘으로 극장을 살릴 수 있다는 나이브한 목소리가 한국영화계를 떠돌고 있다. 그건 따듯하게 틀린 말이다.
얘기하려면 끝도 없지만, 이 글에서 강조하고자 한 것은 두 가지다. 극장의 시대는 이미 저물었고, 이걸 '좋은 영화'나 '감독의 노력'으로 막을 수 없다. 하지만 괜찮다. 변화를 서럽게만 볼 필요는 없으며, 극장의 변신과 OTT 시대에 맞는 전략으로 무장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이어지는 글에서 마저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