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혼 선언에서 보이는 것들

by 영화평론가 홍수정


최근 들어 졸혼 선언이 늘어나고 있다. 그 의미를 살펴보니 대강 "혼인 관계는 유지하지만, 각자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것" 정도로 파악된다. 이 선언에 동참하는 이들의 나이대는 대개 중장년 층이다. 이에 대해서는 "나쁘지 않다"는 반응도 있고, "이혼이면 이혼이지 무슨 졸혼이냐."목소리도 있다.


재밌는 것은 졸업에나 붙을 법한 '졸(卒)'자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물론 일본에서 처음 생성된 말이지만 한국에서도 적극 받아들여지는 것으로 보아 우리가 이 단어를 능동적으로 사용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좋으리라. '혼인'이라는 단어가 분리를 나타내는 '이(離)' 대신 '졸(卒)'과 결합한 것은, 우리 사회가 결혼을 학교처럼 인생에서 거쳐야 할 하나의 관문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스스로 선택한 계약에는 '철회'가, 다 같이 입학한 학교에는 '졸업'이 어울리는 법이다.


반대로 생각한다면 한국 사회에서 '이혼'이나 '별거'가 지나치게 편협한 의미만을 수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흔히 파탄, 혹은 실패라는 단어와 잘 융화하는 이 단어들은 일단 부정적인 느낌이 너무 강하다. 결혼 생활을 끝내고 싶지만 '이혼남', '이혼녀'는 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누군가가 "나 결혼 생활 할 만큼 해봤고, 이제 자유롭게 살고 싶어서 이혼해."라고 말한다면 그가 어떤 취급을 받을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우린 '이혼'이란 개념에 불필요한 감정들을 너무 많이 버무려 놓았다. 이 글을 읽는 상당수는 나는 안 했다고 항변하고 싶겠지만, 사회는 얄궂게도 자주 연대책임을 묻는 법이다.


졸혼의 골자는 혼인 '생활'은 싫으나, '소속'은 놓고 싶지 않다는 데 있다. 소속은 한국에서 결혼이 주는 가장 큰 의미 중 하나다. 이것은 모두에게 필요한 것으로 쉽게 받아들여진다. 이것이 '이혼'이 불경스럽게 받아들여지는 동시에, '비혼'이라는 간단한 개념이 한국에서 쉽게 정립되지 않는 이유다. 한국 사회가 얼마나 소속을 중시하는지는, 졸혼과 정반대의 개념인 '동거'에 대한 거부감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소속을 주지도 못하면서 실질적인 생활을 요구하는 생활 형태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단체와 소속감 중심의 결혼 문화. 이것이 신조어의 갈라진 틈에서 엿보인다.


결국 어느 날 갑자기 한국에 등장한 '졸혼'이란 단어는, 결혼의 공동체 생활에서 벗어나면서도 이혼의 불경스러움을 피하고자 하는 고민에서 탄생하였다. 양 극단 어디에도 속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그 중간 지대에서 생소한 혼종 하나를 들고 나타났다. 그러니 '졸'이라는 짧은 단어 하나가 품은 사회상이란 얼마나 광대한 것인지.


미식평론가 황교익이 마늘과 달래에 관한 흥미로운 주장을 하는 것을 들은 바 있다. 그의 말의 요지는, 건국 신화 중 곰이 마늘과 쑥을 먹고 사람이 되었다는 얘기 중 '마늘'은 '달래'로 수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달래와 쑥은 봄나물을 대표하는 식물로서, 춘궁기에 조상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뜯어먹으며 버텼던 매운 식물이기에, 이것을 100일이나 먹으라는 것은 인내를 지시하게 된다. 마늘이냐 달래냐는 가벼운 선택 뒤에는 그 옛날 어느 때의 사회상이 담겨 있으니, 언어를 이해한다는 것은 한 사회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조선은 고사하고 동시대를 보는 것조차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가. 그런 와중에 하나의 단어가 우리 앞에 왔다. 더구나 신조어 생성에 상대적으로 둔감한 중장년층에서 나타난 신조어의 무게는 가볍지 않다. 그래서 결국 결혼 제도가 뭐 어떻다거나 어떻게 바꾸자는 거창한 말을 하고 싶은 건 아니다. 그저 어느 날 갑자기 날아든 단어 하나에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의 결혼 문화가 투명히 비추어 보이는 신기한 조화를 함께 느껴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