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확행'에 대한 생각

by 영화평론가 홍수정

슬픈 것은 벌써 몇 년째 서민의 작은 삶을 위로하는 신조어들이 쏟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서민'이라는 건조한 말로는 부족한 것 같다. 우리는 계속해서 타인의 삐까번쩍한 삶에 치이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그런 우리는 감싸 안을 따듯한 단어들을 찾아낸다. 최근의 유행어는 단연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다.


그런데 그 단어들의 생로병사를 지켜보자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우리를 단단하게 긍정하는 용어들은 거의 탄생과 동시에 바로 마케팅의 수레에 빨려 들어간다. 예전에는 '미생(아직 다 성장하지 못한 직장인을 가리키는 단어로 동명의 웹툰에서 파생됨)'이라는 단어가 그랬다. 미생을 위한 핫한 세일! 미생을 위한 가성비 짱짱 여행 패키지! 그리고 이제는 그 자리를 '소확행'이 대신한다. 단 돈 몇 만 원으로 소확행을 잡자! 오늘은 나만을 위한 사치를~ 이런 게 바로 소확행!


그러니까 우리가 작은 삶을 응시하고 긍정하기 위하여 찾아낸 단어들은 역설적으로 기업들의 상품을 팔아주는 치어리더의 역할을 떠안은 채, 다시 우리의 호주머니를 털어가는 셈이다. 물론 이런 경향이 단어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가 삶을 위로하는 방식은 대개 소비문화로 굳어져있고, 마케팅은 그런 틈새를 귀신같이 찾아내니까. 이해는 하지만 어딘가 착잡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것 같다. 삶의 위로와 연대를 바라는 마음으로 어떤 말을 찾아냈을 때, 그 말이 순수성을 지키며 우리 곁에 남아있을 수는 없는 걸까. 단어는 심지어 연예인들과 달리 광고에서 이용되며 돈을 받지도, 제 이미지에 맞지 않는다며 광고를 거부하지도 못한다. 그런 단어의 처지가 안쓰러운 것은 내가 용어의 운명을 필요 이상으로 생각하는 것일까.


요즘의 마케팅 트렌드를 보자면 '소확행 상품'을 사지 않으면 소소한 행복마저 얻을 수 없을 것 같은 착각이 들 지경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소확행'의 방점은 '소소하다'가 아니라 '확실하다'에 있는 것 같다. 미래에 있을 성공이나 거창한 포부가 아니라 당장 나의 피부에 와 닿는 행복들. '소확행'이 처음 등장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랑겔한스섬의 오후>에 나오듯 갓 구운 빵을 찢는 순간이나, 혹은 친구와의 수다라거나, 좋아하는 장소의 풍경 같은 것들 말이다. 이것이 행복이라고 누군가 학습시키지 않아도 당장 나의 감각에 와 닿는 즐거움. 그것들의 리스트를 늘리는 것이 '소확행'의 원뜻에 가깝지 않을까. 원뜻이 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그게 맞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까 요컨대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작은 단어들('미생'이나 '소확행')과 마케팅에서 쓰이는 용어들은, 발음은 같지만 사실은 다른 단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위안의 단어들을 데려다 교묘하게 뜻을 바꾸어 도리어 우리를 압박해와도, 동음이의어를 분리할 줄 알아야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소확행이란 돈으로 해결되는 것이고, 종국에는 '소소한 행복' 따위는 없다고 생각하게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것이 탄생 의도와 상관없이 이리저리 불려 다니는 가련한 단어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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