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제목을 보면 '아 홍수정이 잡지사에 자기 글 실어달라고 먼저 원고 보내면서 나대다가 까였구나' 하겠지만, 아니다. 놀랍게도 잡지사에서 먼저 청탁이 왔던 썰이라 풀어보려고 한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인데, 한 잡지사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
그 잡지는 세계적으로 유명해서 한 번 들으면 대부분 알 만한 곳이었는데, 한국판이 나온다며 영화에 관한 글을 청탁해 왔다. 편의상 A사라고 하겠다. 미심쩍어 인터넷으로도 검색을 해봤는데 A사의 말은 사실이었다.
A사에서는 특이하게도, 첫 연락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연락을 대표가 직접 해왔다. 보통 원고 청탁은 대표가 아니라 담당자 선에서 이뤄진다. 그 대표(편의상 B라고 부르겠다)는 이러저러한 매거진을 론칭할 것이라며 직접 설명을 해줬고, 나는 이 부분을 매우 고무적으로 받아들였다. 대표가 직접 커뮤니케이션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필진에 대한 리스펙이 있는 것이라고 받아들였으니까.
물론 종종 전화를 저녁 늦은 시간에 걸어와서 좀 무례하다 싶어 쎄한 느낌은 있었지만, 당시에는 그저 워낙 바빠서 그러나 보다 했다. (비즈니스나 연애나 쎄하다 싶으면 일단 정지하고 점검해야 되는 게 국룰)
B는 통화 중에 자신의 아름다운 꿈과 포부를 한참 얘기했다. 자신이 과거 영화계에도 잠깐 있었고, 블라블라했다며, 대충 자기가 예술을 매우 사랑하는데 이번 매거진도 잘 만들어 보겠다는 취지였다. 나는 '오오 이런 순수하고 열정이 가득한 사람이 있나' 하고 살짝 감동도 먹었다.
그리고 필진인 내 입장에서 가장 솔깃한 얘기는 이거였다.
원고를 이번 한 번만 청탁하는 게 아니라 지속적으로 청탁하고 싶다는. 한 마디로 영화 코너를 맡기고 싶다는 얘기였다. 개이득.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원고료를 얼마나 생각하냐고 묻길래, 정해놓은 기준대로 알아서 달라고 했더니, 잘해줄 수 있다는 말을 먼저 했다. 고료를 부르는 대로 많이 줄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고료는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고, 일단 앞으로 1~2주에 한 번씩 꾸준히 원고를 보내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원고 쓰기에 돌입했다.
원고를 쓰기 전에는 늘 B와 상의해서, 이런 영화에 대해 쓰겠다고 말하고 보냈다. 한 마디로 그는 내가 원고를 쓰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뜻이다.
B는 이제 막 매거진을 시작하는 입장이라 원고가 넉넉하게 필요하다며, 글을 많이 달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이례적으로 한 편에 대한 고료를 채 받기도 전에, 세 편의 글을 보내게 됐다.
A사는 글의 분량을 늘려달라, 이런저런 내용도 넣어달라는 등 수정 요구가 많은 편이었다. 모두 맞춰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또 하나 쎄한 포인트가, B는 수정 요구를 할 때면 자꾸만 "직원들이 이렇게 말했다"는 식으로 말을 했다. 자기는 잘 모르겠고, 직원들이 한 말이라는 뉘앙스로 들렸다. 물론 말을 전하려다 보니 말투가 그렇게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묘하게 책임을 돌리는 듯한 그 말투가 뭔가 개운치는 않았다.
하지만 뭐 어때. 어찌 되었든 일만 잘 굴러가면 되지. 그리고 엔터테인먼트 분야가 그렇듯이 잡지·출판업계도 외향이 화려한 것에 비해 워낙 규모가 작다. 대부분 회사들은 대기업이랑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구멍가게다. 무수히 생겼다가 사라지고, 그만큼 체계도 잘 갖춰지지 않은 게 보통이다. 매끈한 일처리를 기대하기가 어렵다. 그러니 걸리는 점이 있다 해서 브레이크를 걸기는 부담스러웠다. 또 잘만 되면 코너를 맡아 장기 연재를 하게 될 수도 있으니, 싫은 소리를 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이 시점에 나는 좀 다른 행동을 했어야 되지 않았나 싶다. 그게 뭔지는 다음 시간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