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반기가 되어 좋은 영화들이 계속 우리를 찾아오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보고서 넋이 나갔던 작품은 홍상수의 <인트로덕션>이 유일했다. 이 영화에 대해 송경원 평론가의 언급("홍상수 영화는 관객이 받아들이는 순간, 관객이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완성되는 종류의 창작물이라고, 믿는다.…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필자의 위치에서 관측한 하나의 견해를 전달하는 정도에 불과하다.")에 동의하며, 이상하게도 이번 영화에는 나의 견해를 덧붙이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으로 글을 쓰게 되었다.
<인트로덕션>의 한의사(김영호)는 자꾸만 누워있는 환자 주위로 커튼을 친다. 이 사소한 동작으로 인해 환자들은 프레임 안에 존재하되 독립적인 공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같이 있되 독립적인, 붙어 있되 분절된 인물들의 세계. <인트로덕션>에는 그런 세계들이 반복적으로 출현한다.
영호(신석호)와 간호사(예지원)의 대화는 세 개의 숏에 걸쳐 이뤄진다. 그런데 매 번 처음 보는 것처럼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간호사의 모습은 다정하기도, 한 편으로는 기묘하기도 하다. 이 숏들은 마치 그 전의 숏이 부재하는 것처럼, 혹은 있든 없든 상관없는 것처럼 비슷한 듯 독립적으로 진행된다. 차례로 쌓여간다는 느낌도, 서로 간에 화학반응을 일으키고 있다는 인상도 없는 세 개의 숏들.
또한 영호와 주원(박미소) 사이의 다정한 대화는 자주 '선'을 사이에 두고 이뤄진다.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뒤편의 배경에는 그들 사이를 가르는 수직의 선(ㅣ)이 놓여있다. 1에서는 담벼락이, 2에서는 줄지어 선 나무들이 그렇다. 특히 2에서 영호와 주원 사이에 선 나무들은 그것들을 기준으로 세계를 좌우로 양분하는 느낌마저 준다.
<인트로덕션>은 종종 여러 인물들들 포착할 때, 그들 사이의 원근감을 지우고 마치 평면에 놓인 서로 크기가 다른 사람들처럼 포착한다. 처음 영호가 병원 데스크에서 간호사와 대화를 나눌 때, 횟집에서 석호와 그의 엄마, 그의 친구가 한 프레임 안에 담길 때 이런 점이 두드러진다. 물론 홍상수의 영화에서 인물들 사이의 비례가 어긋났던 순간이 없지 않았지만, <인트로덕션>에서는 이런 연출이 인물들의 개별성을 부각하는 방향으로 기능하고 있다.
같은 프레임 안에 있지만 별개로 움직이는 독립적인 세계들.
이런 인상을 심화시키는 것은 그들 사이의 '대화'다. 영화에서 인물들 사이의 대화는 자주 매끄럽게 미끄러진다. 특히 누군가 고통을 토로할 때 상대의 반응들이 미묘하다.
병원 환자가 복부 통증을 호소하자, 얼굴 없이 목소리만으로 등장하는 한의사는 "하여간 약을 지어주겠다"는 말을 전한다. 그 사무적인 말들은 환자가 전달하는 구체적인 고통의 언어들을 매끄럽게 빠져나간다.
영호가 바닷가에서 미소와 대화를 하는 순간도 마찬가지다.
깊은 고민을 하는 그녀를 두고 영호는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낙관적인 말을 전한다. 적지 않은 평자들이 이 순간을 두고 결합이나 구원을 언급하지만 내가 받은 느낌은 정반대에 가까웠다. 이 순간 둘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감정의 온도차는 그들의 대화가 서로를 탐색하되 완전히 접촉하지 못하고 미끄러지고 있음을 알게 한다. '눈'을 걱정하는 미소를 두고 큰 눈을 껌뻑이며 "이 바보"라 말하고 웃음을 터뜨리는 석호의 모습은 어딘가 불안하고 섬뜩하다. 이 대화는 그들이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서로를 걱정하고 있어도, 철저히 별개의 세계에 속해있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한다. 그러니까 주변과 반응을 일으키며 세계를 탐색하던 홍상수의 인물들은 전에 없이 고요하게 홀로 선 모양새다.
그러나 이 독립적인 세계들은 <인트로덕션> 안에서 개별적으로 반짝이며 평온하게 존재한다.
이 점을 보여주는 씬이 있다. 횟집에 모인 영호 일행과 맞은 편의 배우(기주봉)를 두고, 카메라는 영호 엄마와 친구만 담았다가, 영호까지 3인을 담았다가, 배우 1인만 담는 등 여러 구도로 그들을 포착한다. 이때 그들 사이를 오가는 카메라가 끝내 포착해내는 것은 어떤 구도로도 제각기 온전하게 빛나는 인물들의 세계이다. 그들은 같은 공간 안에서도 마치 평행우주처럼 여러 갈래로 나누어진 채로 서로 불화하지 않고 평온하게 화음을 이루며 운동한다.
카메라의 단순한 움직임과 시간성만으로 영화가 창조해낸 무수한, 분절된, 세계들. 그것들은 독립적이고 고독하지만 개별적으로 빛난다. 고유하게 숨을 쉬는 여러 개의 세계를 단번에 포착하는 이 장면은 가히 압권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인트로덕션>에도 분절된 세계 사이를 관통하는 섬광 같은 순간들이 존재한다.
선을 사이에 두고 미소와 대화하던 석호는 자주 그 선을 넘어 그녀와 다정하게 접촉한다. 팔을 쓰다듬기도 하고, 포옹하기도 한다. 화가(김민희)는 자주 무심한 듯 상대의 팔을 어루만지고, 영호 엄마는 식탁 너머에 있는 배우의 손을 꼭 쥔다. 이 순간들은 사람들의 세계가 기적적으로 접촉하는 순간이라 할 것이다.
그 순간들은 비록 미약하지만 독립적인 세계 사이를 자유롭게 유영한다. 특히 이 영화에는 위안이 필요한 이들이 자주 보이는데 통증을 느끼는 환자들도 그렇지만, 특히 자식들이 그러하다. <인트로덕션>에는 마음 편히 기댈만한 부모가 없는 것 같다. 엄마들은 다소 고압적이고 아버지는 무관심하다. 그 사이에서 위축되고 고민하는 인물들은 서로를 가끔 쓰다듬으며 다음 장면으로 이행한다.
하지만 이런 행위가 <인트로덕션>을 추동한다거나, 독립적인 두 세계를 마침내 하나로 통합시킨다고까지 표현하기는 저어된다. 그것은 영화의 원칙을 부드럽게 뛰어넘는다는 점에서 위안을 안기지만 끝내 지속하지 못하고 사라진다는 점에서 옅은 좌절감도 선사한다. 그것은 성공과 동시에 실패의 기록이다. 영원할 수 없지만, 잊을 때쯤 다시 우리를 찾아오는 그것은 위안과 좌절을 동시에 선사하는, 영화가 허락한 찰나의 기적이라 할 것이다.
마지막, 바다 속으로 몸을 던지는 영호.
나는 이상하게도 이 장면을 마주하면서 그가 바닷속에 있다는 것이 촉각적으로 전해지지 않았다. 그저 너울대는 어떤 하얀 이미지 안에 그의 형상이 있다는 것만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현실의 감각을 일깨우지 않으며 오로지 그 자체로 빛을 발하는 초월적인 이미지. 이것은 어떤 맥락과도 동떨어진 채 홀로 생생하게, 동시에 죽은 듯이 형형하는 이상한 장면이다. 무어라 말을 붙이기 어렵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 순간에서 단독적인 이미지가 뿜어내는 위엄 같은 것을 보았다고, 그 말을 조심스레 붙이고 싶다.
영화의 초반에 주원은 엄마에게 (아마도 제비집을 가리키며) "저 동그란 형상이 나무 위에 그냥 얹혀 있는 것 같다"고 말을 했다. 그러자 엄마는 "바람 불면 떨어질 것 같다"는 말을 잇는다.
이 영화에 나오는 인물의, 숏의 독립적인 세계들이 저 제비집과 나무처럼 위태롭게 닿아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거꾸로 생각한다면 그들은 연결되지 않았으나 여전히 가까이에 있다. 그리고 '물웅덩이에 빠진 나뭇가지'의 이미지가 비록 찰나에 불과했지만 묵직한 존재감으로 마지막까지 기억되는 것처럼, 그들은 어느 하나 사소한 것 없이 고요히 자신의 길을 간다.
내가 느끼기에 <인트로덕션>은 전에 없이고독하지만 동시에 평온하다. 온화한 무표정으로 다가와서 "그래도 괜찮아"라고 속삭이며 팔을 한 번 어루만지고 지나칠 것 같은 영화.
<인트로덕션>에 이르러 홍상수가 더욱 투명해졌다는 평에는 동의하지만 비평의 여지가 없어졌다는 말에는 동의하지 못하겠다. 그의 카메라가 아주 작은 움직임으로 우리 안에 숨겨진 세계들을 하나하나 포착해 그 개별적인 움직임들을 조용히 긍정할 때, 그 순간의 감동은 뭐라고 형언하기 힘들다. 나는 이렇게 긴 글을 썼음에도 그 순간의 경이를 언어화하는데 실패했음을 고백해야 할 것 같다. <인트로덕션>은 홍상수의 최고작이라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분명히 걸작의 반열에 올려야 할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