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고백하자면 <자마>를 처음 보았을 때 약간은 당혹스러웠다. 영화가 끝날 무렵 자마(다니엘 지메네스 카초)에게 가해지는 비쿠냐(마데우스 나츠테르가엘레) 무리의 느닷없는 처형. 이 장면의 서사도, 정서적인 흐름도 갑작스럽다는 생각이 들어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영화를 거듭 보며 깨달았다. <자마>를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음을. 이 영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은 서사도, 정서도, 다른 무엇도 아닌 감각이라는 것을. 이 영화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사건’이라기보다 ‘자연현상’에 가까워서, 머리로 이해하거나 납득하는 대신 순수하게 관찰하고 감각할 것을 요청해온다. 그것들을 따라가며 체험하는 것만이 영화에 제대로 접속하는 방법이라고 믿고 있다. 지금 <자마>가 소환해 일깨우려는 감각에 대해 말해보려 한다.
스멀스멀 다가오는 미지의 무언가
영화가 시작되면 우리는 자마가 이곳에서 힘과 통제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가 원주민의 뺨을 때리고 신문하는 장면이 연이어 등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속 지켜보면 상황은 좀 다르게 돌아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첫 장면부터 자마는 여인들의 나체를 몰래 훔쳐보다가 들키고 만다. 또 ‘나의 아내를 자주 보냐’는 자마의 질문에 상대는 대꾸하지 않고 그냥 지나친다. 자마를 찾아온 부부의 손녀는 그와의 인사를 거부하고, 말렘바(마리아나 누네스)는 주인을 불러달라는 자마의 요청을 못 들은 체한다. 여관의 하인도, 자마의 아이를 가진 원주민 여자도 무언가를 요구하는 자마의 청을 미묘하게 거절한다. 자마의 예상과 기대가 배반되는 순간들은, 비록 소소하지만 끊임없이 그의 주변에 쌓여간다.
그러는 동안 스크린에서는 이상한 일들이 벌어진다. 자마를 중심으로 형성된 영화의 자장과 인력을 무심히 이탈하는 장면들이 하나둘 등장한다. 가장 인상 깊은 순간은 전갈을 전하는 흑인 청년이 등장하는 장면이다. 그는 자마에게 ‘총독이 오라고 한다’는 전갈을 전하는데, 다음 순간 갑자기 어디선가 총소리가 들려온다. 그는 총을 맞고 바닥에 쓰러진 말을 발견하고, 그리로 서서히 걸어간다. 이 장면에서 여태 자마를 좇던 카메라는 문득 고개를 돌려 흑인 청년의 발걸음을 천천히 따라간다. 특별한 사건이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장면에서 순간적으로 스크린에 새겨진 그 나른한 이탈의 감각만큼은 강렬한 잔상을 남긴다.
총독을 보좌하는 남자가 손을 뻗어 비쿠냐의 귀를 만질 때, 갑자기 그의 목소리가 보이스 오버로 들려온다. 자마의 뒤편에 서 있던 하인은 홀로 슬며시 웃다가 자마가 뒤돌아보자 표정을 고친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갑작스레 영화의 자장을 이탈하는 이 우아한 움직임을 무어라 형언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마치 물에 스르르 번지는 잉크처럼, 영화의 중심부를 슬금슬금 벗어나는 이탈의 움직임으로 감지된다. 그리고 뜻하는 바를 이루지 못한 채로 자꾸만 삶의 궤적에서 미끄러지는 자마의 상태와 은근하게 공명한다. 우리는 이 장면들을 보며 지금 자마의 통제를 벗어난 어떤 독립적인 세계가 은밀하게 꿈틀대고 있음을 알게 된다.
‘배반과 이탈’의 감각에 대해 말했지만, 사실 이 영화에서 가장 강렬하게 느껴지는 감각은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무언가가 엄습하는’ 감각이다. 어느 날 자마는 하인을 시켜서 아내에게 보낼 서신을 적게 한다. 자마는 아내에게 전하는 말들을 불러주고 있다. 그런데 다음 순간 문득 이 방에 한 명의 남자가 더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전갈을 전하는 남자다. 그가 언제,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는 알 수 없다. 그는 그저 유령처럼 이곳에 갑자기 나타나 잠자코 서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인상 깊은 장면이 있다. 보조 판사 벤투라(후안 미누진)의 전근 소식을 전해 듣던 자마의 후면에 라마 한 마리가 등장한다. 이를 두고 자마가 만들어낸 환상으로 읽을지에 대해 여러 견해가 나오는 것 같다. 하지만 내게 그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화면에 밀고 들어오는 그 크고 하얀 형상의 움직임, 그 자체다. 그러니까 내게는 라마의 의미보다, 그것이 불쑥 나타나서 화면을 장악하는 과정 자체가 훨씬 흥미롭게 느껴진다. 의식하지 못하는 새에 무언가가 닥쳐오는 그 ‘엄습의 감각’. <자마>는 이 감각을 일깨우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영화다.
그런 점에서 루시아나(롤라 두에냐스)의 이야기는 의미심장하다.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 보니 남편의 목 위로 거미가 기어가고 있었다는 이야기. 이 모티브는 자신의 손 위로 거미가 기어가고 있었다는 파리야 대위의 말에서 다시 한번 반복된다. 이렇게 미지의 무언가가 스멀스멀 다가오는 감각은 계속 변용되어 등장한다. 누워 있는 자마의 얼굴을 더듬는 눈먼 자들의 손길도 마찬가지다. 그것들은 미처 맞이할 준비를 못한 상황에서 갑자기 덮쳐온다. 파리야 대위의 행렬을 조용히 따라가는 비쿠냐(대위와 자마는 처음엔 그의 정체를 모른다), 갑자기 나타나 대위 일행을 잡아가는 원주민, 문득 이들을 덮쳐오는 시체 썩는 냄새까지. 이 장면들은 모두 다양한 형상으로 엄습의 감각을 재현한다.
삶에 대한 끔찍한 농담
안타까운 것은 무언가 쉴 새 없이 다가오는 그 순간에도 자마는 바다 건너만 바라본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바다를 바라보던 그 당당한 모습과 달리 자마는 이곳의 원주민을 볼 때는 늘 곁눈질로 흘깃거리거나, 카메라 너머의 외화면을 응시하거나, 뒤돌아서 있다. 그가 원주민을 또렷이 바라보며 시선을 주고받는 장면은 찾아보기 힘들고, 마지막에 이르러 자마는 화면에 잡힌 말의 시선조차 제대로 받아내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현실을 또렷이 인식하고 살길을 모색하는 비쿠냐는 자마의 대척점에 있는 인물인데, 그는 재밌게도 자마와 달리 말 위에 누워서 쉬기도 한다.
이 영화를 두고 삶에 대한 권태나 식민주의에 대한 비판을 읽어내려는 시도가 많다. 물론 <자마>가 그것들을 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들이 있다. 이 영화가 모든 것을 걸어 재현하려는 것들. 누군가를 배반하고, 이탈하며, 엄습하는 그 감각들 말이다. 그 감각을 하나의 단어로 표현할 능력이 내게는 없다. 그러나 거미처럼 스멀스멀 목덜미를 타고 올라오는 그 미세하지만 분명하고 위협적인 감각만큼은 스크린에 또렷이 각인돼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엄습하는 실체가 무엇인지는 끝내 공백으로 남겨진다는 점에서, 그것은 우리가 각자 두려워하는 그 무엇으로 끝없이 확장된다.
영화의 마지막은 무시무시하다. 자마는 양손이 푸르게 물든 채로 그가 염원하던 바다 건너가 아닌 강가 어딘가로 멀어져간다. 자마를 태운 배가 점점 멀어져서 근처의 풍경과 구분되지 않을 때 즈음 영화는 막을 내린다. 그렇게 영화는 자마를 낚아채어, 그가 그렇게나 떠나고 싶어 했던 이곳의 풍경의 일부로 새겨 넣고야 만다. 이것은 삶에 대한 끔찍한 농담이다. 이상향을 바라보는 눈길과 뒤에서부터 엄습해오는 위험. 단언컨대 <자마>는 올해 만난 어떤 영화보다도 공포스러운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