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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홍수정 Sep 12. 2021

[리뷰] <모가디슈>는 언어에 관한 영화다

영화 모가디슈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 <모가디슈> 스틸컷

모가디슈는 사실 언어에 관한 영화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부분을 선언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한국대사관 앞에서 소말리아 정부군과 반군이 정면 대치를 하던 때, 한국대사관에서 커다란 스피커를 베란다에 올려서 친교의 메시지를 틀어준다. 마침 그때 양측이 본격적으로 충돌을 하기 때문에, 총소리가 울려 퍼지는 난장판 속에서 '코리아는 여러분의 친구'라는 메시지가 울려 퍼지는 이상한 장면이 연출된다. 


<모가디슈>에서 가장 압도적이라 할 만한 이 장면은 허울뿐인 형식적인 언어가 현실에서 얼마나 처참하게 실패하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한국대사관 측에서 그저 상황을 무마시키기 위해 벽 뒤에 숨은 채로 틀어놓은 그 소리들은 모가디슈의 현실에 전혀 전달되지 않는다. 총부림이 이어지는 잔혹한 현실에는 단 한 발도 내딛지 못한 채 그저 힘 없이 허공을 부유할 따름이다. 하필 스피커를 트는 순간에 정부군과 반군의 충돌이 발발한다는 점에서 다소 작위적인 느낌도 없지 않지만, 어떠한 의미도 전달하지 못한 채로 잔인한 현실 앞에 스러지는 언어의 철저한 패배를 그렸다는 점에서 굉장히 인상적인 장면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이 장면과 긴밀하게 연결되는 장면이 있다. 

한국 대사관의 한신성 대사(김윤석)와 북한 대사관의 림용수 대사(허준호)가 앞으로 어떻게 협조를 해 나갈 것인지에 대한 긴밀한 대화를 하려고 한다. 이때 림 대사가 무언가 상투적인 이야기를 하자 한 대사가 이런 말을 한다(기억상 정확하지 않을 수 있음). 


우리 대화를 합시다. 연설이 아니라.

이 영화가 언어에 얼마나 예민한 작품인지를 보여주는 순간이다. 이때 대화라는 건 형식과 무관하게 발화자의 진정한 생각과 감정을 전달하는 언어라면, 연설은 치밀하게 형식을 갖추고 불특정 다수를 향해서 전달하는 계산된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연설이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서로 속내를 보여야 할 시점이니 연설이 아닌 대화를 하자는 의미이다. 이때 한 대사의 말을 빌리자면 한국대사관이 스피커를 통해서 전달한 말들은 대화가 아니라 그야말로 연설인 셈이다.

 

영화에는 반대로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상대에게 메시지가 전달되는 장면들도 나온다. 

처음 북한 대사관 사람들이 이동을 할 때 무장한 꼬마 애들을 만나게 된다. 이때 아이들이 입으로 총소리를 내면서 '두두두두' 소리를 내니까, 어른들은 어리둥절한데 오히려 아이들이 죽는 시늉을 하고 이 덕에 큰 소란이 벌어지지 않고 상황이 소강된다. 이 장면에서는 언어에 익숙하지 않은 아이들이 오히려 그것을 뛰어넘어 의사소통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을 소통하게 하고 위기에서 구출하는, 언어 외의 그 무언가를 영화가 포착하고 있는 것이다. 


또 강대진 참사(조인성)는 소말리아 정부를 찾아가서 당장 달러를 받고 무장 경비를 내놓으라는 얘기를 하는데, 강 참사 옆의 사무원더러 자기 말을 통역하라고 한다. 처음에는 이 사무원이 통역을 하지만 나중에 정작 중요한 타이밍에서는 강 참사가 직접 정부군에게 소리를 지르고, 통역 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물론 통역 과정이 생략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이때 강 참사의 생생한 결기나 카리스마가 상대에게 직접 전달이 되어서 원하는 바를 얻어냈다는 점이 훨씬 중요해 보인다. 정말 의사소통을 성공시키는 중요한 것들은, 통역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이 영화의 결말 장면도 이런 맥락에서 볼 수 있다. 

남한과 북한 양 측은 서로 말을 할 수 없고, 눈빛도 교환하기 힘든 상황이지만,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그들 간에 어떤 연대감이 흐르고 있다는 점을 느낄 수 있다. 언어가 금지된 구역에서 이들 사이에 흐르는 언어 외의 그 무언가를 응시하는 장면이다. 


또 이 영화와 관련해 하나 이상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는데, 북한 사람들의 대사가 사실상 자막 없이도 대부분 이해가 된다. 그런데도 영화는 북한말 밑에 자막을 붙이는 있는데, 이 점이 그들이 우리와 다른 언어를 쓰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효과를 발생시킨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것은 한국어가 아니며, 적어도 언어에 관련해서 이들은 서로 외국인과 비슷하다는 점을 분명히 짚고 넘어가는 효과가 있다. 그러면서 관객들이 그들 사이를 흐르는 비언어적인 것들에 시선을 돌리게 만든다. 


<모가디슈>를 남북관계에 집중해서 보려는 시선이 있지만 나는 이 영화가 정치 이상의 것을 말하고 있다고 느낀다. 

언어가 철저하게 실패한 지역에서, 서로 완전히 다른 말을 쓰는 사람들이 어떻게 합심해서 살아나가느냐에 대한 고민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을 소통하게 해주는 언어 이상의 그 무언가가 무엇이냐는 질문이 도출될 수 있다. 그것은 함께한 시간이라 할 수도 있고, 생사를 넘나드는 경험이나 진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관객 각자가 영화를 보며 판단할 부분일 것이다.

 

또 한 가지. 류승완은 <부당거래>의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 등 무수히 쫀득한 명대사들을 썼던 감독이다. 그는 분명 언어에 능숙하며 예민한 사람이다.   

이 영화에서도 인물들이 쓰는 말투를 통해서도 그런 점이 드러나는데, 먼저 강 참사는 존대와 반말이 섞인 신기한 말투를 쓴다. 어느 정도 격식을 지키고 있지만, 내면의 거만한 성격이 무심결에 드러나는 말투라고 할 수 있다.


또 한 대사는 영화 초반에 강 참사와 공수철 서시관(정만식) 사이를 오가면서 이쪽에서는 저쪽 욕을 하고, 저쪽에서는 이쪽 흉을 살짝 보며 양쪽을 어우르는 모습을 보인다. 이것은 이중적이라기보다, 양쪽을 모두 헤아리며 조직 전체를 끌고 가려는 한 대사의 캐릭터가 드러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동시에 그가 나중에 강 참사와 다르게 북한 측 사람들을 모두 데리고 탈출하는 선택을 내리는 점을 암시하는 복선으로 기능한다. 


류승완은 언어에 섬세한 감독인 만큼 언어가 도달할 수 없는 한계에 대한 인식도 예민할 것이라 예상한다. <모가디슈>는 그 고민의 흔적이 담긴 작품이다. 


<모가디슈>에 대한 평이 나뉘지만, 여태 류승완의 작품 중에 이 정도로 언어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담긴 작품은 없었다는 점에서 나는 <모가디슈>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언어에 대한 그의 고민, 상념들이 계속 이어지기를, 그 치열한 생각의 흔적이 다음 작품에도 계속 녹아들어 관객에게 닿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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