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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홍수정 Dec 25. 2022

기예르모 델토로의 새로운 걸작 <피노키오>

<기예르모 델토로의 피노키오> 리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기예르모 델토로의 피노키오> 스틸컷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기예르모 델토로의 피노키오>는 여러 모로 놀라움을 안긴다.

 

기예르모 델 토로가 크리스마스 즈음에 넷플릭스를 통해 우리를 찾아왔다는 점과, 이완 맥그리거, 크리스토프 왈츠, 틸다 스윈튼 등 명배우들이 성우로 대거 참여했다는 점, 그 결과물이 기예르모 델 토로의 필모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아름답다는 점, 그리고 한동안 잊고 지냈던 그의 명작 <판의 미로 -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를 떠올리게 한다는 것까지.


기예르모 델 토로의 판타지 안에서 크리쳐, 전쟁, 어린아이의 세 가지 요소가 만날 때 놀라운 무언가가 튀어나오는 게 아닐까. 연말을 이런 작품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은 행복이다.


# 진정한 비극이란

제1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이탈리아, 제페토(데이비드 브래들리)의 어린 아들 카를로(그레고리 만)는 교회에 있다가 적의 폭격으로 죽고 만다.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이것이 의도한 공격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적들은 남은 폭탄을 버리기 위해 아무 곳에나 떨어트렸고, 이 실수와도 같은 하찮은 사건으로 제페토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이를 잃는다. 진정한 비극은 그것이 대단한 의미나 의도조차 없을 때에 완성된다.


성전이 불타 무너진다. 제페토의 내면도 그렇다. 한 노인이 믿는 세계 전부가 허물어져 버렸을 때 피노키오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 피노키오의 해맑은 슬픔

피노키오의 해맑음은 극의 전반부의 재미를 이끌어낸다. 자신을 향한 세상의 적의를 가볍게 튕겨내는 부분은 유쾌하다. 그것이 어린아이의 위대함이 아닐까. 오로지 세상에 대한 호기심만으로 자기 앞에 놓인 장애물을 부숴버리며 씩씩하게 앞으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점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영화가 품는 슬픔과도 연결된다. 피노키오는 자신을 향한 세상의 혐오를 모르고, 그를 둘러싼 간교한 계획도 모르고, 어느 곳에서나 꺄르륵 웃으며 즐겁게 지내니 그 아이러니를 견디는 슬픔은 우리의 몫이다. 


# 캐릭터의 복합성

<기예르모 델토로의 피노키오>(이하 <피노키오>)의 뛰어난 점 중 하나는 인물들을 선과 악으로 분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블페 백작은 분명 빌런이지만 매 순간 나쁘다고 하기 곤란한 인물이다. 그는 때때로 '스타'로서 피노키오의 재능을 진정으로 아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본성이 탐욕스럽고 천박한 그는 피노키오의 재능을 계발하는 동시에 착취한다.


그런데 이 모습이 지금의 매니지먼트와 많이 다른가? 그는 비록 돈에 타락했지만 안목만은 훌륭한 코치 같기도 하다. 아마 많은 직장인들이 블페 백작을 보며 약간 PTSD를 느꼈을 것이라 짐작한다. 그는 회사의 관리자와도 어느 정도 닮았다. 소속된 이들에게 악착 같이 헌신을 요구하지만 동시에 계발의 기회도 제공하고, 원한과 우정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복합적인 인물이다. 그런 점에서 블페 백작은 단순한 악역을 넘어 현대적 의미의 매니저 혹은 관리자와 어느 정도 맞닿아 있다(정산을 하나도 안 해주고, 대놓고 노예라고 부르는 점은 좀 다르다).

블페 백작의 원숭이 역시도 마찬가지인데, 그는 피노키오에게 질투심을 느끼지만 그의 처지에 연민을 느껴 진실을 말해주기도 한다. 이런 점은 인간관계의 다면적인 모습과도 닮았다.


<판의 미로 -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 스틸컷

# 명장면, 전작과의 연결점

영화에는 환상적인 장면들이 자주 출몰한다. 하지만 단 하나를 꼽자면, 나는 이 장면을 얘기하고 싶다. 

처음 생명을 얻은 피노키오는 제페토를 찾아 교회로 달려간다. 그는 예배당에서 예수상을 보고서, 팔을 좌우로 벌리고 다리를 비스듬히 꼬며 고난 받는 예수의 형상을 마치 무용을 하듯이 따라 해 본다. 이 짧은 순간을 잊을 수 없다. 교회의 엄숙한 공기 사이를 뚫고 사뿐사뿐 춤을 추는 피노키오. 나무로 만든 예수상 아래 겹쳐지는 나무 소년. 이 순간은 어린 영혼의 무구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가 미래에 겪을 고난(예수와 같이 자신의 몸을 희생해 다른 이들을 살릴 것이라는 점)을 흐릿하고도 묵직하게 전달한다. 이 놀라운 장면을 놓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런가 하면 전작들과의 연결점도 눈에 띈다.

가장 많이 겹쳐지는 영화는 역시 <판의 미로 -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이다. 판타지적 설정을 배경으로 전쟁의 비극과 아이의 동심을 교차시킨다는 점, 그리고 안내자의 존재. <판의 미로>에서 안내자를 맡았던 '판'의 역할은 <피노키오>에서 귀뚜라미와 겹친다. 판의 생김새나 딱딱한 움직임이 곤충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점도 재밌다. 

'신'의 존재에 대한 인식도 공통적이다. 그들은 선한지 악한지 뚜렷하게 알 수 없는 존재들이다. 다만 은총인지 저주일지 모를 무언가를 인물에게 선사한다. 다른 말로는 '운명'이라 할 것이다. 신은 변덕스럽고 운명은 때때로 슬프다. 언제나 그래왔고, 그건 우리가 바꿀 수 없다. 다만 어떤 태도로, 누구와 그 길을 걷겠느냐고 영화는 묻고 있다. 


# 이완 맥그리거가 이렇게 연기를 잘했나

<피노키오>를 보며 내내 감탄했던 것이 귀뚜라미 크리켓을 연기한 이완 맥그리거의 연기력이다. 그는 익살맞은 귀뚜라미를 맡아 극 전반의 분위기를 이끌고 간다. 목소리 톤, 억양, 하다못해 노래까지 흠잡을 데가 없다.


때로 훌륭한 외모의 배우가 목소리 출연으로 새삼 연기력을 인정받는 사례들이 있는데 <Her>(2014)에서 스칼릿 조핸슨이 그랬고 <그놈 목소리>(2007)의 강동원도 비슷한 평가를 받았다. 이 영화에서 이완 맥그리거는 생각보다 '연기를 잘하네'가 아니라 그냥 완벽하다. 여러모로 즐거운 놀라움.


크리스토프 왈츠의 연기는 기대만큼이나 훌륭하고, 신비로운 죽음의 요정을 연기하는 틸다 스윈튼의 건조한 톤도 좋다. 피노키오와 카를로를 연기한 그레고리 만은 잘 알지 못한 아역 배우이지만 이 영화에서 완전히 반해버렸다. 노래를 부를 때, 특히 약간의 가성이 섞일 때에는 '천사 같은 목소리'라는 상투적인 표현을 새삼 떠올리게 한다.


<기예르모 델토로의 피노키오>

# 무엇에 대한 이야기인가

<피노키오>는 다양한 갈래의 서사를 품고 있다. 훌륭한 동화들은 대게 그렇다. 사랑, 전쟁, 소수자 등 어느 방향으로 읽어도 유려한 이야기가 완성된다.


하지만 <피노키오>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역시나 사랑과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영화의 처음, 피노키오는 말한다. "저는 카를로와 같이 될래요!" 아버지가 죽은 아들 카를로를 좋아하니, 자신도 카를로와 같이 되겠다는 말이다. 정체성을 바꾸어서라도 사랑받고자 하는 그 어린 마음은 애틋하지만 근심을 자아낸다. 이런 방식의 사랑은 괜찮은가. 이 대사가 나오는 시기는 영화의 배경인 이탈리아 마을이 파시스트의 집권을 받고 있을 때이다. 미처 성인이 되지 못한 아이들이 전쟁에 징집된다. 그런 면에서 파시스트인 포데스타 시장(론 펄먼)과, 피노키오를 카를로의 대체물로 생각하는 제페토의 태도는 서로 통하는 지점이 있다. 어쩌면 이것은 '상대가 다른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태도'에 대한 가장 극렬한 비판일 수 있다(네가 파시스트와 다를 게 뭐야). 한 곳만을 응시하는 폭력적인 통일성이 마을을, 피노키오의 마음을 관통한다.


그러나 피노키오의 투명하고도 뜨거운 애정은 변화를 만들어낸다. 

여러 계기들이 있다. 그러나 가장 큰 이벤트는 피노키오 일행이 바다괴물의 속에서 함께 탈출하는 사건일 것이다. 피노키오는 일종의 벌칙으로 받아들여지는 '거짓말을 하면 코가 자라나는' 성질을 이용해 일행을 구해낸다. 이 장면이 중요한 이유는 '가치의 전환'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별난 특성은 삶을 이어가는 열쇠가 되고, 거짓말은 유쾌한 퍼포먼스가 된다. 어른들이 쌓은 가치관의 체계가 무너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피노키오는 다시 한번 제페토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다. 이때 피노키오가 완전히 숨을 거둬 그저 목각 인형이 되어 버렸을 때의 연출이 인상적이다. 단순히 빛과 움직임의 차이만으로, 영화는 살아있는 존재 '피노키오'와 죽어 있는 목각 인형의 차이를 보여준다. 숨이 달아났을 때에야 제페토와 우리는 그가 얼마나 빛나는 존재였는지를 자각한다.   


하지만 피노키오는 다시 한번 살아난다. 원작을 기억하는가? 원작에서 피노키오는 축복을 받아 인형에서 벗어나 진짜 사람이 된다. 그러나 영화는 다른 선택을 한다. 피노키오는 이전의 모습대로 깨어나고, 제페토는 그를 지금 모습 그대로 사랑하겠다고 다짐한다. 그들이 함께 책을 읽고 체스를 두며 삶을 살아가는 짧은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평온하고 아름다운 순간이다.


마지막 무렵, 영화는 홀로 세상에 나아간 피노키오가 세상에서 받아들여졌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 장면은 '세상'이라는 부드러운 용어를 빌어 우리의 생각을 슬쩍 물어보고 있다. 우리가 피노키오를, 남들과 다른 누군가를 완전한 존재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말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것은 제페토의 이야기인 동시에 피노키오의 이야기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온전한 자신의 모습 그대로 사랑받을 용기'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나도 모르게 자라나는 코가, 눈총을 받던 나의 별난 특성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살릴 수 있다고 믿는 일. 카를로도 아니고, 부드러운 살도 없지만, 나무 인형의 모습 그대로 사랑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일. 그 과정을 관통한 사람만이 세상을 향해 저벅저벅 나아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그걸 알까? 

이 영화를 둘러싼 더 큰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바로 순환. 모든 것이 오고 간다는 단순한 이야기다. 마지막 순간 영화는 피노키오가 어디선가 숨을 거뒀을 것이라고 말한다. 생명이 오고 가는 것처럼 벌어질 일은 벌어지고, 우리는 그렇게 언젠가 떠나간다고 말이다. 무르익은 솔방울이 바닥으로 툭 떨어진다.


기예르모 델 토로는 크리처들이 뛰노는 판타지에 누구보다 매료되었던 연출자다. 그 환상적인 세계가 영원할 것처럼 말이다. 그런 그가 오고 감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내가 아티스트에게 바라는 태도와도 일치한다. 자신이 잘하는 것들을, 아름다운 전성기를 놓지 못하는 예술가만큼 추한 것은 없다. 그러니 기예르모 델 토로의 영화에 슬쩍 숨어 들어온 순환의 감각이 반갑고 애틋하다. 그도 그 어느 때보다 세련된 이야기꾼으로 무르익어 가고 있음을 느낀다. 기묘하고도 아름다운 기예르모 델 토로의 솔방울이 반짝거린다. 






※ 관련 글

기예르모 델 토로의 <나이트메어 엘리>(2022) 비평


https://brunch.co.kr/@comeandplay/6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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