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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전호 Jul 09. 2019

어느 가족

지금 우리 시대의 가족을 의심한다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원고에 쓰인 이미지의 출처는 "다음 영화"입니다.)




필자가 언젠가 다른 원고를 통해(아마 금요시네마의 <아버지와 이토씨>였던것 같다) 이야기했었던 것 같은데 필자가 개인적으로 일본 영화를 좋아한다. 특유의 그 심심함과 소소한 자연스러움이 우리네 삶과 많이 닮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랑이 극단으로 치닫거나 초능력이 난무하는 영화는 뭐랄까... 나와는 별로 상관없는 세상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필자가 좋아하는 일본 영화의 장르(?)에는 크게 세 분야가 있다. 

우리 옆집에 살고 있는 평범한 가족의 이야기를 풀어놓은듯한 "가족영화", 이런 상상력도 가능하구나, 라는 타임슬립을 기본 구조로 한 "판타지 영화" 마지막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힐링되는 "애니메이션 영화".

그 각각의 장르를 대표하는 영화도 있을 테고, 대표적인 감독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애니메이션이나 판타지 영화 하면 거장 "미야자키 하야요"나 "신카이 마코토"감독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들의 대표작들이 자연스레 실과 바늘처럼 따라온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 <이웃집 토토로>, <초속 5센티미터>, <너의 이름은>등등.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일본의 "가족영화"하면 어느 감독과 어떤 영화들이 떠오는지요?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라고 감히 말하겠지만 필자는 일본의 "가족영화", 아니 일본이라는 물리적인 지역에 한정 짓지 않더라도 "가족영화"하면 반사적으로 "고레에다 히로카즈"감독과 그가 연출했던 여러 영화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것들을 정말이지 무척 좋아한다. 대충 생각나는 대로 나열해보자면(제작의 순서는 상관없습니다) <태풍이 지나가고>, <바닷마을 다이어리>,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걸어도 걸어도>, <아무도 모른다>등이다. 혹시 더 있으면 댓글에 남겨주세요. 꾸벅.


그리고 최근(이라고 하긴 힘들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감독의 <어느 가족>이 개봉했다. 애타게 그의 차기작을 기다리고 있었다,라고 말하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그의 새 영화가 발표됐는데 보지 않을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여담이지만 2018년 <어느 가족>은 칸 영화제에서 한국의 <버닝>을 누르고 황금 종려상을 거머쥐었다.

(2019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수상했습니다. 축하드려요.)



그리하여 오늘 "금요 시네마"의 소개작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이다. 

다시 여담이지만 이 영화엔 필자가 다시 한번 개인적 취향으로 좋아하는 배우 "릴리 프랭키"와 "키키 키린"이 나온다. 가족 영화에 "릴리 프랭키와" 키키 키린"이 나왔다면 말 다했다. 후후 기대되는군요.



01. "고레에다 히로카즈"감독의 뿌리_가족



사실 누구나 그렇겠지만 한 사람이 어떤 한 가지를 계속 반복하다 보면 그것에 묘한 집착이 생기기 마련이다. (영화 <독전>에서 나오는 배우 조진웅 씨의 대사가 떠오르네요.) 

"고레에다 히로카즈"감독도 마찬가지 경우가 아닌가 싶다. 관객들은(그의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이더라도) "고레에다 히로카즈"감독하면 당연히 가족을 주제로 한 영화를 만들었겠구나, 생각하게 된다. 필자도 그중 한 명이다. 물론 그가 지금까지 가족영화만을 제작해온 것은 아니다. 대충 생각해 보면 <세 번째 살인>이나 <공기인형>등 다른 소재의 영화도 제작하긴 했지만 역시나 그의 대표작이다(동원 관객수나 영화제 수상 측면에서),라고 말할 수 있는 영화는 전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전부 "가족"이라는 주제의 틀을 벗어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조금은 고집스럽게 가족이라는 하나의 틀에 갇힌 그의 영화들이 이제는 조금 식상하다,라고 누군가 말한다면 사실 그 의견엔 전적으로 동의하기가 어렵다. 적어도 필자에게 그의 여러 가족영화들은 커다란 "하나"로 느껴지기보다는 분명히 각각의 개성을 지닌 하나하나의 "객채"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그의 탁월한 연출 능력이고 관객들이 꾸준히 그의 영화를 기다리는 이유일 것이다. 비슷한 주제를 다양한 색깔로 그려낸 그의 예민한 관찰력과 풍부한 연출력에 한 번 빠져들면 좀처럼 헤어 나오기가 쉽지 않다.



1. 자기 복제일까?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느 지면을 통해 작가의 자기 복제는 어느 정도 어쩔 수 없다, 라는 취지의 말을 했었다. 물론 형태 그대로의 복제가 아니라 이야기의 모티브가 되는 소재의 복제랄까. 하지만 그런 소재의 자기 복제가 필연적으로 동반하게 되는 식상함의 대안으로 그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작가 자신만의 문장이(문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진화해 나간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분야는 다르지만 하루키의 이야기를 "고레에다 히로카즈"감독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종종 그의 영화에 "또...", "뻔하잖아...", 라는 평가가 따라붙는 것이 그의 팬인 한 사람으로서 조금은 안타까우니까.


분명 그의 영화로 들어가는 입구는 "가족"이라는 커다란 문이다. 하나뿐인 유일한 출입문. 하지만 그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 보면 각기 다른 수많은 방이 존재한다.  

커다란 "가족"이라는 집 안에 있지만 각각의 방은 독특한 개성을 지닌 객채로서 따로 존재한다. 각각의 방마다 벽지의 색이 다르고 가구의 배치가 다르다. 방마다 주인이 다르고 그들의 취향도 다르다. 크기에서 구조까지. 전혀,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공통점이 없다. "고레에다 히로카즈"감독 편에 서서 그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영화를 볼 때 그의 전 작품들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예술이 그런 것 아닌가? 예술가는 현실이라는 뻔하디 뻔한 제약 속에서 그것을 풀어나가는 각각의 방법들을 고민하고, 고민 끝에 풀어진 하나하나를 우리는 독립된 하나의 작품이라고 말하고 있으니까.


그건 그렇고, 위에 그의 영화의 포스터들을 보니깐... 음... 포스터만 봐도 뭔가 비슷한 느낌이긴 하군요. 물론 다른 버전의 포스터들도 있습니다만.



2. <어느 가족>의 조금은 다른 질문



그런데 "고레에다 히로카즈"감독의 전 작품들을 보고 영화 <어느 가족>을 본 관객이라면 이전의 영화들의 스토리 진행 방법과는 다른 그의 새로운 시도를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들 발견하셨지요?


지금까지의 그의 영화들이 해체되고 있거나 이미 해체된 가족이 커다란 의미에서 다시 회복되는 과정을 그려나가고 있다면 이번 영화 <어느 가족>은 그 반대의 노선을 따르고 있다. 말 그대로 하나의 가족이 어떻게 해체되어가느냐를 영화에서 보여준다. 지금까지 그가 지켜온 일종의 법칙을 깨버린(그것도 철저하게) 것이다. 물론 영화 <어느 가족>은 그렇게 해체돼버린 가족을 설명하는 것으로 끝나진 않는다. 그 과정에서 가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하나의 형태로서 가족이 중요한지 아니면 비로 형태는 비정상적이다 할지라도 끈끈한 정서적 유대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한지를.


"고레에다 히로카즈"감독 자신도 자신의 영화들에 대해서 꾸준히 질문하고 고민해왔을(당연히)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긴 고민 끝에 '그래? 자기 복제라고? 흥! 웃기시네.'라는 반항심(?)으로 이번 영화를 제작했을 것이다, 라는 건 어디까지나 제 추측입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지만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작가가 문체를 바꾸듯 커다란 스토리를 풀어가는 방향을 바꿨을지라도 역시나 <어느 가족>이 그가 지금까지 보여줘 왔던 가족이라는 끈끈한 무언가를 놓치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지난 영화들보다 조금 더 진하게 "가족"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우리가 가족이라고 생각하며 억지스레 지켜왔던 그 무언가가 혹시 잘 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진 않은지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한다.



3. 결국 우리 곁을 떠날 수 없는 이야기_가족



우리는 흔히 영화의 흥행 조건을 소재의 독특함이나 신신함에서 찾곤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재밌으니까. 

영화의 이야기가 누구나 다 겪어봤고 예상 가능하게 그럭저럭 흘러간다면 생각만으로도 지루하다. 그런 영화를 누가 시간과 돈을 투자해서 보겠는가. 그래서 영화 제작사도, 감독들도 "지금까지는 없었던...", "상상을 뛰어넘는..."등의 자극적이고 역동적인 소재를 찾아 나서고 대부분 그런 영화들은 많은 관객들을 끌어 모은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이런 현상에 반감은 없다. 다만 조금 아쉬울 뿐.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이라는 것은 우리 삶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다. 누군가는 가족이라는 제도 자체를 부정하기도 하지만 적어도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삶의 대부분의 이야기는 가족이라는 단단한 토대 위에서 이루어진다. 인간의 삶이라는 게 가족이라는 제도에서 시작되고, 그곳 안에서 마무리되니까. 

우리 스스로만 돌아보더라도 가족이라는 것은 애정과 애증 그 중간의 어디쯤이지 않을까?


그런 이유로(물론 제 생각입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감독은 끊임없이 "가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분명히 뗄 수 없는 존재이므로 분명하게 말해야 한다, 라는 의지. 



02. 여기, 이상한 가족이 있습니다



어느 시대건, 어떤 상황이건 우리에겐 흔들리지 않는 하나의 굳건한 개념이 있다. 바로 가족. 각자가 나름의 평가를 "가족"이라 명명 지어지는 인관관계에 부여하고 있다. 하지만 각기 다른 수많은 평가가 있다 하더라도 가족의 근본적인 개념을 흔들지는 못한다. 

그 굳건한 개념을 형성하고 있는 물리적 요소중 하나는(세상의 모든 가족이 그러하진 않겠지만) 바로 혈연이다. 거창하게 말하면 피로 맺어진 관계. 일반적으로 우리는 모두 부모로부터 반쪽씩 물려받은 유전자를 부인할 수는 없다.


지금까지의 "고레에다 히로카즈"감독의 영화들도 이 혈연을 바탕으로 한 가족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영화 <어느 가족>은 그것에 비켜나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가족은 그 구성원 모두 완벽하게 유전적으로 남남이다. 

아니, 그렇다면 과연 이들은 어떤 사연으로 가족이 되었을까?



1. 완벽한 타인에서 가족으로



영화  <어느 가족>에 등장하는 가족의 구성원은 말 그대로 무척 기이하다.

죽은 남편의 연금으로 살아가는 실질적인 이 집의 가장(금전적으로)인 할머니 하츠에(키키 키린).

공장에서 잡부역을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일을 나가기 싫어하는, 한 가족의 가장으로서 책임감이라곤 찾아보기 어려운, 조금은 허술한 아버지 오사무(릴리 프랭키).

세탁공장에서 일을 하며 어머니라기보다는 그냥 옆집 아줌마 같은 무심해 보이는 어머니 노부요(안도 사쿠라).

이모라고 하기에도, 처제라고 하기에도 뭔가 어울리지 못하고 집에서 겉도는 느낌의 아키(마츠코카 마유).

학교에는 다니지 않은 채, 아버지와 함께 동생과 함께 가게에서 물건을 훔치는 아들 쇼타(죠 카이리).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이상한 가족 안에서 진정한 가족의 사랑을 느끼는 딸 유리(사사키 미유).


가족 구성원 각자의 캐릭터가 어떠하든 일단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 들어와 있는 이 인물들을 우리는 가족이라 부를 수 있다. 하지만 이 가족의 특이한 점이 하나 있다. 바로 이들 사이엔 어떠한 혈연 관계도 이어져있지 않다는 것이다. 할머니인 하츠에는 아버지인 오사무도, 어머니인 노부요도, 이모인 아키도 낳지 않았다. 그리고 아들인 쇼타와 딸인 유리도 어머니인 노부요가 낳은 자식이 아니다. 아니, 그럼 어떻게 이들이 가족이 될 수 있었을까? 가족이라 명명 지어지는 관계의 기본인 "혈연"을 무시한 채 어떻게 이들은 가족이 될 수 있었을까?



사실 영화에서 이들이 어떻게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한 집에서 살게 되어있는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설명을 해주고 있다. 우선 아버지 오사무와 어머니 노부요는 노부요가 운영하는 술집에서 만나게 된 사이다. 그리고 어떤 사건으로 인해 오사무는 노부요의 애인인지 남편인지를 살해하게 되고(일단은 정당방위 비슷하게 보인다) 둘이 도망쳐서는 부부, 라는 관계가 된다. 그리고 할머니인 하츠에의 집에서 함께 살게 된다. 왜 하츠에와 함께 살게 되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없지만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으리라. 하츠에 에게는 비록 가짜라 할지라도 가족이라는 따듯함을, 오사무와 노부요에게는 집과 돈이라는 경제적인 이득을.

그리고 이모인 아키는 조금 더 복잡하다. 우선 건조하게 객관적인 관계만을 따진다면 아키는 할머니 하츠에의 남편이 바람을 피워서 새로 얻은 아내의 아들의 딸이다. 쉽게 말해서 배 다른 손녀 정도? 그런데 의문은 왜 그런 아키가 지금 하츠에와 함께 살고 있느냐이다. 영화에서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다만 하츠에가 이미 죽은 남편에게 제사(일본 문화는 죽은 가족을 집에서 제사 비슷한 글 드린다.)를 지내기 위해 아키의 집에 방문을 하고 거기서 용돈(?) 비슷한 걸 받아온다. 이것이 하츠에의 소심한 복수인지 아니면 아키를 보살피고 있는 것에 대한 대가인지는 모호하다. 아마도 아키는 자신의 원래 가정에서 적응의 문제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가출을 하게 되고 이 이상한 가족으로 흘러들어온 것이다.

아들인 쇼타는 아버지 오사무가 빈 차 털이를 하다가 거기에 방치되어 있는 쇼타를 데리고 왔고, 마지막으로 딸인 유리는 쇼타와 노부요가 집에 돌아오는 길에 가정에서 학대를 받아 홀로 있던 데려오면서 가족이 된다.

그리고 이 이상한 가족의 새로운 사건은 딸인 유리가 집에 오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2. 영화는 우리 시대 가족을 의심한다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어쩔 수 없이 영화 <어느 가족>의 가족은 이상한 가족이다.

구성원의 관계와 출신부터 해서 그들이 살아가는 방법 까지. 아버지는 일을 하기 싫어하고 아들에게 도둑질을 가르친다. 할머니가 받는 죽은 남편의 연금만으로는 여섯 가족의 생활이 힘들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넘어가려 해도 아들에게 도둑질을 가르친다니. 게다가 쇼타는 도둑질에 대해선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동생인 유리에게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배운 도둑질을 가르치기까지 한다. 이모인 아키는 유사성행위를 하는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벌지만 그 돈을 가족의 생활비에 보태진 않는다. 그리고 조금은 부끄러울 수도 있는 그 일에 관해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가족들과 이야기하며 웃기도 한다. 

역시 아무리 봐도 이상한 가족이다. 관객들은 영화를 보면서 절대로 이 가족을 "가족"이라고 부르기엔 부족함과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관객들은 이 가족의 모습을 통해 불편한 질문을 받게 된다. 이 이상한 가족이 이상하게도 행복해 보인다. 혈연으로 맺어지진 않았지만 다른 어느 가족보다 끈끈해 보인다. 그리고 우리는 생각한다.


"지금, 우리의, 나의 가족이 과연 이 이상한 가족보다 나은 게 무엇인가?"


뭔가 어설프고 불편하게 엮여있는 <어느 가족>은 우리가 어느샌가 놓치고 살고 있는 가족의 진정한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보여준다. 혈연으로 맺어지긴 했지만, 애초에 선택권이 없이 맺어진 우리의 가족이라는 모습. 너무나 당연한 관계이기에 놓치고 살았던 사랑이라는 감정. 비록 이들은 혈연이 아닌 선택으로 맺어진 가족이다. 하지만 어설프긴 하지만 이들은 그 관계 속에서 서로를 향한 사랑 넘어의 애정을 가지고 있다.



3. 그들에게만은 진정한 가족이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혈연을 배재하고 약간은 무책임한 선택으로 결합된 <어느 가족>의 연결고리는 위태위태 하다. 어느 하나라도 삐걱거리면 전체가 무너져내려 버릴 것처럼 불안하다. 하지만 영화가 중반에서 종반으로 달려갈 때쯤 이들은 관객들에게 단단하고 견고한 감정들을 보여준다. 우리 가족이 보기엔 이래도 정말 진정한 가족입니다. 가족이라면 모름지기 이런 모습이죠,라고 자랑하듯이.


당연한 이야기지만 <어느 가족>의 각각의 인문들은 분명 이 전 자신만의 가족의 일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각기 사정으로 인해(좋은 사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원래의 가족에 소속되지 못하고 배재되었다. 그리고 그 상처를 껴안고 <어느 가족>의 구성원이 되었고 그 안에서 자신들의 상처를 조금씩 회복해 간다.

결국, <어느 가족>이 그들에겐 진정한 가족이었던 것이다.  



03. 조금은 무거운 질문



결국, 조금 멀리 돌아왔지만 영화를 본 관객이라면 반드시 질문해야 할 것이 있다.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서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을까?"


대부분의 관객들이 처음엔 다소 가벼운 마음으로 어설픈 가족들을 관찰하는 느낌으로 영화를 보기 시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대한 답을 찾으려 노력하게 될 것이고 그 질문은 결코 가볍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감독은 <어느 가족>을 통해서 지금 우리 사회의 가족이 과연 안녕 한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1. 관객들은 점점 어느 가족을 변호한다



<어느 가족>의 가족은 그 시작이 어설펐던 것처럼 많은 위기를 맞닥뜨린다.

아마 첫 위기는 바로 아버지 오사무와 아들 쇼타가 딸이 될 유리를 집에 데려오면서 시작된다. 그들의 의도가 어떡했던지 그것은 유괴였고, 세상도 그렇게 바라봤다. 

그 뒤로도 오사무의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경제적인 타격을 받게 되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노부요도 세탁 공장에서 정리해고를 당한다. 그리고 할머니 하츠에의 죽음으로 유일한 수입원인 연금도 끊기게 된다. 그들은 그 연금을 하츠에의 죽음을 신고하지 않고 그들의 집에 매장한다. 계속해서 연금을 타기 위해서다.

마지막으로 아들 쇼타가 절도를 하다 사고로 다리를 다쳐 병원에 입원하게 되면서 <어느 가족>은 해체된다.


이렇게 객관적으로 이들이 만들어낸 사고를 보면서 처음엔 도대체 왜 저러나... 싶은 생각을 하다가 종국엔 <어느 가족>의 해체를 보면서 이들을 변호하고 응원하게 된다.

이유는 단 하나다. 이들 보여준 가족의 모습에서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찾았기 때문이다.



2. 마지막 고백



<어느 가족>은 결국 해체되지만 그들의 남긴 대사는 마음에 깊게 잠긴다.


어느 날 아키는 오사무에게 묻는다.

"언니랑은 도대체 언제 해?"

"우리는 그런 걸로 이어져있지 않아. 마음으로 이어져 있지."



가족이 바닷가로 여행을 간 날, 할머니 하츠에는 자신의 마지막을 예감한 듯이 멀리 가족들을 바라보면 조용히 혼잣말을 한다.

"다들, 고마웠어."


유리의 유괴에 대한 죄를 혼자 감당하며 감옥에 가게 된 노부요와 그를 조사하는 검사의 대화에서,

"낳았다고 모두 엄마가 되는 거냐..?"

"그래도 낳아야 엄마가 된다."



결국, 가족은 해체되고 쇼타는 시설에서 생활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를 보러 간 아버지 오사무와 시간을 보내고 헤어지는 버스 안에서 쇼타는 오사무에게는 들리지 않았겠지만 혼자 작게 속삭인다.

"아빠..."



04. 필자의 감상_지금, 우리의 가족은?



영화 <어느 가족>의 마지막 장면.

다시 원래 가족에게 돌아간 유리는 다시 혼자 남겨진다. 사회는 유리를 가짜 가족에게서 다시 진짜 가족으로 돌려보냈지만, 유리에겐 그 반대였던 것이다. 진짜를 빼앗기고 다시 원치 않았던 가짜로 돌아가게 된 상황.

이 한 장명이 영화 <어느 가족>의 모들 보여주는 것 같다. 

우리가 가짜라고 주장했던 것은 결국 진짜였고, 진짜라 강요하며 억지로 끌고 왔던 건 결국 가짜였다고.


"고레에다 히로카즈"감독의 새로운 시도가 돋보인 영화였다.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서 진정한 가족이란 것은 형태의 겉모습이 아니라 그 안을 채우고 있는 내용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지금 우리 사회에의 가족에 무엇이 결핍되어 있는지를 무겁게 질문한다.




가르치고, 여행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글을 씁니다. 
저서로는 “첫날은 무사했어요” 와 “버텨요, 청춘”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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