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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전호 Oct 25. 2018

아버지와 이토씨

언젠간 부르지 못할 이름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원고에 쓰인 이미지의 출처는 "다음 영화"입니다.)





필자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일본 영화에는 크게 세 부류가 있다.

물론 필자가 개인적으로 취사선택한 부류의 영화들 외에도 일본은 문화 강국답게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매해 꾸준히 생산해 내고 있긴 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끌리는 종류의 영화는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건 취향의 문제니까.


우선 그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부류인 가족영화이다. 느리지만 확실하게 삶에 켜켜이 쌓여가는 가족들 사이의 소소한 일상들을 담아내고는 그 저변의 진한 감동을 주는 그런 영화들. 영화를 보는 동안은 '아니 이런 이야기도 영화가 될 수 있나?'라는 심술 섞인 반문이 든다 할지라도 얼마간 시간이 지난 후 그 영화의 무언가가 생활 곳곳에 녹아서 불쑥불쑥 튀어나와 감동을 주곤 한다. 

나열해보자면 <바닷마을 다이어리>, <걸어도 걸어도>, <태풍이 지나가고>,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등이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판타지적 요소가 가미된(예를 들자면 타임슬립 등) 영화들이다. 가끔은 어떻게 저렇게 신박한 생각을 해냈을까? 할 정도로 놀라기도 한다.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나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 <양지의 그녀>등. 사실 이점은 부럽기도 하다. 어찌 보면 일본과 우리나라는 상당히 비슷한 문화권인 것 같은데도 이들의 상상력은 가히 놀랍다. 개인적으로는 독서를 많이 하는 국민성의 결과물이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마지막으로는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신카이 마코토"등으로 대변되는 애니메이션 영화들 까지. <하울의 움직이는 성>, <너의 이름은>등. 예전엔 애니메이션 영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여전히 디즈니나 픽사의 애니메이션은 선호하지 않는다) "신카이 마코토"감독의 <초속 5센티미터>를 보고 난 후 그 매력에 빠져 많은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를 찾아보고 팬이 되었다.



위 세 부류의 영화를 왜 좋아하느냐 묻는다면 그 이유를 장황하고 거창하고 화려하게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엔 끝이 없을 것 같다. 

대신 오늘은 굉장히 잘 만들어진 가족영화, "나카자와 히나코"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아버지와 이토씨>를 소개하면서 그 이유를 살짝이나마 설명해 보려 한다.




01. 가족이라는 존재_서로에게 이어진 끈


다시 한번 말하지만 영화 <아버지와 이토씨>는 굉장히 잘 만들어진 가족 영화이다. 이미 호평을 받은 소설을 원작으로 했기 때문에(그것도 별다른 각색 없이) 별다른 리스크도 없었고, 소설 속의 인물들과 그들을 연기한 실제 배우들의 이미지적 싱크로율도 굉장히 높다. 게다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노다메 칸타빌레>, <뷰티 인사이드>의 "우에노 주리"와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의 "릴리 프랭키"가 나온다. 

각본에서부터 캐스팅까지 이 정도 조건이면 사실 실패하긴 힘든 영화이지 않을까?


영화는 특별히 자극적인 스토리(물론 소재가 독특하긴 하지만) 없이도 가족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지, 드러나지 않더라도 그들이 엮어내고 있는 끈이 얼마나 단단하고 따듯한지를 책 속의 지면에서도, 영화의 스크린에서도 잘 표현해 냈다. 

무언가 심심해보이는듯 한 소소한 소재를 지루함 없이 알차게 엮어내려 갈 수 있었던 것은 여성 작가인 "나카자와 하나코"의 작품을 여성 감독인 "타나다 유키"가 풀어낸 여성 특유의 섬세한 관찰력과 표현력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1. 세 부류의 이질적인 인물들



영화는 크게 세 명의 인물이 이끌어간다. 그리고 세 인물은 서로 스무 살씩 차이가 난다. 한 시대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서로 다른 세 세대가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묶어놓은 것이다.

프리터로 일하는, 이제는 아버지의 품을 벗어난 독립적인 딸 아야는 서른넷.

그녀의 기묘한 동거남인 초등학교 급식도우미 이토씨는 쉰넷.

그리고 어느 날 불쑥 이들의 집에 찾아와 살게 된 폭탄 같은(아야의 말에 의하면) 불청객 동거인 아버지는 일흔넷.


당연히 작가의 설정이었겠지만 필자는 영화를 보면서 이 설정에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멀리서 보면 서로가 너무 이질적이라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가 않은 사람들을 한 장소에 억지로 끄러 모아 두고는 그들이 얼마나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풀어낼지 지켜보는 관찰자의 느낌이랄까.


사실, 서로 비슷한 인물들이 그들에게 던져진 상황에 비슷한 메커니즘으로 대응해나간다면 보기는 편하다 할지라도 큰 재미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 <아버지와 이토씨>는 세 명의 인물이 나이도 세대도 성격도 다르기 때문에 똑같은 상황에 다르게 반응하고, 그 상이한 반응들이 처음엔 갈등을 만들어내지만 그 갈등을 봉합하고 치유해가는 과정을 보는 재미가 있다. 확실히 관객의 관심과 호기심을 자극할만한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2. 삐걱거리는 아버지와 딸



영화의 시작은 아야의 아버지가 불쑥, 정말 말 그대로 불쑥 아야와 이토씨가 동거 중인 낡은 아파트의 불청객으로 눌러앉으며 시작된다. 그전까지만 해도 아야와 이토씨가 동거 중인 이 공간은 상황 자체는 매우 기묘했지만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있었다. 아마도 이토씨의 능력일 것이다. 어느 것 하나 튀지 않고 주변의 모든 것들과 티 나지 않게 어울릴 수 있는 이토씨의 묘한 능력. 

아야와 이토의 만남은 편의점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 아르바이트생에서 시작되었다. 둘은 몇 번의 술자리 후 키스를 하고, 잠자리를 하고, 동거에 이르게 된다. 건조하게 이 객관적인 일종의 현상은(그러니까 그들의 동거는) 매우 부자연스럽고 억지스럽게 짜 놓은 각본 같겠지만 영화 속 이들의 케미는 그 의구심을 지울 만큼 자연스럽다. 그러니까 도무지 스무 살의 나이차가 전혀 어색하지 않는단 말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아야와 이토씨는 공관과 시간을 공유하면서 서로의 세계관과 세상이 하나로 겹친 것이다. 자신의 본질적인 것은 지킨 채 공유할 수 있는 것을 기꺼이 공유하는 것. 그러니 이들 사이엔 갈등도 없고 서로가 서로에게 공기처럼 절대적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풍경처럼 불협화음이 없었다. 그런데 이 평화롭고 자연스러운 풍경에 아버지라는 불청객이 동의를 구하지도 않고 등장해버린 것이다. 덜컥.



결국 당연하다는 듯 아야와 아버지는 사사건건 부딪힌다. 아버지에겐(더군다나 초등학교 교사로 정년퇴임을 한 선생님인) 딸인 아야의 모든 것이 불만이자 잔소리 거리다. 거기에 아버지의 가장 큰 잔소리 거리는 아야의 동거남, 자신보단 고작 스무 살 어리고 딸인 아야보단 무려 스무 살이나 많은 쉰넷의 이토씨. 하지만 이제 어엿한 성인인 서른넷의 아야는 어린 시절과는 달리 자신의 세계관을 아버지에게 맞추려 하지 않는다. 

아버지와 아야는 물과 기름처럼 조그만 아파트 안에서 전혀 섞이지 못한다.


"감은 돈을 주고 사 먹는 것이 아니다."

"문명인이라면 우스터소스지."

"여자가 술을 너무 많이 마시는 것 아니냐?" 등등.


매우 극단적인 갈등이 영화의 처음부터 시작된다. 이미 서로 너무나 달라져 버린 아버지와 딸.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반대편의 세상에 서있는 그들은 서로 양보를 하지 않는 채 마구 부딪혀 삐걱거린다. 그리고 그 사이에 낀 이토씨 까지. 과연 이 가족이 행복할 수 있을까?



3. 아버지의 삶



영화에 등장하는 아야의 아버지를 보면서 난 나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영화에 등장하는 아야의 아버지는 이 시대,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네 아버지의 뒷모습을 닮아있지는 않을까? 가장 소중한 가족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젊음과 그것 이상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만 했던, 뼈를 깍듯 그 시간들이 힘들었지만 그것으로 스스로 충분히 행복했던 우리의 아버지. 하지만 품을 떠난 자식이 더 이상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을 때의 절망감. 지키고자 했던 가족의 모습이 점점 희미해지는 것을 지켜봐 했던 공허함. 그리고 자꾸만 작아지는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확인해만 하는 좌절감. 그 모든 것을 홀로 초라한 등에 짊어지고는 지키고자 했던 가족으로부터 멀어져야만 하는 아픔까지.



아야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는 아들 내외와 함께 살게 된다. 사실 그들의 동거는 아버지의 의지라기보다는 아들의 아내인 며느리의 의지였다. 이젠 혼자기 되버런, 지병을 가지고 계신 시아버지를 홀로 살게 할 수 없다는 착한 며느리로서의 책임감.

하지만 그들의 동거는 서로를 점점 지치게 만든다. 쌍둥이 손자를 교육시키는 방법에서부터 시작해서 아버지는 며느리의 하나하나가 못마땅하고 며느리 역시 그런 시아버지에게 트라우마가 생긴다. 급기야 며느리는 심리적으로 우울증까지 앓게 된다. 

어쩌면 아버지는 아들의 가정에서도 자신이 생각하고 꾸려왔고 맞다고 생각했던 가정의 모습을 원했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부딪히자 서로가 서로를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영화 속, 아야의 아버지가 그랬다. "저녁은 함께 먹는 것이다." 추측해보면 아마도 자신이 주장했던 이 말의 힘이 떨어지자 스스로 아들의 집을 나오진 않았을까.



02. 가족은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영화 <아버지와 이토씨>는 그렇게 무너졌던 가족이 삐걱거리긴 하지만 다시 회복되어 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동안 우라네가 간과하고 있었던 눈이 보이진 않지만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묶어준 강한 유대가 무엇인지 깨닫게 해 준다.


1. 가족의 참된 의미_시간과 공간의 공유



영화 <아버지와 이토씨>는 가족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천천히 이야기해주고 있다. 

영화에서 설명하고 또 관객에게 전하고자 하는 가족의 참된 의미는 아버지의 주장만이 반영된 것도 아니고, 아버지의 방식을 인정하지 않는 아야만의 주장이 반영된 것도 아니다. 

자신이 맞다고 주장했던 것들을 다시 한번 돌아보고 상대방의 주장을 이해하려는 태도. 그것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아버지와 아야는 그 과정에서 이토씨의 도움으로 하나씩 하나씩 서로를 이해하고 참된 가족의 의미를 되찾아가고 있다.

서로의 삶을 이해하는 것. 이해해보려 노력하는 것. 그것이 해답이라는 것을 이토씨는 넌지시 알려주고 있다.



2. 서로를 알아가려는 노력



처음, 아야가 아버지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계기는 사실 조금은 불순했다. 아버지의 며느리, 그러니까 자신의 새언니를 만난 뒤 아야는 새언니가 아버지를 본 후 보이는 반응(그녀는 아버지를 보자 오바이트를 한다)을 보고는 아버지보단 새언니의 편에 서서 아버지를 의심한다. 그 의심은 아버지가 성범죄에 관련 있을지도 모른다는 황당한 상상력을 펼쳐나가고 아버지를 미행해보기로 결심한다.


아야는 평상시 관심이 없었던 아버지의 하루를 미행한다. 

그 하루 동안 아야는 자신이 미처 알지 못했던 아니, 관심이 없었던 아버지의 하루를 발견하게 된다. 아버지의 하루는 생각보다 초라했고 외로웠다.

동네를 걷고, 편의점 도시락을 먹고, 노인들이 많이 모이는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마트를 구경하고, 해 질 녘 녘 하루를 마감하는 초등학교의 모습을 벤치에 앉아 하염없이 바라본다. 아버지의 하루엔 대화가 없었다. 그 누구도 아버지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관심을 가져주질 않았다.


아야의 기억 속 모든 것을 할 수 있었고, 할 줄 알았던 젊은 시절의 아버지의 모습은 이제 이미 사라져 버린 것이다. 아야는 그날 하루 무언가를 깨닫게 된다. 자신은 아버지를 잘 알지 못한다는 것. 아버지를 알려 노력하지 않았다는 것.


3. 아버지에게 소중한 것



사실 영화의 처음부터 중반까지 대부분의 관객들에게 아야의 아버지는 괴팍한 노인에 불과할 것이다. 고집불통에 잔소리꾼. 구식에다 취향 독특(도대체 우스터소스라니). 하지만 필자는 영화의 중반 이후 아야의 아버지가 자꾸만 가여워지기 시작했다. 가장 강해 보였던 인물이 약해 보였고 초라해 보였다.


영화 속 아버지는 자신의 품을 벗어나버린 자식들을 봐야만 했고, 자꾸만 약해지는 육체와 이제 더 이상 자신을 환영하는 곳은 없다는 비정한 현실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그런 아버지에 가장 소중했던 것은 가족이었다. 비록 표현엔 서툴러도 끔찍이 사랑하는 가족과 시간과 공간을 함께 공유하는 것. 그것이 아버지의 가장 소중한 것이었다.


"저녁은 함께 먹는 것이다."라고 말했던 아버지. 그 말은 나는 너희들과 함께 있고 싶다는 말이었을지도.



4. 풀리지 않는 의문



사실 필자에겐 영화 <아버지와 이토씨>를 보는 내내 풀리지 않는 하나의 의문점이 있었다. 

바로 아버지가 끔찍이 여기던, 그 누구도 만지지도 열어보지도 못하게 했던 상자 하나. 과연 그 상자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으며 또 왜 아버지는 그것을 그리도 소중하게 생각했는지 말이다.

아마 영화 속 아야도 필자와 비슷한 궁금증을 가졌던 것 같다. 아버지 몰래 그것을 열어보려 했었다. 하지만 가족이라도 지켜야 할 것이 있다는 이토씨의 말과,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오빠의 말에 포기하고 만다.


영화의 끝자락에서 밝혀지는 아버지가 소중히 여기던 상자의 비밀은 아버지의 도벽과도 관련이 있었다. 사실 아버지는 동네 슈퍼나 마트에서 포크나 숟가락들을 상습적으로 훔치곤 했었다. 아버지도 자신이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고 하고 경찰이나 가게의 주인들도 노인의 치매 정도로 여기고 훈방조치를 하긴 하지만 우리는 왜 아버지가 하필 숟가락을 훔쳤었는지에 대해서 궁금증을 가질 수밖에 없다.

왜 숟가락이었을까. 그리고 아버지는 정말 치매였던 걸까.

사실 영화에서는 이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알려주진 않는다. 그것이 너무나 궁금했던 필자는 영화를 본 후 원작 소설까지 찾아 읽어봤지만 소설에서도 역시 명확한 답을 알려주진 않는다.



혹자는 "잠시 다녀오겠다는" 아버지의 메모의 삐뚤삐뚤한 글씨체를 보고는 치매의 초기 증상이라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이건 버스에서 행패를 부리는 사람을 붙잡느라 팔을 다쳤기 때문이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영화에 등장하는 아버지의 모든 생활의 모습에도 치매 증상이 발견되진 않는다. 상습적으로 숟가락을 훔친 것 말고는.

그렇다면 정말 아버지의 해명처럼 아버지는 자신도 모르게 숟가락을 훔치고 그것을 상자에 모으고 또 그 상자를 그렇게 소중하게 보관했었을까? 

정말 아버지가 치매의 증상을 가진 이유로 숟가락을 훔쳤다면, 그리고 그 이유를 스스로 기억을 못 한다면 아버지는 그 상자를 소중하게 여길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해석이야 관객 각자의 몫이겠지만 필자는 개인적으로 아버지가 치매 증상 때문에 숟가락을 훔쳤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도 아들이나 딸인 아야에게는 말하지 못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필자는 그것을 가족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에게 숟가락은 함께 저녁을 먹을 수 있는 가족을 상징했던 것이다. 지금은 그런 가족이 자신에게 없다는 생각에 악착같이 숟가락을 훔치고 모았을 것이다. 

식구를 상징해주는 그 숟가락 하나하나가 바로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였고, 이제는 아버지를 짐이라고 느끼는 아들과 딸이었겠지. 그래서 그토록 붙들고 놓지 못했을 것이다.


실제 영화의 마지막 즈음, 아버지는 불이 나버린 집에 숟가락이 보관되어있는 상자를 찾으러 뛰어들었을 정도니 얼마나 끔찍하게 여겼는지를 직감할 수 있다. 그리고 잿더미가 돼버린 집의 잔해 속에서 아야는 숟가락 하나를 발견하고 그것을 간직하게 된다. 이 장면은 아마도 아야 스스로 잊고 있었던 가족 그리고 아버지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상징적인 장면일 것이다.



03. 한 명의 관객_이토씨



영화 <아버지와 이토씨>에서 가장 독특한 인물 한 명을 꼽으라고 하면 필자는 단연 이토씨를 선택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토씨와 같은 캐릭터는 뭐랄까, 굉장히 신박하다.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것 같고, 쉬워 보이지만 어려운 것 같기도 하고. 불필요해 보이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엔 절실히 필요하고.

학창 시절 문학시간에 배웠던 "3인칭 관찰자 시첨"에 등장하는 3인칭이 바로 이토씨라고 볼 수 있다. 쉽게 말해서 이토씨라는 인물은 영화 안에 등장하는 한 명의 관객인 것이다. 관여하지 않고 관망하는 듯 한.


이토씨는 영화에서 가장 큰 갈등을 겪어나가는 아버지와 아야 사이에 낀 인물이다. 관계만으로 따지면야 아버지보다는 아야의 편에 서는 게 맞겠지만 이토씨는 묘하게 객관적이다. 게다가 아야의 표현에 따르면 자신보다 더 아버지를 잘 맞춰준다고 한다. 수더분하단 표현이 적당할까? 아니면 상황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 있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묘한 인물이다.


또 특징이 하나 있다면 이토씨는 소극적은 관찰자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이 나서야 할 때와 빠져야 할 때를 확실히 구분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해낸다. 하지만 그것이 과하거나 오버스럽지가 않다.



아야와 아버지가 자신들이 껴안고 있는 문제를 직면할 수 있도록, 덮어두고 피하려고만 했던 아야와 아야의 오빠를 더 이상 피하지 말고 바라보라고 부드럽게 안내해주기도 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은 한 발자국 빠져서 아야에게도, 오빠에게도 아버지를 되찾을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친절한 안내자이자 관찰자인 이토씨는 그렇게 영화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한 명의 관객인 것이다.



04. 영화의 책의 간극



필자는 영화를 먼저 보고 그다음 책을 읽었다. 

사실 이유는 간단했다. 아버지가 훔친 숟가락의 비밀을 알기 위해서. 하지만 그 비밀의 정확한 정답은 책에서도 제시되어 있지 않았다. 대신 책은 조금은 더 친절했다. 이 부분은 어쩔 수 없는 영화의 한계일 것이다. 모름지기 책이란 것은 영화처럼 시간의 제약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상상력이란 부분도 영화는 모든 걸 다 영상에 담아내야 하지만 책은 독자의 상상력을 빌려오면 되니까.


책 <아버지와 이토씨>가 영화 <아버지이와 이토씨>보다 더 친절하게 느껴진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로 영화에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았던 아야의 어머니에 대하여 설명되는 부분이 많다는 것이다. 역시나 감독의 선택이었겠지만 영화에서는 아야의 어머니에 대해선 많은 언급이 없다. 하지만 실제로 책에서는 어머니애 대한 추억들이 언급되면서 아버지의 옛 고향집으로의 떠난 가족 여행 이야기가 나온다. 이 고향집은 후에 아버지가 홀로 떠난 곳이기 때문에 스토리의 자연스러운 진행을 위해 중요한 부분일 수 있다.


두 번째로는 영화에서는 등장하지 않은 인물인 아야의 서점 동료인 "간마니와" 이다.  책 속에 등장한 간마니와씨는 평범한 가정주부이자 아야가 편하게 속 이야기를 할 수 있는(이토씨를 제외하고) 중요한 인물이다. 책에서 간마니와씨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는데 그 지점에서 아야는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기회를 갖게 된다.


위의 두 부분이 영화 속에 빠져있다 하더라도 큰 문제는 아니지만 포함되어 있었다면 영화의 내용과 주제를 이해하는데 조금 더 도움이 되진 않았을까? 




05. 필자의 감상_언젠간 부르지 못할 이름



영화 <아버지와 이토씨>의 마지막 장면.

홀로 떠나가는 아버지와 그를 붙잡지 못하면 망설이고 있는 아야에게 이토씨는 이렇게 말을 한다.

"나는 도망가지 않아."

그리고 아야는 아버지를 향해 힘차게 달려간다.


소중한것은 도망가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그 소중함을 모른 채 할 뿐. 가족이란 존재가 그렇지 않을까? 어딘가 가지 않고, 흔들리지 않고, 뿌리 깊은 나무처럼 항상 그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 그렇기 때문에 정작 소중함을 인정받지 못하는 조금은 외로운 존재.


"아버지"라는 이름은 언젠간 부르지 못할 이름이다. 

누구에게나 있지만 누구에게나 영원할 수 없는 그 이름의 소중함을 그리고 내 옆에 도망가지 않고 머물러주는 사람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영화였다.




가르치고, 여행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글을 씁니다. 
저서로는 “첫날은 무사했어요” 와 “버텨요, 청춘”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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