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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전호 Oct 27. 2019

므앙씽 이스 낫씽

마음을 이어가는 여행

큰 결심을 하고, 어떤 것들은 포기하고, 게다가 당신에게 등을 보이고 돌아섰는데, 떠나온 곳에서 조차 결국 아무것도 잡지 못하고 어떤 것도 마음에 담아 둘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런 날은 하염없이 걸어보기도 하고 게걸스럽게 닥치는 대로 먹기도 해 본다. 때론 조증에 걸린 사람처럼 웃으며 하루를 보내기도 한다. 그렇다고 무언가 해결될 거란 기대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몸에든 마음에든 속에 것을 다 쏟아내고 나면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지는 않을까 하는, 스스로가 만들어낸 억지 믿음이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도무지 견딜수 없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아침부터 부지런을 떨었다. 

사실 부지런이랄 것도 없다. 그냥 아침에 일어난 뒤 다시 잠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침대로 돌아가지 않은 것뿐. 고작 그것 하나에도 스스로 뿌듯할 만큼 며칠간 뭔가 엉망이었다. 긴 여행의 끝 무렵 이기도 하고, 아프리카와 중동과 인도와 네팔의 모든 것으로부터 너무 치열하게 무언가를 쏟아부으며 여행을 해왔던 나에게 조금만 걸어도 편의점을 발견할 수 있는 태국은 편안함과 동시에 게으름을 선사해줬다.

결국 한 달 전쯤 도착한 태국에서 내가 한 것이라곤 꼬창에 가서 젬베를 산 것. 그리고 기다란 태국의 북쪽 어딘가 쯤에 있는 빠이까지 꾸역꾸역 올라온 것. 이것이 전부다. 물론 그간 수 십 그릇의 파타이와 카오 쏘이 등을 먹었고 몇 번의 타이마사지를 받았지만 말이다. 그래도 나의 여행이 고작 파타이와 카오 쏘이 그리고 마사지로 대변되기엔 너무 빈약하기에 스스로 불만이 가득했다. 

정작 스스로는 아무 노력도 하지 않은 채 말이다.


일단 태국을 벗어나기로 했다.

빠이에 있는 내내 나는 약간 몽롱한 상태였다. 거리의 축 처진 개들의 헐떡거리는 혓바닥이 나에게 최면을 거는 것 같았고, 이곳저곳 뚫려있는 길들은 미로처럼 혼란스럽게 날 가둬두려 했다. 그래서 이곳에 있으면 영영 이곳에만 있게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라오스를 가기로 했다. 앞으로 여행을 계속하려면 태국을 벗어나야 할 것 같았고 그러기엔 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라오스가 제격이었으니까.

물론 라오스로 간다고 해서 그곳의 어디로 가야 할지는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국경을 넘으면 어딘가 목적지가 생기겠지. 더 이상 빠이의 거리에서 방향 없이 표류하는 건 여행이 아니니까.

스스로에 대한 굳은 결단으로 난 지체 없이 라오스행 버스 티켓을 끊었고, 저녁에 먹은 파타이가 채 소화도 되기 전에 여행자를 실어 나르는 미니버스는 나를 태우고 라오스로 향했다.



장소가 바뀌면 간사하게도 사람은 언젠가 한 번 배반당했던 기대를 다시금 시간과 공간의 맨 앞으로 끌어다 놓는다. 사실은 품었던 기대가 나에게 등을 보인 것이 아니다. 내가 그것들에 등을 보이며 도망친 것이었겠지. 하지만 그걸 인정하기 싫은 것이다. 

한결같은 사람이고 싶었는데. 적어도 그렇게 살아보고자 지금까지 버둥거렸는데. 그것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내가 못나고 한심해서 괜히 장소에게 짜증을 냈던 것이다.

산을 빙 두르며 나있는 도로는 구불구불했다. 그 안에서 여행자들은 각자의 사투를 벌이고 있다. 내 옆의 프랑스 남자는 아까부터 표정이 좋지 않았다. 직감적으로 난‘이 녀석 위험하다’라는 생각을 했다. 상당히 적중률이 높은 내 직감처럼 프랑스 남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저녁에 먹은 모든 것을 게워냈다. 연속해서 이어지는 구불구불한 내리막 길을 버티지 못했던 것이다. 80%는 버스의 바닥에, 20%는 옆 자리의 나에게 말이다. 프랑스 남자도 나처럼 저녁에 파타이를 먹었나 보다. 역시 태국 음식은 파타이가 최고지, 라는 생각도 잠시. 젠장. 페브리즈를 백만 번 뿌려도 사리지지 않을 것 같은 냄새가 내 몸에서 나기 시작했다. 버스 안은 카오스였다. 버스 기사는 급하게 버스를 길 가 어딘가에 세웠고 여행자들은 스프링처럼 버스 안에서 튀어나왔다. 뭘 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있던 사람은 이 사건의 피해자인 나와 가해자인 프랑스 남자뿐이었다. 정신을 차린 나는 일단 가방에서 생수를 꺼내 프랑스 남자의 입을 헹궈주고 내 웃옷을 벗어서 물로 헹궜다. 버스기사는 이런 일이 종종 있다는 듯 능숙하게 뒤처리를 했고 우리는 다시 목적지를 향해 출발했다. 

프랑스 남자는 나에게 무척이나 미안해했고,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고, 

나에게선 미처 소화되지 못한 비릿한 파타이 냄새가 났다.



몇 번인가 휴게소엘 들리고, 또 몇 번인가 멈췄다 섰다를 반복한 버스는 국경마을의 한 숙소에 우리를 던져 놓았다. 시간은 새벽 3시였고 국경 사무소가 문을 열려면 4시간쯤 남았다고 했다. 버스가 내려준 숙소의 주인은 우리에게 100바트씩만 내면 국경이 열리는 시간까지 숙소의 빈약한 방에서 쪽잠을 재워주겠다 제안한다. 덩치가 족히 나의 두 배는 돼 보이던 독일 여행자 3명은 돈을 내고 잠깐의 잠을 청하러 갔으며, 두 명의 일본 여행자는 의심의 눈초리를 내려놓지 않은 채 정중히 제안을 거절하곤 숙소 테라스의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피곤하긴 하지만 4시간 정도야 자지 않고 버틸 수 있다는 생각인가 보다. 프랑스 남자는 이미 잠을 잘 수 있는 몸 상태는 아니었고, 난 잠을 자는 것보다 샤워가 하고 싶었기 때문에 숙소의 화장실에서 어설프게 샤워를 했다. 그리고 프랑스 남자의 상태를 살펴봤다. 그는 몇 번인가 더 속에 있는 것을 게워내더니 이내 지쳐 의자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나는 지쳐 쓰러진 그를 보며 여행하기에 참 힘든 몸뚱이를 가지고 있구나, 생각했다. 그럼에도 자기 나라로부터 수 천 키로는 떨어져 있는 먼 아시아 땅에 와서 고생스럽긴 하지만 치열하게 뭔가를 하고 있는 그가 내심 부럽기도 했다. 


난 도대체 이곳에서 뭘 하고 있을까? 

호기롭게 떠나온 여행은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닌 채 길 위에 시간을 허비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렇게 지낼 거면 차라리 한국에 있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적당한 열심으로 돈을 벌고 가족들이나 옆에 있는 친구들에게 멀리 타국에서 보낸 엽서나 너무 나 자주 끊겨서 온전한 대화를 하기 힘든 인터넷 전화가 아닌, 직접 얼굴을 보여주고 목소리를 들려줄 수 있었을 텐데. 도대체 뭘 위해서 난 이 여행을 계속해서 이어가고 있는 것일까? 평생 이렇게 한 곳에도 정착하지 못한 채 삶의 변두리를 맴돌며 살 것인가? 


갑자기 예전에 누군가 내게 했던 말이 생각났다. 

“넌 평생 옆에 있는 사람을 외롭게 할 거야.”

누군가의 말처럼 난 정말 누군가를 외롭게 만드는 사람일까? 하지만 반대로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이 외로움은 무엇 때문일까? 누구로 인함일까? 정답을 찾을 수 없었다. 감사하게 내가 어떤 생각을 얼마나 심각하게 하고 있건 시간은 흘러갔고 어느덧 7시가 되었다. 우리는 라오스 국경으로 넘어가기 위해 작은 보트를 타야 했다. 잠을 자고 온 3명의 독일 여행자도, 테이블에 있던 2명의 일본 여행자도, 조금은 표정이 밝아진 프랑스 남자도, 고민 투성이던 나도, 어쨌든 이제 라오스로 가는 것이다. 비는 어느새 멈췄고, 이제 내 옷에서 태국의 파타이 냄새도 나지 않았다.



빈약한 국경을 넘고는 적당한 달러와 라오스 비자를 교환했다. 내 여권 위엔 라오스의 입국 스탬프가 찍혔다. 앞으로 나의 라오스 여행을 허락하는 도장. 이미 내 여권 위엔 수많은 나라의 비자와 스탬프들이 찍혀있다. 그 순간들은 분명 긴장되고 설레었을 텐데. 어쩌면 이제는 의미 없이 나의 여권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을 뿐. 하지만 그것들을 그렇게 무의미하게 만든 건 어쩌면 나일지도 모르겠다. 

열아홉 살, 처음 배낭여행을 시작했을 때 내가 품었던 여행에 대한 마음을 도무지 난 지금 가질 수 없으니 말이다.


국경에서 어느 버스를 타야 할지 망설이던 나는 결국 여행자들이 아무도 타지 않은 버스에 힘없이 올라탔다. 다른 여행자와 같은 버스를 타게 되면 그 여행자의 목적지를 가게 될 것 같아서였다. 그러면 결국 난 그곳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 같았으니까.

내가 탄 버스는 므앙씽으로 향하는 버스였다. 중국과의 국경이 있는, 그래서 심심치 않게 중국 사람들을 볼 수 있으며 썩 괜찮은 중국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곳.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눈에 들어온 가장 가까운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풀었다. 숙소 아주머니는 영어를 전혀 하지 못하신다. 그도 그럴 것이 므앙씽은 분명 여행자들이 많이 오는 곳은 아니다. 인도 바라나시에서 수일을 함께 지낸 슈미르는 나에게“므앙씽 이스 낫씽”이라고 말을 했고, 난 그래도 어떻게 낫씽인 마을이 있을 수 있냐며 내가 라오스에 가게 되면 꼭 확인해보겠다고 했었다. 인도에서 슈미르와 나눈 가벼운 대화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나는 결국 라오스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므앙씽을 찾은 것이다.


방은 침대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화장실의 물은 몇 방울이 떨어지는지 셀 수 있을 정도로 빈약하게 졸졸 흘러내렸다. 이곳에선 정말 잠만 자야겠구나,라고 생각했다. 산책이라도 할 겸 밖으로 나가려 하는데 숙소 아주머니가 나를 붙잡더니 뭔가를 이야기하신다.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라오스 말과 손짓, 발짓까지 더해서. 마음을 집중해서 들어보니 아마 나에게 밥을 먹고 나가라고 하시는 것 같았다. 분명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이동했을 테니까. 그러더니 나를 반강제로 식탁에 앉히시더니 부엌으로 사라지셨다. 정말로 나를 걱정해주시는 건지 아니면 오랜만에 온 손님에게 장사를 하려는 마음인지 헷갈리고 있을 무렵 아주머니는 정말 싼 가격에 근사하게 차려진 한 끼 식사를 내어오셨고, 그제야 날 걱정해주시던 아주머니의 진심을 느꼈다. 초라했던 내 행색을 보니 퍽이나 걱정스러웠나 보다. 

오랜만에 먹는 참 따듯하고 맛있는 밥이었다.



후로 난 므앙씽에서 수일을 보냈다. 어쩌면 슈미르의 말처럼 므앙씽은 낫씽인 마을일지도 모른다. 여행자들은 찾아보기 힘들고 마을은 느린 나의 걸음으로도 20분 정도면 모든 곳을 다 둘러볼 수 있을 정도로 작다. 그냥 라오스 사람들의 그들의 삶을 평범하게 살아내고 있는 마을이다. 그러니 뭔가를 바라고 오는 여행자들에게는 낫씽일 수밖에. 

하지만 나에게 므앙씽은 숙소 아주머니의 따듯한 밥 한 그릇이다. 매일 같은 길을 오가던 나에게 순수하게 웃어주던 순박한 라오스 사람들의 미소다. 마을의 유일한 외국인이라며 자신의 딸의 결혼잔치에 초대해준 아저씨의 고마움이다. 그렇게 므앙씽은 이번 여행에서 오랜만에 만난 낫씽이 아닌 마을이었다. 이런 낫씽이 아닌 마을에서 따듯한 사람들과의 만남으로 내 여행들을 채워간다면 나는 어쩌면 내 여행의 목적을 찾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내 여행이 결국 낫씽이 아닐 수도 있다는 기대도 덤으로.


무엇에든지 기다림은 결국 정답을 가져다준다는 걸 나는 길 위에서 배워나갔다. 기다림의 시간이 혹독할수록 그 정답은 더 명확하다는 것도 이제는 알 것 같다. 조용히 눈을 감고 시간을 흘려보낸다. 그리고 그것에서 부지런을 놓지 않기로 한다. 부지런한 기다림만이 나를 좀 더 잘 살게 해 줄 것이라는 희망을 품는다.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하늘을 올려다본다. 숨을 세 번쯤 크게 내쉬고, 미안한 것들에 사과를 건네고, 놓았던 것들을 다시 잡는다.

내 여행에도 조금씩 향이 배어 나온다.

그러면 그걸로 충분하다.

생각해보면 여행이라는 설렘도 작은 따듯한 마음들이 엉겨 만들어낸 하나의 진한 향일 테니까.



가르치고, 여행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글을 씁니다. 저서로는 “첫날은 무사했어요” 와 “버텨요, 청춘”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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