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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전호 Nov 03. 2019

내가 가져보지 못한 이야기

공항에서 짐을 부치면서 항공사 직원에게 가능하면 비행기의 앞자리 좌석을 달라고 부탁했다. 어디에선가 비행기에서 다리를 가장 길게 뻗을 수 있는 자리는 제일 앞좌석과 비상문이 있는 좌석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었다. 비상시 무언가를 긴급하게 해내야만 하는 비상문 좌석에 앉는 건 아무래도 조금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앞 좌석을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멕시코까지의 비행은 열 시간이 훌쩍 넘는 긴 비행이었다. 나는 되도록이면 편하게 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제는 비행기에서 보내는 시간이 예전처럼 설렘으로만 뒤덮인 시간은 아니다. 조금은 힘이 든다. 그래도 아직까진 여행이 힘든 것은 아니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운이 좋았던 건지 아니면 연결편의 시간이 넉넉하게 남아 있어서 그랬는지 나는 앞자리 좌석을 얻을 수 있었다. 티켓을 건네주면서 방긋 웃는 항공사 직원의 미소에 내가 괜한 욕심을 부렸나 얼굴이 붉어졌다. 그래도 조금이나마 다리를 뻗을 수 있는 넓은 좌석의 티켓을 손에 쥔 나는 뿌듯한 마음이 된다. 하나의 작은 성취에 도취되어 비행기를 기다리는 내내 기분이 좋기까지 했다. 탑승 게이트가 열리고도 한참을 창밖을 내다보며 늑장을 부린 나는 끝에서 몇 번째인가로 비행기에 탑승했다. 



한 줄에 열 좌석이 있는 비행기였다. 통로는 두 개. 세 좌석, 네 좌석, 다시 세 좌석으로 이루어졌다. 나는 왼 편 가장자리 창가 쪽 자리를 배정받았다.

 주어진 시간을 꾸역꾸역 채우고 그것들을 다시금 비우는 것의 반복. 그것이 내가 비행기 안에서 해야 할 일의 전부였다. 주머니에 넣어온 작은 소설책 한 권과 쿠바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담겨있는 노트북. 이것들로 긴 비행시간을 견뎌봐야지 생각했다. 


비행기가 구름을 통과하고 이내 안전벨트 신호의 불이 꺼졌다. 정신이 맑을 때 책을 읽어야지 생각하고는 주머니에서 책을 꺼냈다. 그런데 책의 첫 페이지도 넘기기 전에 옆 좌석 승객의 긴장감이 나에게 넘어왔다. 내 옆 좌석엔 나이가 지긋한 노부인과 청년이 자리하고 있었다. 창가 자리에 앉아있던 나와 통로 쪽에 앉아있던 청년 사이에 노부인이 앉아 계신 상황.

노부인은 비행이 처음이셨는지 눈에는 긴장의 빛이 흘렀고 양손으론 여전히 안전벨트를 굳건히 잡고 계셨다. 비행기의 작은 떨림에도 깜짝 놀라 하셨다. 나는 책을 펴려던 손을 접고는 잠시 그 둘을 관찰한다. 조용한 호기심으로 둘의 관계를 추측해본다. 둘 사이를 오가던 몇 가닥의 대화를 엿들어보니 둘은 나이 차이가 꽤 나는 모자관계이다. 아마 늦둥이 막내아들이 어머니를 모시고 비행기에 오른 것 같았다. 



승무원이 간단한 음료와 간식을 제공할 때 난 넌지시 청년에게 말을 건넸다. 멕시코까지 가는 거냐고. 청년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어머니를 모시고 멕시코를 향하고 있다고. 어머니와 함께 한 달 정도를 멕시코를 거쳐 중남미를 여행할 거란다. 청년과 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노부인은 그제야 조금은 긴장을 푸셨는지 나에게 연신 아들 자랑이시다. 언젠가 TV에서 멕시코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고. 옆에 있는 아들에게 저 사람들은 참 흥이 많구나. 나도 처녀 때는 저렇게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 춤을 추곤 했었는데, 라는 말을 넌지시 꺼냈었다고 한다. 그렇게 과거의 추억을 떠올리며 혼잣말인지 그리움인지를 나지막이 읊으셨는데 그걸 막내아들이 듣고 기억해서는 이렇게 덜컥 여행을 오게 된 거라고. 거기다 다리가 불편한 자신을 위해 이렇게 넓은 자리도 아들이 예약한 것이라고. 마음이 깊은 아들이 어머니의 추억을 다시 현실 앞에 데려다논 것이다.  


아마도 노부인은 다른 자리에 비해 조금은 넓은 앞좌석의 가격이 더 비쌀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았다. 당신의 아들만 한 효자가 없다고. 그런 자식에 대한 자부심이 노부인의 눈빛엔 가득했다. 노부인의 칭찬에 청년은 얼굴이 붉어지며 연신 콜라를 들이켰다. 

붉어진 얼굴로 자주 어머니를 바라보는 청년을 나는 자꾸만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고 어쩌면 너무 늦었는지도 모른 효도는 자식의 얼굴이 붉어지게 만드는구나 생각했다. 그건 미안함 일수도 있다. 그래서 청년의 늦은 효도에는 죄송한 마음이 숨어있는 걸지도 몰랐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 얼굴도 함께 붉어졌다. 



나는 부모님과 함께 여행을 가본 적이 없었다. 

여행으로 이어지려 했던 적도 몇 번인가 있었지만 결국엔 내가 도망쳤었다. 시간이 없어서라기보다는 마음이 부족했겠지. 아직까지는 혼자의 여행이 좋았고 여행 때 드러날 나의 날 모습이 두렵기도 했다. 그래서 항상 다음번이라는 말로 부모님의 눈빛에 담긴 마음을 미루었다.

멕시코까지는 긴 비행이었다. 멕시코에 도착하면 나는 다시 비행기를 갈아타고는 쿠바로 향할 것이다. 청년은 비행 내내 노부인을 애정의 눈빛으로 살폈었고, 노부인은 그것만으로 이미 여행의 목적을 이룬 듯 행복해했다. 그 옆에 빈약한 나는 다리를 쭉 뻗고도 마음은 연신 불편했다.


나는 원고에 부모님 이야기를 종종 썼었다. 차마 당신 앞에서 하지 못한 이야기를 비겁하게 글로 적어 내려간 것이다. 부모님은 분명 내 책을 읽으셨겠지만 책 속에서 풀어진 당신들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내 책은 부모님 댁의 식탁 위에 항상 바르게 놓여있었다. 그리고 나는 식탁 위에 놓인 내 책을 볼 때마다 마음이 붉어져 시선을 돌리곤 했다. 내 여행 이야기만 가득한 책. 그리고 부모님에게 전하지도 못한 마음만 부끄럽게 적혀있는 책. 

내 책은 나를 꾸짖고 있었다. 미뤄둔 마음에 대해서. 나는 옆자리 청년의 그 마음을 품었던 적이 있었던가. 아니, 마음의 작은 부분이라도 부모님을 위해 기꺼이 내어 줄 용의가 내게 있었는가 말이다. 참 못났다.



사람이 모든 걸 잘 해내며 살 순 없겠지만, 완벽에 가깝게 잘 해내고 싶은 것이 자식을 향한 부모의 마음일 것이다. 그것에 비하면 부모를 향한 자식의 마음은 보잘것없이 작다는 것을 나는 안다. 당신으로부터 받은 모든 것들을 없었던 것으로 여기며 살았던 적도 있었다. 그래서 언제나 죄송함뿐이고 후회만 가득하다. 그러나 여전히 부모님께 잘하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나는 따스하게 서로의 손을 잡은 채 곤히 잠든 모자를 몰래 바라보며 내가 미뤄두었던 언젠가가 생각보다 좀 더 가깝기를 바라본다. 내가 가지지 못했던 이야기를 지금은 바라만 보고 있지만 그것이 언젠가 내 이야기가 될 것이라는 꿈도 꿔본다. 

열 시간이 넘는 비행 내내 따듯한 남미대륙의 열기를 조금은 미리 만난 듯했다.




가르치고, 여행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글을 씁니다.
저서로는 “첫날은 무사했어요” 와 “버텨요, 청춘”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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