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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전호 Apr 15. 2021

당신의 이름이 지나간 자리에 피어난다

언젠가 먼 곳에서 당신에게 엽서를 쓴 적이 있었다. 아니, 엽서가 아니라 편지를.

짧은 엽서를 쓰려고 펜을 들었는데 쓰다 보니 그만 꽤나 긴 편지가 되어 버렸다. 길이도 길이었지만 나흘이나 걸리고도 편지를 완성하지 못하고 제자리걸음이었다. 그건 편지가 아니라 차라리 한 편의 시에 가까웠을지도. 길이기 너무나 길어져버린 시 한 편.

초라한 책상 위에 올려진 그 편지인지 시인지 헷갈리는 당신을 향한 내 마음의 글자들을 찬찬히 바라보곤 했다. 몇 번인가 다시 읽는 동안 아무래도 이건 당신에게 부치지 못하겠다 싶었다. 아마 당신에게 이걸 전해줄 날이 온다면 편지 뒤에 꽤나 긴 해설을 달아줘야 할 것이다. 그 해설을 쓰는 데 다시 곱절의 시간이 필요할 테니 이게 뭔가 싶어 헛웃음이 나왔다. 그만큼 모호했고 어수선했으며 마음을 보여주고 싶은 욕심과 숨기겠다는 얄팍함이 혼재되어 있는 암호 같았던 긴 편지.



하나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시작했던 일이 그것의 가지에 다시 가지가 돋아나 처음과 다른 마음을 만들어버린 일이 당신에게도 있었을까? 당신 앞에서 나는 자주 그런 수렁에 빠지게 된다고 말하면 당신은 믿을까. 당신과 먼 곳에서조차 난 이렇게 엉성한 모양이다.

그렇게 미로에 가까운 혼란함에 빠지게 되면 난 맥이 풀리고 만다.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다. 서있는 장소가 무의미해지고 예쁘게 포장해 조심스레 건네려 했던 마음은 끈이 풀려버린 풍선처럼 내 손을 떠나 멀리, 저 멀리 하늘로 날아가 버린다.


아마 당신이 없는 곳에서 당신에 대한 마음을 쓰려고 하니 결국 이런 사태가 벌어지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먼 곳에서 나를 무너지게 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므로 무언가를 해야 한다. 이건 비단 편지를 쓰는 일이나 마음을 전하는 일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굴곡진 여정에도 필요한 자세다. 확신이 없는 곳에 한 발자국을 내딛기 위해 우린 얼마나 안간힘인가. 두려움과 기대 사이에 연약한 마음을 굳히느라 얼마나 혼자였던가.



매일 아침이면 안개가 산등성이를 가득 덮는 이곳은 코 앞에 다가온 여름을 미루고 있다. 여름의 무더위를 피해 이곳에 온 이유도 있겠지만 난 이런 느슨함이 좋다. 계절의 틈. 어느 것도 자신의 것을 주장하긴 어려운 상태. 그런 모호함이 지금의 날 닮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 당신에게 제대로 된 편지 하나 쓰지 못하는 지금의 나도 이곳에선 그럭저럭 지낼 수 있는 것이다.


이른 아침, 떠오른 해가 산 능성이를 넘기 전, 이곳의 안개는 넓고 깊고 천천히 흐른다. 하루가 시작되었으니 어쨌든 문을 열고 나선다. 아침 여덟 시. 아침으로 먹은 국수가 아직 소화되기 전이다. 마을엔 제대로 된 식당이 없으니 머무는 숙소에서 끼니를 챙기는 것은 당연하다. 오늘은 제법 짐을 야무지게 챙겼다. 필름 카메라엔 아직 서른 두 컷의 필름이 남아있다. 이곳에 도착한 지 나흘 째니 나는 참 게으른 여행지인 것이다. 하루에 한 컷 이라니.



계단식 논이 끝없이 펼쳐진 중국 윈난 성의 원양.

마을의 좁은 길 사이사이로 밥 짓는 냄새가 난다. 방금 국수를 먹었는데도 그 냄새에 다시 배가 고파진다. 마을 입구 꼬치를 파는 노점상 아주머니도 화로의 숱에 불을 붙인다. 장사를 시작하려나 보다. 괜히 기웃거리다 그만 연기에 눈이 매워진다. 그런 내 모습에 장난스레 웃는 아주머니를 뒤로 하고 마을을 벗어난다.


오늘은 숙소 주인이 그려준 지도를 따라 걷기로 한다. 마을에서 출발해 산 능성이를 따라 이어진 다른 두 마을을 돌아오는 코스였다. 숙소 주인의 설명으로는 다섯 시간쯤 걸릴 거란다. 혹시 시간이 없거나 힘들면 마을을 하나만 돌고 오라고 지도를 그려주며 말했다. 그러면 절반쯤 시간을 줄일 수 있을 거라고. 시간은 넉넉했다. 이곳에선 계단식 논을 보거나 그곳을 걷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다. 그리고 다섯 시간은 걸릴 거란 마을들은 멀리 보이긴 했지만 고개만 들면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나는 숙소 주인의 걱정을 흘려 들었다. 산을 좋아하진 않지만 산을 잘 타는 나는 이른 시간에 트래킹을 마치고는 숙소 주인을 놀라게 해주고 싶기도 했다.



안개가 걷히지 않아 습기를 머금고 있는 길은 미끄러웠지만 그만큼 선선하기도 했다. 여행자를 찾아보기 힘든 곳이라 간간히 마주치는 건 이곳에 터를 잡고 농사를 짓는 소수민족 사람들과 그들의 재산목록 1호 일 것 같은 소들 뿐이었다. 처음엔 내리막이라 편하기도 했고 풍경도 아름다워 힘이 덜 들었다. 한 시간쯤 논과 논 사이를 걸으며 내려가자 숙소 주인이 지도에 그려준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나왔다. 대략 절반쯤 온 것이다. 이제 반대쪽 능선을 따라 내려왔던 만큼 올라가 두 곳의 마을을 지나 숙소로 돌아가면 된다. 당신에게 제대로 된 편지는 쓰지 못했지만 적어도 오늘 하루 목표는 성실히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만족감이 생겨났다.


그렇게 열심히 한 발 한 발 내딛으며 계단식 논을 올라가는데 논두렁의 좁은 길이 아래로 푹푹 꺼지기 시작한다. 길이라 생각하고 걸었는데 그 끝은 다른 길로 연결되지 않아 갔던 길을 되돌아오기를 반복. 결국 난 좁고 가파른 계단식 논과 논 사이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신발은 이미 진흑 투성이고 옷은 땀으로 흥건하다. 그때 가까운 지척에 농사를 짓고 계시던 할아버지 몇 분이 보여 냉큼 다가가 말을 걸었다. 저 멀리 보이는 마을을 가리키며 저곳을 갈려면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 눈빛과 몸짓으로 물었다. 내 손가락이 가리키던 마을을 바라보던 할아버지 한 분이 마치 내 흉내라도 내듯이 당신의 손으로 그 마을을 가리킨다. 그리고는 저곳으로 가려면 네가 가리키고 있는 저곳으로 가면 된다고 할아버지도 나에게 눈빛과 몸짓으로 말한다.

내가 걷는 길이 길이라는 말인지, 아니면 애초에 길을 없으니 길을 만들라는 말인지. 이미 내가 가지고 있는 지도는 무용지물이었다. 두 가지 선택의 앞에 놓였다. 왔던 길을 돌아갈 것인지, 아니면 눈에 보이는 저 마을을 향해 길을 만들며 걸어갈지. 일단 잠시 멈춰 선다.



여행은 본질적으로 여행자를 지치게 한다. 몸이 피곤한 건 당연하겠지만 피곤해진 몸은 마음도 상하게 한다. 잡았다고 생각한 것이 공기처럼 손에서 빠져나간다. 건넨 마음은 원래 내 것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그것만큼 돌아오지 못했을 때 속상하다. 길 위라서 더 그렇다. 말이 통하지 않아 웃어보지만 사실 나는 울고 있는 것이다. 돌아오는 웃음은 비웃음처럼 느껴진다. 못났다. 약하고 악하다.

모르겠다 싶어 넙적한 바위에 털썩 앉았다. 농사짓는 할아버지를 바라본다. 심술이 났다. 도대체 길이 어디 있다고. 할아버지는 그런 나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아슬아슬한 간격의 논 사이에서 능숙하게 잡초를 뽑아냈다. 내 눈에 다 똑같은 벼처럼 보이는데 할아버지의 손짓엔 망설임이 없다. 척척 걸어 다니며 잡초만 쓱쓱 뽑아낸다. 야위고 얇아 보이던 할아버지가 강하게 느껴진다. 사람이 살아가는 일이라는 게 이런 게 아닌가 싶다. 타인의 눈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더라도 자신에게만 보이는 것에 자신의 온 힘을 다하는 것. 그리고 그것들을 성실히 대하는 자세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할아버지 너머 보이는 마을이 더 아득하게 느껴졌다.

조용히 오늘의 일정에 마침표를 찍었다. 왔던 길을 돌아가기로 한다.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길. 커다란 나무를 지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언젠가 당신과 이곳을 함께 오고 싶다고. 그때는 목적지를 저 멀리 있는 건너편 마을이 아니라 넙적한 바위로 잡을 것이다. 당신을 그 바위에 데리고 와서는 할아버지가 잡초를 척척 쓱쓱 뽑아내는 모습을 함께 보고 싶다. 그리고는 저 위의 마을은 사실 별 거 없다고 허세를 좀 부려봐야지.



숙소로 돌아와 진흙 투성이 신발과 땀에 젖은 옷을 빨아 널었다.

안개가 가득해 해가 잘 나지 않는 이곳에서 그것들이 마르려면 한참이 걸릴 것이다. 그동안 내가 할 일이라곤 당신에게 보낼 편지를 완성하는 것뿐이다.

책상 위, 당신에게 전해 줄 편지를 다시 한번 읽어본다. 첫 줄에 선명한 당신. 나지막이 당신의 이름을 불러본다. 당신의 얼굴이 생각나고, 당신의 목소리가 들리고, 당신에게로의 마음이 선명해진다.

당신의 이름이 지나간 자리에 다시 마음은 피어나는 것이다. 이제는 편지를 완성할 수 있을 것 같다.




가르치고, 여행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글을 씁니다.
저서로는 “첫날은 무사했어요” 와 “버텨요, 청춘”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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