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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형 Nov 14. 2022

정반합으로 완성되는 역사, 헤겔 《역사철학강의》

위대한 철학 고전 30권을 1권으로 읽는 책

<위대한 철학 고전 30권을 1권으로 읽는 책>에 수록한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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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1789년, 혁명의 열기가 유럽을 휩쓸었다. 절대 왕정 체제를 타파하고 근대 사회의 문을 연 바로 그 사건,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 시작된 혁명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수많은 사람이 혁명의 정신인 자유와 평등, 박애를 외쳤고, 지식인들은 폭군의 사슬로부터 해방을 가져올 기회가 왔다며 혁명의 정신을 고취시켰다. 그리고 여기, 이 혁명의 정신에 매료되어 철학의 길에 접어든 인물이 있다. 독일 관념론의 완성자라 불리는 철학자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이 그 주인공이다.


청소년 시절 헤겔은 그리스 문학과 역사를 깊이 공부했다. 특히 그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 폴리스(Polis)를 개인과 공동체가 조화를 이룬 이상 사회로 여겼다. 이러한 관점은 이후에 그가 자신의 철학과 역사관, 국가관을 정립할 때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역사의 의미를 철학적으로 이해하는 데 집중한 헤겔은 대학교수가 되어 ‘세계사 철학’이라는 과목을 가르쳤다. 이 수업 내용은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제자들에 의해 《역사철학강의》라는 이름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헤겔은 인문계 중고등학교인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튀빙겐 신학 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그가 신학 대학에 입학한 것은 먼저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소망 때문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빠르게 출세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섞인 결정이기도 했다. 당시 독일 정부가 그리스도교를 통해 국민정신을 계몽하는 정책을 내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곳에선 별다른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다. 성적도 일부 과목을 제외하곤 대부분 평균 이하를 맴돌았다. 심지어 그가 받아든 졸업증명서에는 ‘신학과 문헌학에는 조예가 있으나 철학적 능력은 없다’는 평가가 적혀 있었을 정도였다.


대신 그는 이곳에서 자신의 인생을 바꾼 두 사람을 만난다. 자신보다 다섯 살 어린 천재 소년 프리드리히 셸링과 동갑내기 시인 프리드리히 횔덜린이다. 헤겔은 이들과 문학 토론을 하고 자유를 표방하는 학생 동맹을 결성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며 내실을 쌓아간다.


대학에 입학한 다음 해인 1789년, 헤겔은 자신의 인생을 바꿀 사건을 경험한다. 바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소식을 들은 헤겔은 ‘영광스러운 새벽이 왔다’며 환호했고, 나아가 그 정신이 자신의 조국에서 이어질 방법이 없을지 고민했다. 그는 결국 목사의 길을 포기하고, 철학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사상 탐구의 형태로 혁명의 정신을 이어가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리고 1816년, 헤겔은 46살의 나이로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정교수가 되었다. 학자로서 성공하기에는 다소 늦은 나이처럼 보였지만 우려에 불과했다. 누구보다 빠르게 명성을 얻어간 것이다. 그에 힘입어 헤겔은 자신의 세 번째 저서인 《엔치클로페디》를 출간하였으며, 이듬해에는 프로이센 제국의 사상적 중심지로 불리던 베를린 대학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명성은 더욱더 높아졌다. 강의를 듣기 위해 학생은 물론 고위직 공무원, 군인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그의 강의실로 몰려들 정도로 말이다.


앞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역사철학강의》는 헤겔이 직접 쓴 저서가 아니다. 그가 1822년부터 1831년까지 5회에 걸쳐 베를린 대학교에서 강의한 내용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일종의 강의록이다. 강의 내용을 정리한 책이기 때문에 헤겔의 다른 저서와 달리 어렵지 않으며, 역사를 주제로 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읽기 용이한 것이 특징이다.


정반합의 과정을 거치며 완성되는 역사

《역사철학강의》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선 헤겔 사상의 기본 틀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헤겔은 살아생전부터 ‘독일 관념론의 완성자’라는 칭송을 받았다. 여기서 관념론이란 ‘물질이 아닌 정신 또는 생각을 세계의 근원으로 바라보는 태도’을 말한다. 독일 관념론의 문을 연 것은 이마누엘 칸트였다. 우리의 관념과는 별개로 실제 존재하는 사물 자체의 세계를 알 수 없다는 주장을 펼친 것이다.


칸트의 입장은 피히테, 셸링 등 여러 철학자를 거친 뒤 헤겔에 와서 완성되었다. 헤겔은 인간의 경험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우리의 관념 또한 늘어난다는 주장을 펼쳤다. 가령, ‘나무’라는 사물을 떠올려보자. 우리는 다양한 형태로 나무를 생각한다. 누군가는 가파른 언덕 위에 단단하게 뿌리 내린 나무를 생각할 것이며, 또 다른 누군가는 의자나 책상으로 쓰임새를 바꾼 나무를 상상할 것이다. 땔감으로 쓰기 위해 조각난 나무를 생각할 수도 있고, 귀중한 열매를 제공해주는 나무의 모습을 떠올릴 수도 있다.


대체 이토록 다양한 나무를 떠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각기 다른 경험을 통해 ‘나무’에 대한 생각과 지식을 얻었기 때문이다. ‘나무’라는 사물은 우리의 다양한 경험을 통해 얻어진 관념들의 종합이라고 할 수 있다. 헤겔은 인간의 사유가 의식에서 시작해 다양한 경험을 거치며 진보해 나아가는 과정을 ‘변증법’의 논리를 통해 설명한다. 그의 변증법은 정립과 반정립, 종합의 세 단계로 나타나며, 우리는 흔히 이 과정을 ‘정반합’이라 부른다.


나아가 헤겔은 정반합의 변증법을 역사의 흐름에 적용한다. 헤겔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역사가 이성적으로 진행되어 왔다고 설명하며, 역사를 이성적으로 진행시켜온 힘을 ‘세계정신’이라고 일컫는다. 세계사를 ‘세계정신이 차츰 진리를 의식하고 추구하는 과정’으로 파악한 것이다.


세계정신은 때때로 위대한 한 명의 존재와 행동을 통해 실천되기도 한다. 고대 마케도니아 왕국의 정복 군주인 알렉산드로스 대왕, 로마 공화국의 정치가인 율리우스 카이사르, 헤겔과 동시대 인물이었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같은 인물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세계정신이 자기를 실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일종의 도구이다. 이들은 단지 자신의 지위, 명예, 안전을 위해 행동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욕망과 충동을 따르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행동 뒤에는 세계정신이 있다. 다시 말해, 위인들은 그저 자신의 개인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행동하지만, 그 행동을 통해 위대한 일을 수행하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이들이 늘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나폴레옹은 쿠데타와 전쟁 초기만 하더라도 프랑스 혁명의 정신을 계승하는 인물로 많은 유럽인의 지지를 받았지만, 결국 전쟁에서 패배하며 몰락하고 말았다. 이처럼 헤겔은 이들의 위대함은 오직 역사 속에서 볼 때만 그러할 뿐, 개인적으로는 불행한 운명을 짊어지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한다. 알렉산더 대왕처럼 요절하거나, 카이사르처럼 살해되거나, 나폴레옹처럼 유형을 당하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들의 삶은 대부분 악전고투였으며, 세계정신의 목적이 달성될 즈음에는 마치 알맹이 없는 열매 껍데기처럼 시들어버리고 말았다.


그렇다면 세계의 역사는 어떤 형태로 시작되고 또 발전해 나갈까? 헤겔은 역사의 발전 과정을 크게 세 가지 단계로 구분한다. 첫 번째는 정신이 자연에 몰입된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는 ‘모든 사람이 자유로운 존재’라는 의식이 형성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오직 지배자 한 사람만 자유로울 수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정신이 자연을 벗어나 의식을 갖기 시작한 단계이다. 이 단계에선 아직까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자유로운 존재로 여기지 못해 일부만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정신이 완전히 자기의식으로 올라선 단계이다. 이 단계에선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자유롭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그 자유를 실현하기 위한 법과 제도들을 만들어 나간다.


헤겔은 세계정신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때 역사의 종착점에 도달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러한 역사의 최종 단계가 자신의 시대에서 실현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의 유럽 원정 등을 거치며 절대 왕정이 무너지고, 그가 세계정신의 모습이라 믿는 군주 국가가 유럽 여러 국가에서 등장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세계정신을 이해하기 위한 학문, 즉 ‘철학’도 종착점에 도달했다. 자신의 본 모습을 드러낸, 세계정신을 인식한 철학자가 등장한 것이다. 바로 헤겔 말이다.


물론 헤겔의 이러한 결론이 옳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가 이상적이라 생각한 군주 국가는 수많은 결함을 드러냈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변증법적 과정이 이후에도 끝없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헤겔 철학, ‘정’과 ‘반’이 되어 후대 철학자들을 나아가게 하다.

《역사철학강의》는 헤겔이 생전에 베를린 대학교에서 진행한 ‘세계사의 철학’이라는 강의의 내용을 사후에 책으로 펴낸 것이다. 그의 강의는 당대 많은 지식인에게 반향을 일으켰다. ‘정신’의 원리를 통해 국가와 종교, 역사 등을 아우르는 헤겔의 철학에 많은 사람이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헤겔의 철학은 학계 주류가 되었고, 독일 내 수많은 대학에서 헤겔 철학에 관한 강의가 이루어졌다.


프로이센 정부 또한 헤겔의 철학을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국가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그의 철학이 자신들에게도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것이 그 이유이다. 물론 여기에는 부정적인 측면도 없지 않았다. 헤겔 철학에 담겨 있던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성격이 뒤로 밀려나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헤겔은 ‘프로이센의 국가 철학자’라 불리거나 ‘어용 철학자’라는 조롱을 듣기도 했다.


더 큰 문제는 헤겔이 세상을 떠난 뒤에 발생했다. 헤겔학파로 불리던 그의 제자들이 둘로 나뉘어 논쟁한 탓이다. 이들이 갈라서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헤겔과 그리스도교의 관계에 대한 이해 차이였다. 우선 헤겔 우파로 불리는 이들은 보수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헤겔 철학과 그리스도교의 교의가 일치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반대로 헤겔 좌파로 불리는 이들은 그리스도교와 헤겔 철학을 분리하고자 애썼다.


그리고 차츰 헤겔학파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철학을 정립한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또 다른 독일의 철학자인 루드비히 포이어바흐가 있다. 그는 헤겔의 이성주의적 형이상학에 반대하고, 철학은 현실에 존재하는 인간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학설을 주장했다. 《공산당선언》과 《자본론》의 저자인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도 헤겔의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처음에는 헤겔 좌파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지만, 이후 이들의 입장에 맞서 자신들의 독자적인 철학을 전개해 나갔다. 헤겔 철학의 변증법적 사고관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관념론적 색채를 제거하고 그 자리에 모든 정신 현상이 물질의 작용 또는 그 산물이라고 보는 유물론적 사고관을 결합한 것이다.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헤겔이 강조한 정신이나 이성이 아닌, 비합리적 의지와 무의식, 또는 삶 자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나타났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의 ‘맹목적 의지’, 프리드리히 니체의 ‘힘에의 의지’, 쇠얀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적 결단’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들의 철학은 헤겔의 사상에 강한 영향을 받았고, 동시에 강력한 비판자이기도 했다. 특히 실존주의 사상의 창시자인 키에르케고르는 이성적 법칙이 역사를 지배한다는 헤겔의 입장에 반대했다. 그가 보기에 더 중요한 것은 역사가 어떤 법칙에 지배당하고 있느냐가 아닌, 우리 스스로 이 세계를 어떻게 살아나가야 하느냐 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당대와 후대 철학자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헤겔의 철학이 근대 및 현대 철학사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하다. 마치 자신의 철학처럼 정반합의 과정을 거쳐 더 나은 사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한 것이 바로 헤겔 철학과 그의 책 《역사철학강의》였던 것이다.


게오르크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

독일의 철학자. 독일 관념론을 완성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자연, 역사, 정신의 모든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하며, 이는 정반합(正反合) 구조의 변증법적 전개 원리로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원리는 훗날 마르크스주의에 비판적으로 계승되어 19세기 사회와 학문에 큰 영향을 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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