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90년대 학번이라 죄송합니다

10화 모니터 불빛 아래 피어난 사랑과 우정

by 유혜성

10화 <모니터 불빛 아래 피어난 사랑과 우정>


현대판 ‘접속’, 그리고 30년 뒤의 우리


모니터 앞의 멜로드라마


1997년 여름, 모니터 앞에서 밤을 지새우던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 영화 <접속〉 속 전도연과 한석규였다.

익명의 닉네임으로 건네는 인사.

“어디쯤 사세요?”

“혹시 내일은 볼 수 있을까요?”

그 짧은 문장만으로도 하루가 흔들리고, 손끝은 설렘으로 떨렸다.


스크린 속 멜로는 당대 청춘들의 집단 자화상이었다.

누군가는 파란 화면 속 낯선 대화로 하루를 열었고, 누군가는 접속음을 끝내고 피카디리 극장 앞에서 빨간 장미를 들고 상대를 기다렸다.

PC통신에서 만나 사랑을 키우고, 결국 결혼까지 이어진 커플들도 곳곳에 있었다.


라디오의 불빛도 곁을 지켰다


“안녕하세요, 정은임의 FM 영화음악입니다.”

1992년 가을부터 2004년 봄까지, 그녀의 목소리는 엽서와 PC통신 사연을 타고 청춘들의 방마다 스며들었다.

리버 피닉스의 죽음을 전하던 날, 눈물 섞인 해설은 한 세대의 감수성을 길러냈다.


라디오 앞의 소년은 밤마다 엽서를 적었고, 라디오 앞의 소녀는 사연을 쓰며 스스로도 영화의 일부가 된 듯했다.


책과 스크린, 우리의 지도


낮에는 책과 스크린이 우리의 지도를 만들었다.


성균관대 앞 독립서점 ‘풀무질’은 문학과 사유, 연대가 모여들던 사랑방이었다.

어떤 이는 김수영 전집을 사고, 맛나 떡볶이집에서 시집에 국물이 튈까 조바심치며 책장을 넘겼다.

또 어떤 이는 책방 사장과 의리를 나누며, 사장이 책을 낼 때 부록에 글을 실어줄 만큼 순수와 열정으로 시대를 견뎌냈다.


혜화동 동숭아트센터 예술영화관 ‘하이퍼텍나다’는 시네마 키드들의 성지였다.

누군가는 단골 문학청년이었고, 또 누군가는 이별 뒤 혼자 티켓 두 장을 끊어 옆자리를 빈 채로 영화를 봤다.

같은 어둠 속, 같은 장면을 보았지만 서로는 스쳐 지나갔을 뿐이었다.


30년 뒤, 다시 접속


그리고 30년이 흐른 지금, 2025년.

우리는 다시 “접속”했다.


이번엔 PC통신도, 라디오도 아니다.

카카오의 글쓰기 플랫폼, 브런치 위에서다.


그의 닉네임은 프리재즈(@freejazz).

나는 ‘필라테스 힐러’라는 이름으로 글을 쓰는 사람.


정은임 아나운서를 추억하고, 90년대를 소환하는 글을 매개로 우리는 연결되었다.

그는 강남의 직장에서 대한민국의 코어를 떠받치는 직장인이 되었고,

나는 필라테스 센터를 운영하며 글쓰기를 이어가는 사람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동세대를 공유하는 동료 작가로서, 글을 읽고 댓글을 남기며,

당신도 그때, 거기 있었군요.” 하고 미소를 주고받는다.


본질은 여전하다

라디오 대신 브런치 플랫폼이, PC통신 대신 스마트폰이 자리를 바꿨을 뿐이다.


브런치에서 우리는 여전히 얼굴을 모른 채 닉네임이나 필명으로 글을 쓰고, 댓글을 달고, 마음을 건넨다. 어떤 이는 사진과 실명을 당당히 내세우기도 하지만, 많은 작가들은 여전히 가려진 얼굴 뒤에서 자기만의 언어로 빛난다.


낯선 이의 문장에 기대고,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누군가의 댓글에 힘을 얻는다. 이름도, 나이도, 사는 곳도 모르지만 글과 글이 이어주는 끈은 90년대 PC통신의 닉네임과 비밀방명록처럼 묘하게 따뜻하다.


그때가 전화선 위의 접속이었다면, 지금은 브런치의 피드 위에서 다시 접속하는 셈이다. 본질은 같다. 모르는 누군가와의 문장 속 연결, 그리고 그 연결에서 피어나는 낭만.


<접속>이 전하던 메시지는 지금도 유효하다.


“같은 시간을 살아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연결되어 있다. “

첫사랑 같은 PC통신의 아쉬움


닉네임, 그리고 접속의 변천사


그녀는 천천히 웃으며 카메라를 바라본다.


“제 닉네임은 <비 오는 파리〉였어요.

그리고 그 사람은 <천년의 사랑〉이었죠.

강의실에 앉아 있어도, 친구들과 있어도 늘 마음은 PC 앞에 가 있었어요.

수업이 끝나면 제일 먼저 모뎀을 켜고, 파란 화면에 접속하던 그 시절… 제일 두근거렸던 순간이었죠.”


그곳에서 만난 그는 친구 같으면서도 연인 같았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마음속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고, 서로는 어느새 영원한 단짝이 되어 있었다.


“어느 날 약속을 했어요.

‘내일 저녁 7시, 피카디리 극장 앞. 빨간 장미를 든 사람이 나예요.’

마치 영화 〈접속〉처럼요.

정말 그 사람이 거기 있었고, 우리는 차도 마시고, 영화도 보고, 노래방에도 갔습니다.

친구도 연인도 아닌 그 사이, 낯설지만 설레던 시간들이었죠.”


그러나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 날 그가 먼저 PC통신을 탈퇴했어요. 마치 단짝 친구를 잃은 기분이었죠. 지금도 가끔 닉네임 〈천년의 사랑〉을 어디선가 다시 마주친다면… 제 가슴이 쿵 하고 뛸 것 같아요. 30년 전 기억이 순식간에 되살아나겠죠.”


잠시 말을 고르던 그녀는 웃음을 지으며 이어간다.

“하지만 인생은 참 묘하잖아요. 그 후 아이러브스쿨이 등장했어요. 거기서 초등학교 동창을 다시 만났죠. 놀랍게도 그 친구가 지금 제 남편입니다. 결국 PC통신과 온라인 덕분에 지금의 가족이 있는 거예요.”


그녀는 잠시 시선을 돌리더니 다시 카메라를 응시한다.

“그때는 PC통신이었고, 이후엔 아이러브스쿨, 지금은 인스타그램·페이스북·스레드 같은 SNS잖아요. 방식은 계속 바뀌었지만, 사람을 향한 마음만은 변하지 않는 것 같아요. 언젠가 SNS 피드 속에서 닉네임 <천년의 사랑〉을 다시 발견한다면… 아마 제 심장은 여전히 그때처럼 콩닥거릴 거예요.”


그녀의 눈가에 묘한 빛이 어렸다.

천년의 사랑이 아니어도, 접속의 시대를 살아낸 기억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다.

싸이월드 미니홈피가 열어젖힌 “나의 방”


1999년 무렵, 싸이월드가 문을 열었을 때

우리는 처음으로 “나만의 공간”을 갖게 되었다.

도토리를 사서 미니미에 옷을 입히고, BGM을 걸고, 사진을 전시했다.

방명록은 사랑방이었고, “파도타기”는 골목길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작은 사고가 터졌다.

모바일 결제가 서툴던 시절, 나는 친구에게 도토리를 선물하다가 ‘0’을 하나 더 붙여버린 것이다.

2만 원 대신 20만 원어치 도토리가 한 번에 날아가 수신인은 하루아침에 ‘도토리 재벌’이 됐다.

“환불이 안 된대.”

친구들은 박장대소했고 나는 속으로 울고 있었다.

그러나 그 덕분에 친구의 미니미 옷장은 계절을 앞질렀고,

그 방의 BGM은 늘 최신 히트곡으로 바뀌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건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자기 정체성을 발명하는 최초의 무대 장치였다.


비밀방명록엔 작은 심장이 뛰었다.

“오늘 너의 상태메시지가… 내 하루를 구했어.”

그 한 줄이 ‘썸’이 되었고,

관계는 사진첩의 페이지 수로 자랐다.


가끔은 술에 취한 용기가 방명록에 새겨졌다.

“너… 나랑 결혼할래?”

비밀 방명록에 써야 할 내용이 다음 날 아침, 모두에게 공개됐다.

그 기록은 방명록에 고스란히 남았고, 당사자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지금의 카톡처럼 ‘삭제하기’ 기능만 있었어도, 많은 이들의 흑역사는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절엔 타이밍을 놓쳐 그대로 노출되는 것조차 하나의 추억이었고, 때로는 관계를 바꾸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아이러브스쿨 — 잊혔던 이름이 다시 불리던 밤


세기가 바뀔 즈음, 아이러브스쿨은 하나의 마술이었다.

졸업앨범 속 이름이 마치 닉네임처럼 다시 떠오르고,

“혹시 너, 그때 과학실 창가 쪽?”

멀어졌던 친구들이 단번에 10년을 뛰어넘어 돌아왔다.


그 재회는 곧 이야기였다.

“그날 소풍 때 네가 찾아 준 보물찾기 종이, 아직도 기억나.”

그 말 한 줄이 감춰 두었던 감정을 깨웠고,

누군가는 다시 연애를 시작했고,

누군가는 정말로 결혼식 청첩장을 보냈다.

아이러브스쿨은 ‘온라인에서 현실로’ 환승하는 첫 플랫폼이었다.


프리첼의 광장, 그리고 유료화의 종소리


프리첼은 취향의 아고라였다.

문학·사진·여행 카페에서 우리는 낯선 필명과 금세 친구가 됐다.

서로의 글에 코멘트를 달며, 모르는 사람이 친구가 되고, 친구가 곧 일상이 되었다.


하지만 운영 공지가 올라온 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유료화 전환.”

계속 남을까, 떠날까. 우리는 망설였지만 많은 방이 조용히 닫혔다.

비둘기들이 떠난 광장처럼, 빈 의자만 바람을 맞았다.

그때 처음 알았다. 온라인도 생로병사가 있다는 것.


MSN·네이트온 — 상태메시지로 말하던 시절


출근하면 제일 먼저 켠 건 메일이 아니라 메신저였다.

상태메시지에 ‘반쯤 농담, 반쯤 진심’을 걸어두고,

창 하나로 점심이 정해지고 저녁이 약속됐다.


가끔은 취중진담이 번개처럼 떨어졌다.

“너… 나랑 사귈래?” (전송)

“새벽 1:57, 내일 다시 얘기하자.” (읽음)

다음 날 아침, 그는 닉네임을 바꿨다.

농담일지, 고백일지 애매한 그 선이 바로 안전벨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커플은 메신저 창에서 진짜로 청혼을 받았다.

스크린샷이 청첩장에 인쇄되던 시대. 그게 우리의 2000년대였다.


싸이월드는 저물었나, 그리고 한 번의 심폐소생술


시간은 모바일로 달려갔다.

플러그인과 플래시, PC에 갇힌 구조는 손바닥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글로벌 SNS의 개방형 네트워크가 물결을 이루는 동안,

미니홈피는 골목 어귀처럼 정겹지만 점점 좁아졌다.

한 번의 심폐소생술이 있었다.

“다시 문을 여니, 오세요.”

우리는 잊고 지낸 아이디를 찾아내고, 비밀번호를 부활시키려 애썼다.

사진 몇 장은 건졌지만, 당시의 감성 글과 방명록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도 충분했다. 한 곡의 BGM이 플레이되는 순간,

그 방의 공기가—그때의 우리 공기가—잠깐 돌아왔으니까.


그리고, 본질


접속음, 닉네임, 번개, BGM, 상태메시지, DM, 스토리…

껍데기는 바뀌었어도 속은 같다.

“나를 알아봐 줄 누군가에게 닿고 싶은 마음.”


그 마음이 PC통신을 동네로 만들었고,

아이러브스쿨을 재회로 만들었고,

싸이월드를 무대로 만들었고,

프리첼을 광장으로 만들었고,

MSN과 카톡을 일상의 호흡으로 만들었다.


결국, 우리는 늘 같은 것을 원했다.

조금 더 솔직하게, 조금 더 다르게, 그러나 결국 연결되고 싶은 마음.

세대의 대화 — “이모 세대는 오히려 다 해봤네”


조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모 세대는 오히려 다 해봤네.

우린 앱으로 만나고, DM으로 시작해. 직관(야구)처럼 실시간이 좋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전화선으로 들어가서, 게시판·번개·미니홈피·메신저·SNS… 다 거쳐 왔지.

디지털 1세대라 그런지, 말하자면 ‘언어가 여럿’이야.”


조카가 눈을 반짝였다.

“그럼, 이모도 미니홈피에서 썸… 탔어?”


나는 괜히 으스대고 싶어졌다.

“내 비밀방명록은 늘 뜨거웠단다.

내 일촌 중엔 지금 이름 들으면 놀랄 스타트업 CEO도 있었지.”


조카는 놀람과 존경이 섞인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근데 이모, 아이러브스쿨에서 재회해서 결혼한 얘기… 진짜였어?”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의 쪽지 하나가 인생의 방향을 바꾼 사람들이 있었지.

그리고 그 덕분에 탄생한 게 바로 너야.”


조카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엄마 아빠가 아이러브스쿨에서 만났다고…. 와, 이거 진짜 영화네!”


우리는 함께 웃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결국 방식만 달라졌을 뿐, 마음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았다.

사람은 늘 연결을 원했고, 시대는 그 연결을 위한 도구를 달리 만들어줬을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비밀 하나를 마음속에 꺼내본다.

싸이월드가 ‘심폐소생술’처럼 부활했다는 소식에 가장 반가웠던 이유

그건 오래전, 내 비밀방명록에 남아 있던 한 사람의 메시지를 다시 찾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끝내 찾을 수 없었다.

그 대화는 오직 내 기억 속에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비밀방명록의 글자들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듯했다.

마치 아직도, 누군가와 이어지고 있는 것처럼.

TMI 타임 - 그때 그 서비스, 핵심만 쏙


PC통신의 시작과 전성기

1985년, ‘천리안’이 전자사서함으로 태어났다.

1986년엔 한경 KETEL이 출발했고, 1992년 이름을 ‘하이텔’로 바꿨다.

1994년 ‘나우누리’, 1996년 ‘유니텔’이 가세하며 90년대 밤마다 “삐—삐삐—” 모뎀음은 청춘의 배경음악이 되었다.

2020년대에 들어, 유니텔은 2022년에 완전히 종료, 천리안도 2024년 “서비스 종료” 공지를 남기고 역사 속으로 들어갔다.

“쌓아둔 비밀번호는 잊혀도, 그 밤의 접속음은 끝내 잊히지 않는다.”


<접속> 신드롬

1997년, PC통신 채팅을 배경으로 한 영화 〈접속〉이 흥행했다.

실제로 채팅방에서 만나 연인이 된 사람들이 많았고, 영화는 당대 청춘들의 자화상이 되었다.

“라디오 사연처럼, 모니터 앞에서 시작된 문장이 진짜 사랑으로 번지던 시절.”


포털·카페의 부상

1999년 ‘다음 카페’가 열리고, 2003년 ‘네이버 카페’가 가세하면서 PC통신의 동호회 문화는 포털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더 빠르고 더 많은 사람이 모였지만, “아이디 대신 진짜 이름이 불리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분위기는 달라졌다.


싸이월드의 전성기

1999년 KAIST 학생들의 실험에서 출발 2003년 SK커뮤니케이션즈가 인수하며 전성기에 돌입.

미니홈피, 도토리, 미니미, BGM, 방명록…

“내 방에 놀러 와”라는 말이 진짜로 통하던 시절.

Today 카운터 숫자가 곧 인기의 척도였고, 도토리 하나가 작은 화폐였다.

2020년대 들어 몇 차례 심폐소생술 시도가 있었지만, 결국 2025년 현재도 복구는 부분적으로만 이뤄졌다.

사진 몇 장은 돌아왔지만, 그때 쓴 감성 문장들은 이미 바람 속으로 흩어졌다.


메신저의 시대 – 네이트온

2002년 출시된 네이트온은 PC 메신저의 제왕이었다.

상태메시지에 “반쯤 농담, 반쯤 진심”을 걸어두면, 친구들이 귓속말로 물어봤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지금 카톡 상태 메시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2010년대 들어 스마트폰과 카카오톡이 주도권을 가져가며 점점 잊혔지만, 그 시절 네이트온 창은 우리의 ‘심야 수다방’이었다.


SNS로의 환승

2000년대 후반~2010년대, 페이스북·트위터·인스타그램이 등장하며 글로벌 무대가 열렸다.

관계의 속도는 더 빨라지고, 사진과 동영상은 즉시 피드가 되었다.

2020년대엔 인스타·유튜브·틱톡, 그리고 최근엔 스레드까지.

“연결”의 방식은 끝없이 바뀌지만, 결국 본질은 같다.

“나를 알아봐 줄 누군가에게 닿고 싶은 마음.


1985년 천리안에서 2025년 스레드까지,

변한 건 기술이었지만 변하지 않은 건 마음이었다.

사랑과 우정, 잊힘과 재회가 남긴 흔적들.

그것이 곧 우리의 청춘 지도였다.

독자에게 보내는 편지


사랑하는 90년대 추억 열차 승객 여러분께,


이번 정차역의 간판은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모니터 불빛 아래 피어난 사랑과 우정>


1990년대, 우리의 방은 작은 극장이었습니다.

모니터 불빛은 조명이었고, 파란 화면은 무대였습니다.

닉네임은 가면이자 또 다른 이름이었지요.

“비 오는 파리”, “천년의 사랑” 같은 이름 속에

우리는 떨림과 설렘을 감추고, 매일 밤 접속음을 기다렸습니다.


그 후 싸이월드의 미니홈피가 열리던 시절,

도토리는 화폐였고 방명록은 일기장이었습니다.

BGM 한 곡이 마음을 대신했고,

작은 아이콘 하나가 우리 정체성을 발명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결국 바람은 같았습니다.


“누군가에게 나를 알리고 싶다.”

“내 마음을 알아봐 줄 사람이 있기를 바란다.”


30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다시 접속했습니다.

브런치라는 새로운 광장에서,

닉네임 대신 ‘작가님’이라는 호칭으로 서로를 부르고,

댓글 한 줄에 웃음을 건네고,

사연 한 줄에 눈시울을 적십니다.


PC통신의 접속음, 싸이월드의 방명록, 프리첼의 광장, 네이트온의 상태메시지.

그 모든 길은 마치 강물의 지류처럼 합쳐져,

오늘의 우리를 이곳으로 데려왔습니다.

기술은 갈아입었어도, 마음은 늘 같은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연결되고 싶은 마음.

나를 알리고 싶은 마음.

누군가의 기억 속에 오래 머물고 싶은 마음.


그래서 이 연재는 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댓글 속 이름들, 각자의 닉네임과 목소리가 모여

우리가 함께 쓰는 집단 자서전이 되었습니다.


오늘도 90년대 열차에 탑승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차장석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니,

가을 햇살 아래 물드는 나무들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빛나는 얼굴들이 보입니다.

어떤 분은 조용히 추억을 곱씹고,

어떤 분은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듭니다.

그 모습은 1990년대 어느 가을 저녁,

모니터 불빛에 기대어 앉아 있던 우리 모습과 겹쳐집니다.


다음 정차역에서도, 다시 만나 뵙기를.

낙엽이 흩날리듯 문장들이 흘러가도,

우리의 마음은 다시 이어질 것을 믿습니다.


<90년대 학번이라 죄송합니다〉

여러분의 기관차장 드림.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comet_you_

스레드

https://www.threads.com/@comet_you_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