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브라운관 앞의 설렘: 대학가요제·강변가요제
저녁 무렵, 가족들이 브라운관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뉴스를 보고 드라마로 넘어갈 타이밍. 나는 책상에 앉아 안경을 고쳐 쓰고 문제집을 풀던, 소위 모범생이었다. 연말, 방학 시즌. 따뜻한 방 안에 김이 모락모락 오르고 군고구마 냄새가 났다. 그때였다. 어딘가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 낯설고도 확실하게 내 심장을 붙들어 매는 목소리. 나도 모르게 TV 앞으로 걸어 나갔다.
사회자가 물었다. “여자친구 있나요?” 화면 속 청년이 웃으며 “당연히 없죠”라고 답하고, 여자 아나운서는 장난스레 “거짓말이겠죠?”라고 받는다. 약간은 어설프지만 무섭도록 순수한 텐션. 이어서 전주가 시작됐다. <그대에게〉.
가창은 완벽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젊음, 그 눈빛, 그 기세. ‘이 사람은 된다’는 확신이 이상하게 들었다. 무대의 맨 마지막쯤, 소년 같은 미소를 띤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나는 처음 알았다. 시간이 진짜로 느려지는 순간이 있다는 걸. 심장이 뛴다는 게 무엇인지, 첫사랑이 한 사람의 목소리에서 시작될 수도 있다는 걸. 그의 이름은 신해철. 무한궤도. 그날 이후 나의 연말은, 그리고 나의 청춘은 가요제의 계절과 함께 흐르기 시작했다.
그 시절엔 모두가 TV 앞에 모였다. 미스코리아, 대학가요제, 강변가요제, 축구 결승, 농구 플레이오프. ‘함께 본다’는 의식이 있었다. 특히 대학가요제 본선은 연말을 밝히는 작은 축제처럼 방 안을 데웠다. 대학생들의 경연이라 했지만 꼭 ‘엘리트’만을 위한 무대는 아니었다. 다만 당대의 캠퍼스 신화가, 때로는 명문대의 반짝이는 이름표와 함께 화면을 압도하곤 했다. 우리 모두는 그 빛에 사로잡혔다. ‘언젠가 나도’라는 마음으로.
대학가요제는 해마다 늦가을에서 연말로 이어지는 실내 무대였다. 체육관이나 대형 홀에서 조명이 켜지고, 사회자가 호명하면 팀이 달려 나왔다.
예선, 본선의 고전적인 구조. 대상·금상·은상·동상·인기상. 트로피보다 더 간절했던 건 ‘하룻밤 사이 평범한 대학생에서 전국구 이름’이 되는 기적이었다.
그 문을 가장 크게 연 신화가 바로 ‘무한궤도’였다.
서강대 철학과 신해철, 그리고 연세대·서울대 등 서로 다른 학과와 악기를 가진 ‘똑똑한 친구들’이 모여 만든 밴드. 흰 셔츠, 청바지, 운동화. 꾸밈없는 모습으로 무대에 서서 단 한 곡으로 시대를 바꿔냈다.
물론 그 이전, 이미 유열과 이정석은 대학가요제 무대에서 선배 세대로서 길을 열고 있었다. 따뜻한 발라드와 맑은 목소리로 겨울밤 캠퍼스를 물들였고, 그 흐름 위에 무한궤도가 또 다른 혁신을 더한 것이다. 이어서 전람회의 포근한 캠퍼스 감성, 패닉(이적·김진표)의 기막힌 위트와 사운드가 등장하며 세대의 취향을 넓혀갔다.
잘생기고 젠틀한 이미지의 보컬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 여학생 팬들은 늘었고, 남학생들은 기타를 샀다. 더 흥미로운 건, 이 무대가 곧 라디오 DJ로 이어지는 다리가 되곤 했다는 사실이다. 낮에는 가수로, 밤에는 진행자로 청춘의 사연을 받아 적던 사람들. 음악을 매개로 말과 생각을 전하는 법을 배운 이들이 곧 우리 세대의 별들이었다.
내가 아는 누군가는 ‘대학가요제를 나가기 위해서’ 대학을 갔다. 공부가 크게 맞지 않았던 그는 결국 기적처럼 이른바 ‘SKY’라 불리던 명문대 캠퍼스에 입성했고, 곧장 밴드부로 달려갔다. 목소리가 좋았다. 얼굴도 평범 이상. 운 좋게 보컬 제안이 들어왔다. 밤마다 연습실에서 스탠드 마이크를 잡고, 가사 한 줄, 호흡 한 박자를 갈아 넣었다.
그런데 예선을 앞두고 다리를 다쳤다. 결국 대타를 세우기로 했다. 무대를 일주일 앞두고 그는 객석에 앉아 팀 이름이 호명되는 걸 들었다. 친구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터져 나왔다. 그 무대는 예선에서 멈췄다. 그날 밤 그는 울지 않았다. “그래도 좋았다”라고 말했다. “내가 만든 조합이, 내가 짠 베이스 라인이 저 안에 있으니까.”
“나, 그때 거의 스타 될 뻔했어.” 그 ‘거의’라는 단어가 인생을 얼마나 빛나게 하는지, 그를 보면 알 수 있었다. 청춘의 스포트라이트는 반드시 정중앙을 비춰야만 추억이 되는 건 아니니까.
또 다른 친구는 재수 끝에 미대에 들어가자마자 베이스를 집어 들었다. 무한궤도를 입에 올리고 자주색 실크 셔츠를 사서 리바이스 청바지에 턱 집어넣어 입었다. 베이스는 노래만큼 눈에 띄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에게는 프런트맨의 포즈보다 밴드의 ‘심장’을 두드리는 게 더 중요했다.
예선 날, 손바닥에 땀이 흥건히 맺혔다. 노래는 불안정했지만 눈빛만은 흔들리지 않았다. 결과는 탈락. 그해 겨울, 소식을 알지 못한 친구들은 브라운관 앞에서 그의 이름을 기다렸다. 끝내 불리지 않았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도 우리도 빛났다. 청춘의 무대는 언제나 조금 모자라서 더 아름다웠다.
(*독자 사연 각색@Sammy Jobs)
겨울 실내의 대학가요제가 ‘낭만’이라면, 여름 야외의 강변가요제는 ‘열기’였다. 강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잔디의 흙냄새와 땀 냄새가 섞였다.
청평, 남이섬, 춘천… 7~8월의 밤하늘이 무대 위에 얹히면 노래는 별빛과 함께 부풀어 올랐다. 그 무대에서 이상은은 모자와 탬버린을 들고 〈담다디〉를 흔들었고, 유미리는 〈젊음의 노트〉로 여름을 뚫었다. 조금 앞선 세대의 이선희는 절창으로 아예 기준치를 올려 버렸다. 강변은 낭만과 흥의 줄다리기였다. 캠퍼스 낭만이 ‘사색’의 겨울을 닮았다면, 강변의 낭만은 ‘질주’의 여름을 닮았다. 둘은 계절이 다를 뿐, 같은 시대의 심장을 뛰게 했다.
대학가요제 무대에서 청춘을 사로잡던 스타들은 시간이 지나면 라디오 부스로 자리를 옮겼다. 그중에서도 신해철은 전설의 시작이었다.
그는 MBC 〈FM 음악도시〉 DJ로 등장해, 날카로우면서도 따뜻한 멘트로 밤 청춘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음악보다 말이 더 깊게 파고드는 순간이 많았고, 우리는 라디오 앞에서 철학 강의를 듣는 듯한 묘한 전율을 느꼈다. 이후 이 프로그램은 유희열에게 바통이 넘어갔는데, 유희열 특유의 위트와 감성은 또 다른 세대의 공기를 만들어냈다. ‘음악도시’라는 이름 아래 DJ는 바뀌었지만, 청춘들의 마음을 붙잡는 힘은 계속 이어졌다.
신해철은 음악도시 이후에도 마이크를 내려놓지 않았다. 그는 〈고스트스테이션〉으로 새벽 라디오의 아이콘이 되었다. 한밤중 자유로운 선곡과 직설적인 멘트, 때로는 논객에 가까운 발언까지. 청취자들은 스스로를 ‘고스 식구’라 불렀고, 마왕의 목소리에 위로와 도발을 동시에 얻었다. 무대 위에서는 거대한 카리스마였지만, 새벽 라디오 속 신해철은 오히려 친구 같았다.
이 흐름은 이적으로 이어졌다. 서울대 출신이라는 엘리트 타이틀, 패닉으로 이미 입증된 음악성에 더해 그는 라디오에서도 빛을 발했다.
MBC 〈이적의 FM+〉, KBS 쿨 FM 〈이적의 Dream On〉, SBS 파워 FM 〈텐텐클럽〉까지. 특히 텐텐클럽 시절, 밤 10시에서 자정까지의 시간은 온전히 그의 것이었다. 얼굴보다 노래와 말로 승부한 그는 조곤조곤한 멘트와 재치로 청취자들을 사로잡았다.
“오늘도 이적 오빠 목소리 들으려고 공부는 뒷전이에요”라는 사연이 매일같이 도착할 정도였다.
정리하자면, 신해철은 철학과 깊이로, 유희열은 위트와 감성으로, 이적은 지성과 음악성으로 라디오를 장악했다.
유희열은 대학가요제가 아닌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출신으로, 이후 프로젝트 그룹 ‘토이(TOY)‘를 통해 이름을 굳혔다.
캠퍼스 무대에서 시작된 그들의 노래는, 혹은 그 무대와 맞닿아 있던 청춘의 노래들은 결국 밤의 주파수로 이어져 또 다른 기록이 되었다.
연말에 온 가족이 가요제를 ‘같이 보던’ 시대에서, 이제는 각자의 화면으로 ‘같이 연결되는’ 시대로 건너왔다. 〈슈퍼스타K〉가 포문을 열고, 〈K팝 스타〉, 〈프로듀스 101〉이 뒤를 잇더니, 〈미스터트롯〉이 장르의 벽을 뚫었다. 대학이라는 ‘신분의 문턱’은 높았지만, 오디션은 ‘접속의 문턱’을 낮췄다. 누구나 지원할 수 있고, 누구나 화면을 탈 수 있다. ‘학교’에서 ‘플랫폼’으로. 하지만 달라지지 않은 게 있다. 모두가 ‘누군가의 순간’을 지켜보며 함께 떨고, 함께 눈물짓는 것. 방식이 달라졌을 뿐, 청춘의 본질은 여전히 응원과 동경에 닻 내리고 있다.
오십 대가 된 지금, 어떤 분들은 트롯 오디션의 열기에 다시 젊음을 덧칠한다. 식당 주인아줌마는 “우리 영웅이 팬카페 가입 좀 해줘요”라며 웃는다. 그 눈빛에서 나는 브라운관 앞의 우리를 본다. 연말의 따뜻한 방, 군고구마 냄새, “대상은 누구?”를 외치던 그 밤.
나는 신해철 덕질을 했다. 사진, 레코드, 테이프, CD. 손에 들어오는 건 다 모았다. 라디오도 챙겨 들었다. 그는 음악가였고, 논객이었고, 결국 내 정신의 북극성이었다. 철학과 학생이라는 그의 이력에 마음이 흔들려, 나는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끼고 다녔다. 내용은 반도 모르면서. 그저 ‘닮고 싶다’는 마음이 나를 움직였다. 그리고 그 마음이 나를 바꿨다. 끝내 그의 대학 후배가 되진 못했지만, 서강대 캠퍼스는 다른 이유로 다닐 일이 생겼다.
첫사랑이자 정신적 지주, 마왕은 늘 거기 있었다. 청춘이란 결국 자기 우상과 자기 꿈을 스스로 빚는 과정이니까.
내 친구는 이상은을 너무 좋아하던 팬이었다. 같은 여자였지만 그 자유로운 목소리와 걸음을 사랑했다. 〈담다디〉의 리듬에 맞춰 노트를 흔들며 “언젠가 나도 저렇게”라고 중얼거렸다. 이상은은 아이돌 같은 스타로 시작해, 결국 자신만의 빛을 내는 싱어송라이터가 됐다. 누군가는 길을 시작으로 삼고, 누군가는 길을 만들며 끝까지 걷는다. 둘 다 청춘의 방식이다.
대학가요제와 강변가요제. 겨울의 실내와 여름의 야외, 사색의 낭만과 질주의 열기. 그 무대에 섰던 이들은 가수가 되었고, DJ가 되었고, 혹은 우리처럼 평범한 직장인이 되었다. 하지만 모두가 나눠 가진 건 무대에 오르려 했던 마음이다.
본선 트로피가 아니어도, 예선의 조명 아래 잠깐 서 본 사람들은 안다. 그 순간이 평생의 증명이라는 것을. 그날 무대 위에서 쏟아낸 단 한 번의 노래가, 지금까지 나를 살게 한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는 오늘도 화면 앞에 모인다. 다만 거실의 TV가 휴대폰으로 바뀌었을 뿐. 옛날엔 ‘대상은 누구?’였고, 지금은 ‘최종 우승자는?’이다.
질문의 문장이 바뀌었을 뿐, 함께 떨고 함께 울어주는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연말이 다가온다. 올해도 누군가는 무대에 오를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객석에 앉아, 혹은 작은 화면을 들여다보며, 또 한 번 첫사랑 같은 목소리에 빠질 것이다. 그때, 스스로에게 속삭여 보자.
“그대에게, 나에게, 우리 모두에게… 우리의 노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라고.
밤이 깊어질 무렵, 조카가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이모, 나 지금 바빠. 내가 응원하는 사람한테 투표 버튼 눌러야 해. 바로 눌러야 순위가 올라가.”
나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요즘 세상은 버튼 하나, 화면 하나가 무대야.
우리 때는 PC통신 창에 댓글 남기고, 팩스 보내고, 엽서 쓰고, 전화 연결해서 투표하곤 했지.
한 번은 전화 투표 번호 안내 듣다가 ‘삐익‘하고 끊긴 적도 많았고.”
조카가 잠시 멈추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근데 이모, 신해철 좋아했잖아. 김성재도 좋아했었고. 둘 다 세상에 없네?”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답했다.
“그래, 내가 사랑한 목소리들은 세상에 없어. 그래서 한동안 사랑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기도 했어.
사랑이란 건 결국 세계와 연결되는 일인데, 그 세계가 사라진다면 차라리 멈추는 게 낫다고 생각했던 거지.”
조카는 눈을 반짝이며 또 물었다.
“그리고 또 누굴 좋아했어? 그 사람도 세상에 없어?”
나는 빙그레 웃으며, 조카가 손에 든 휴대폰을 가리켰다.
“지금 네 손에 들려 있는 걸 만든 사람.”
“아… 아이폰? 스티브 잡스?”
“그래, 그 사람도 이제 세상에 없지. 하지만 남겨둔 발명품은 여전히 이렇게 네 손에서 살아 있잖아.”
조카는 고개를 끄덕이며 화면을 꾹 눌렀다. 그 순간, 세대는 달라도 ‘좋아한다’는 마음만은 이어져 있다는 걸 새삼 느꼈다.
사랑했던 목소리들이 떠나도, 우리가 나눈 추억은 여전히 라디오의 주파수처럼 남아 있다.
세대마다 방식은 달랐지만, 좋아한다는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우리는 각자의 버튼을 눌렀다.
나는 엽서와 키보드와 전화 버튼을 눌렀고, 조카는 손바닥 안의 작은 화면을 두드린다.
결국 중요한 건 방식이 아니라 마음이었다.
세대를 건너, 매체를 건너, 사랑과 응원의 마음은 늘 같은 자리에서 우리를 기다린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조용히 묻는다.
내 안의 나에게.
“너, 사랑하는 법을 잊지는 않았지? 그날 네 심장을 멈추게 했던 그 순간을 말이야. “
대학가요제 (1977~2012)
가을의 끝, 체육관 무대에 청춘들이 올랐다. “명랑한 대학문화, 건전가요 발굴”이라는 표어는 형식이었지만, 무대에 선 순간 그들은 누구보다 진지한 예술가였다.
• 유열·이정석·임백천: 1980년대 초반, 캠퍼스 발라드의 첫 세대. 라디오 진행까지 이어져 대학가요제와 청춘 라디오를 동시에 대표했다.
• 배철수: 1978년 〈탈춤〉으로 은상 수상. 이후 송골매에 합류해 록의 얼굴이 되었고, 훗날 〈배철수의 음악캠프〉로 장수 DJ가 되었다.
• 신해철: 1988년 무한궤도의 〈그대에게〉로 대상 수상. ‘마왕’이라 불리며 〈FM 음악도시〉, 〈고스트스테이션〉으로 청춘의 심야를 사로잡았다.
• 김동률: 1993년 전람회로 대상. 이후 라디오 〈김동률의 FM 인기가요〉 DJ로, 무대에서 라디오까지 감성을 옮겨간 세대.
• 이적: 대학가요제 무대에서 김진표와 ‘패닉’을 결성. 피아노와 보컬(이적), 랩과 색소폰(김진표)의 조합으로 〈달팽이〉를 선보였다. 이후 솔로와 프로젝트 활동을 이어가며, 라디오 DJ로도 굵직한 발자취를 남겼다. 〈FM+〉, 〈드림 온〉, 〈텐텐클럽〉 등 프로그램을 거치며 “밤 10시의 목소리”로 90년대 후반 청춘들을 붙잡았다.
강변가요제 (1979~2001)
한강·청평·남이섬. 여름의 바람과 모래 위에서 강변 무대가 열렸다. 대학가요제가 “겨울의 사색”이라면, 강변가요제는 “여름의 질주”였다.
• 이선희: <J에게>로 일약 스타. 무대가 곧 스타의 등용문이 된 대표 사례.
• 이상은: <1988년, 〈담다디〉로 대상을 차지하며 20살 청춘의 아이콘이 됨. 그 뒤 싱어송라이터로 전향해 세대를 초월한 뮤지션으로 남았다.
• 유미리: <젊음의 노트〉로 1980년대 후반을 뜨겁게 장식. 여름 청춘제전의 상징 같은 이름.
라디오로 이어진 청춘의 목소리
가요제 스타들의 무대는 라디오 부스로 이어졌다.
유열은 〈음악앨범〉으로 감성을, 임백천은 〈백뮤직〉으로 중후함을, 배철수는 〈음악캠프〉로 팝의 교과서를.
신해철은 〈FM 음악도시〉와 〈고스트스테이션〉으로 새벽을 지켰고, 김동률은 자신만의 감성 채널을 만들었다.
특히 이적은 여러 프로그램을 오가며 DJ로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펼친 뮤지션 중 하나였다. 무대 위 보컬리스트였던 그는, 부스 안에서는 섬세한 멘트로 청춘의 밤을 위로했다.
왜 두 가요제가 새대의 추억이 되었을까?
브라운관 앞에서 “대상은 누구?”를 외치던 그 순간은 단지 한 세대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7080 세대는 강변가요제 초창기에서 이선희, 유열 같은 스타를 보며 시대의 낭만을 공유했고,
X세대는 신해철·이적·김동률을 따라 부르며 청춘의 언어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무대는 자연스럽게 MZ세대에게도 전해졌다.
유튜브·SNS 속에서 다시 소환된 무대 영상, 라디오의 유산, 지금의 오디션 프로그램과 팬덤 문화는 모두 그때의 DNA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겨울 실내의 따뜻한 낭만(대학가요제), 여름 야외의 뜨거운 질주(강변가요제).
두 무대는 합쳐져, X세대뿐 아니라 그 이전과 이후 세대 모두를 이어주는 집단적 기억이 되었다.
독자에게 보내는 편지
(대학가요제·강변가요제를 기억하는 모든 분들께, 그리고 오늘의 오디션을 응원하는 여러분께)
사랑하는 독자님,
겨울이면 우리는 따뜻한 방에서 대학가요제를,
여름이면 강바람을 맞으며 강변가요제를 보았습니다.
그 무대에서 평범한 대학생이 하루아침에 우리의 별이 되곤 했죠.
누군가는 무대에 서기 위해 대학을 갔고,
누군가는 화면 앞에서 사랑과 꿈을 키웠습니다.
세월이 흘러, 오늘은 오디션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슈퍼스타K, 프로듀스 101, 미스터트롯…
이름과 형식은 달라졌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누군가의 떨리는 목소리를 응원하고,
그 순간에 나의 이야기를 포개어 봅니다.
11화는 지극히 개인적인 첫사랑에서 시작됐습니다.
무한궤도, 그리고 신해철.
그 목소리는 나의 겨울을 밝히고,
나의 청춘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당신에게도 있겠지요.
밤마다 테이프를 되감던 그 가수,
라디오 사연을 보내며 몰래 울었던 그 노래,
한 줄 가사만 들어도 마음이 젖어드는 그 이름.
이 글을 읽고 난 다음, 당신의 ‘첫사랑 같은 노래’를 마음속으로 한 번 불러봐 주세요.
그 노래는 여전히 당신을 버티게 하고,
다시 내일을 걷게 할지도 모릅니다.
다음 일요일에도, 우리의 ‘추억열차’는 출발합니다.
표는 늘 당신 손에 있어요.
댓글 한 줄, 마음 한 편이면 충분합니다.
그대에게, 나에게, 우리 모두에게,
추억의 노래는 아직 남아 있으니까요.
<90년대 학번이라 죄송합니다> 작가 유혜성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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