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불빛 아래, 우리가 남긴 신호들>
연휴에 놀러 온 조카가 말했다.
“이모, 요즘 그거 진짜 재밌게 보고 있어,“
“드라마 새로 시작했어?”
“아니… 〈90년대 학번이라 죄송합니다〉 정주행 중이야.”
“뭐? 쑥스럽구먼.”
둘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조카는 서재를 이리저리 뒤지다 먼지 쌓인 브라운관 TV와 VHS 테이프, DVD 플레이어를 발견하곤 환호했다.
“이모네 집은 완전 90년대 전시관이야! 이런 게 아직 남아 있다고?”
내게는 단지 오래된 물건의 방이었지만,
누군가에겐 시간의 손잡이 같은 곳이 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요즘엔 비디오방 같은 데는 없잖아. 그냥 OTT, 넷플릭스지.”
그 말이 마음 어딘가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은밀하고도 심장이 콩닥거리던 그 시절의 공간들
그 공기와 어둠이 천천히 되감기듯 밀려왔다.
그리고 그때, 오래된 댓글 하나가 문득 떠올랐다.
(@적적 님 사연 각색)
“심장이 뛰지 않는 방은, 단 한 곳도 없었어요.”
그 한 줄은 시간을 여는 암호 같았다.
그는 동네 최초의 비디오방에서 야간 아르바이트를 했다.
간판엔 ‘24시간 영업’이 번쩍였고,
그 문구가 이상하리만큼 낭만적으로 보였다고 했다.
밤 10시부터 새벽 7시.
“밤새 영화를 볼 수 있다니, 세상에 이런 천국이?”
처음 며칠은 진짜 행복했다고 했다.
손님이 없을 땐 〈접속〉과 〈중경삼림〉을 번갈아 틀었다.
“그때는요, 그게 인생 같았어요.”
그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곧 알게 됐다.
이곳은 단순한 상영실이 아니라 사람들의 밤이 모이는 장소라는 걸.
그는 새벽 한 시가 넘으면 청소가 쉬운 안쪽 방부터 받곤 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 시간에도 너무 많은 사람들이 깨어 있었다.
“연인도, 혼자 온 사람도…
어떤 이는 울다 나오고, 어떤 이는 웃으며 들어갔죠.
모든 방은… 심장이 뛰고 있었어요.”
커튼 사이로 새어 나오던 불빛,
테이프 돌아가는 기계음,
숨죽인 웃음과 낮은 속삭임들.
새벽 세 시, 손님이 모두 빠지면
그는 빈 방에 들어가 불을 끄고
그날 가장 많이 대여된 〈봄날은 간다〉를 틀었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헤드 돌아가는 소리가 그의 심장 박동처럼 규칙적으로 울렸다.
“비디오방은 그리움, 도피, 사랑, 회복, 고백이
한꺼번에 일어나는 현장이었어요.”
그의 말이 천천히 잦아드는 동안,
내 마음엔 묘한 전류가 흘렀다.
나는 생각했다.
지금의 우리도 어쩌면 댓글이라는 커튼 뒤에서
서로의 이야기를 몰래 보고 있는 건 아닐까.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여전히 사랑을 배우고 있다.
그때 조카가 말했다.
“이모, 댓글 속에서 그 방들이 다시 불 켜지는 느낌이야.”
정말 그랬다.
비디오방의 불빛은 꺼졌지만,
그 안에서 뛰던 심장들은 여전히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살아 있었다.
그의 문장처럼,
“심장이 뛰지 않는 방은, 단 한 곳도 없었어요.”
그리고, 꺼지지 않았던 그 시절의 시간처럼
커튼 너머 어딘가에서
또 하나의 시그널이 조용히 깜빡였다.
(@Sammy Jobs 님 사연 각색)
“요즘 글을 못 써요.
카페 운영, 커피 페스타, 창업 엑스포, 손님 응대… 하루가 훌쩍 가버리죠.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 〈90년대 학번이라 죄송합니다〉만은 꼭 읽어요.
이 글은 제게 ‘시그널’ 같아요.
띠–띠–딸깍.
버튼이 눌릴 때마다, 그 시절 문이 열려요.”
그는 춘천의 골목 끝, ‘핸드썸메이드 커피로스터스‘의 주인이다.
문을 열면 볶아지는 원두 냄새와 LP의 재즈가 섞인다.
스팀 머신이 숨을 내쉬는 새벽이면,
그의 귀에는 여전히 90년대의 주파수가 잡힌다.
94학번.
명륜동에서 고등학교를 다녔고, 대학 시절은 혜화동 언덕에 묻혀 있었다.
종로, 서울극장, 피카디리, 단성사.
그의 청춘 지도는 언제나 그 일대였다.
“피카디리 계단에서 첫사랑을 기다렸어요.
영화표 두 장을 꼭 쥔 채,
누군가의 이름을 속으로 수백 번 불렀죠.
지금 생각하면 그건 기다림이 아니라 믿음이었어요.”
첫사랑은 노스캐롤라이나 그린빌로 떠났다.
그는 잠시 웃었지만, 그 웃음은 오래된 라디오의 잡음처럼 떨렸다.
“이별했지만, 헤어짐이 아니었던 사랑이었어요.
시간이 흘러도, 어떤 사람은 마음 안에서 계속 연결돼요.
마치 시그널처럼요.”
그의 청춘은 락카페의 밤으로 이어진다.
헤비메탈이 쏟아지고, 맥주잔이 부딪히고, 담배연기 속에 웃음이 피어났다.
그는 기타를 치며 노래를 만들었다.
노래방 부스는 좁았고, 무릎이 닿을 듯한 거리.
한 곡이 끝나면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 어색한 공기 사이로 사랑이 시작됐다.
첫 노래는 김현식의 〈사랑했어요〉.
이별할 때도, 같은 노래로 울었다.
그의 목소리엔 아직 그 음정의 떨림이 남아 있었다.
“삐삐 오면요, 다 저한테 물어봤어요.
‘야, 여기 어디야?’
당구장, 락카페, 호프집 번호를 다 외웠거든요.
누가 누구에게 삐삐 쳤는지도 다 알았죠.”
그가 웃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90년대판 ‘읽씹’이었어요
이제 그는 매일 다른 온도로 원두를 볶는다.
손님이 끊긴 오후,
창밖에 비가 내리고,
LP 위로 바늘이 닿는 소리.
그 사이로 잔잔한 재즈가 흐르고,
마음 어딘가에서 여전히 울리는 그 시절의 신호음.
“그때가 있어서, 지금을 버텨요.”
그는 커피잔을 닦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의 말이 스며드는 순간,
나는 그가 남긴 댓글이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시간을 건너온 하나의 무전 신호라는 걸 알았다.
띠–띠–딸깍.
그 소리가 들리는 순간,
피카디리 계단엔 다시 불이 켜지고
첫사랑이 천천히 내려온다.
비에 젖은 흰 셔츠, 망설이는 미소.
그의 심장은 아직도 그 장면의 리듬을 기억하고 있었다.
비디오방의 불빛이 꺼진 자리에
이젠 커피 향이 남았다.
어떤 추억은 향으로,
어떤 사람은 주파수로 남는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의 시간에서 여전히 송신 중이다.
커피 머신의 스팀이 한 번 더 내뿜는다.
그의 시그널은 오늘도,
그때처럼,
아직 연결 중이다.
(@서윤 님 사연 각색)
IMF가 닥치고, 분양 아파트 대출이자가 월급을 삼켰다.
그녀는 통장을 열 때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극장은 사치였다. 대신 집으로 향했다.
퇴근길엔 비디오 가게에 들러
테이프 몇 개를 빌리고, 맥주와 오징어를 샀다.
커튼을 치고 불을 낮춘 채,
거실은 어느새 조용한 영화관이 되었다.
창밖엔 봄비,
방 안엔 줄리아 로버츠의 목소리.
〈노팅 힐〉 속 대사 한 줄이
그녀의 마음을 잠시 붙잡았다.
“내가 단지 한 여자라서,
한 남자 앞에 서 있는 거예요.”
그 말을 듣고 이상하게 눈물이 멈췄다.
슬픔 대신, 묘한 안심이 밀려왔다.
그 시절의 외로움은
늘 스크린 속에서 천천히 녹아내렸다.
그때는 드라마가 세상의 중심이었다.
주말 8시, 〈사랑이 뭐길래〉가 시작되면
도로의 차들이 줄고,
식당 불빛도 하나둘 꺼졌다.
사람들은 모두 TV 앞에 모였다.
김혜자가 부르던 ‘타타타’가 온 도시를 울렸고,
가정마다 아버지는 신문을 접고,
어머니는 부엌일을 멈췄다.
극 중 아들 이름은 ‘대발이’.
드라마가 인기를 끌자,
온 동네 강아지들이 하나같이 대발이가 되었다.
“대발아, 밥 먹자!”
그 소리가 저녁마다 골목을 메웠다.
아버지의 잔소리도, 어머니의 한숨도
그 시절엔 모두 한 편의 드라마 장면 같았다.
퇴근 후엔 종로 3가 단성사 맞은편 ‘드시매’ 경양식집.
DJ 오빠가 틀어주던 〈호텔 캘리포니아>에
포크를 들던 젊은 날의 그녀.
그 노래는 세상에서 가장 쓸쓸하고,
또 가장 멋진 음악이었다.
이제는 PC통신도, 싸이월드 벽지도 사라졌지만
도토리를 모아 BGM을 고르던 그 설렘은 아직 남아 있다.
‘내 방’이라 불렀던 작은 창 안에
감정을 하나씩 붙이던 시절.
그녀는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비디오테이프는 단순한 필름이 아니었다고.
그건 우리가 버티던 방식이었다고.
영화가 끝나도, 삶은 계속 재생되었다고.
그때의 ‘집으로 간 영화관’은,
어쩌면 우리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 만든
가장 조용한 피난처였는지도 모른다.
(@KOSAKA 님 글 각색)
그날 밤, 노트북을 덮으려던 순간
메일함에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제목은 짧았다.
“오사카에서 보내는 감상문입니다.”
첫 문장부터 이상하게 따뜻했다.
“저는 90학번입니다. 그래서 이 브런치북을 읽는 동안
‘서평’이라는 말이 자꾸 어색해졌습니다.”
그의 글은 비평이 아니었다.
읽는 대신, 기억의 거리를 걷는 여행이었다.
“활자를 따라가는 독자가 아니라,
기억의 지도를 다시 펼쳐 걷는 보행자였습니다.”
문장 사이로 오래된 공기가 스며 나왔다.
전화박스의 금속 냄새,
주머니 속 동전의 온기,
호출기 버튼을 누를 때의 미세한 떨림.
오사카의 밤공기 속,
편의점 자동문 ‘삑–’ 소리,
머그컵 내려놓는 ‘탁–’ 소리가
그의 문장을 은근하게 데우고 있었다.
“그땐 기다림으로 친밀해졌죠.
삐삐 486, 1004…
시티폰의 사정거리는 마음보다 늘 짧았습니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나는 종로서적 앞 시계탑 아래 서 있었다.
그는 오사카에 있었지만,
우린 같은 공기를 들이마시던 청춘들이었다.
“기술은 바뀌었지만, 질문은 같아요.
나는 누구와, 어떻게 연결될 것인가.”
그는 이름들을 불렀다.
종로서적, 피맛골, 하이퍼텍나다, 압구정의 저녁빛.
그 지명들이 문장 사이로 반짝일 때,
나는 마치 그와 같은 거리를 걷는 기분이 들었다.
우린 서로를 모른 채
서로의 과거 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지금은 같은 화면 안에서 다시 만난다.
“〈90년대 학번이라 죄송합니다〉는
과거를 유리장식장에 고정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쓰기로 번역해 줍니다.”
그 한 문장은
30년 전의 시간을 지금으로 끌어오는 듯했다.
‘90년대 학번이라 죄송합니다’
사과 같지만, 사실은 자부심의 또 다른 이름.
그의 글은 비평이 아니라 회신이었다.
30년 전 끊긴 무전기에 대고
“지금, 들려요.”
하고 속삭이는 방식의.
“우리는 만남을 위해 좌표를 외웠고,
부재를 견디기 위해 징표를 남겼습니다.”
지금 그는 오사카에 산다.
회사 일로 머물고 있지만,
그 도시는 어느새 또 하나의 청춘처럼 그를 품고 있다.
하루의 끝엔 커피 한 잔을 내리고,
그 향 속에서 종로의 공기와 압구정의 빛을 떠올린다.
“이 연재를 읽는 경험 자체가 하나의 연결 의식입니다.
과거의 접속을, 현재의 접속으로 번역하는 일.”
노트북을 닫자,
카페 머신의 스팀 소리,
창문을 두드리는 빗방울,
종로서적 앞의 풍경이 한 화면에 겹쳐졌다.
나는 천천히 답장을 썼다.
“코사카 작가님,
당신의 편지는 서평이 아니라 또 하나의 연결 기록이었습니다.”
그의 문장들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 주파수를 따라 흐르고 있었다.
오사카의 밤, 서울의 새벽,
그리고 브런치의 화면 위에서.
어떤 글은 읽히는 것이 아니라, 회신된다.
어떤 인연은 끊어지지 않고, 변주된다.
그의 커피 향 사이로,
그 시절의 전파가 다시 깜빡인다.
그 시절의 필름은 지금도 재생 중이고,
그 시절의 전파는 아직도 송신 중이다.
https://brunch.co.kr/@kosaka/371
(*작가님의 글을 읽으며, 저는 ‘읽히는 독자’가 아니라 ‘함께 걷는 동행자’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기억의 지도를 다시 펼쳐 걷는 그 여정 속에서, 잊었던 감정의 주파수가 되살아났어요.
그 불빛은 과거의 낭만이 아니라 지금의 연결을 회복시키는 조용한 위로였습니다.
이렇게 시대와 마음을 잇는 문장으로 다시 만나게 되어 고맙습니다.)
(@감성반점 님 사연 각색 · 부산)
서울은 손에 꼽을 만큼밖에 가보지 않았지만,
〈90년대 학번이라 죄송합니다〉에 나오는 지명들은 하나같이 익숙했다.
부산에도, 우리의 명당이 있었으니까.
남포동파와 서면파가 나뉘던 시절,
그는 단연 남포동파였다.
광안리가 ‘야타족’의 무대였다면,
미화당백화점 뒤 고갈비 골목 2층 다락방은 그들의 본거지였다.
기타 한 대, 노래 한 곡, 값싼 소주 한 병.
짭조름한 바람이 창문을 두드리고,
밤은 언제나 너무 짧았다.
용두산공원, 일명 ‘용골’.
그곳은 즉석만남의 성지였다.
“차 한잔 하실래요?” “술 한잔 하실래요?”가 정석이었지만,
그들 중엔 유난히 기억에 남는 친구가 있었다.
“저~ 시간 되시면… 돼지국밥 한 그릇 하실랍니까?”
그 말 한마디에 여자들은 피식 웃었고,
의외로 승률이 좋았다.
물론, 마지막엔 언제나 잘생긴 놈들이 이겼다.
그건 지금도 변하지 않는 진리다.
IMF의 바람이 불어도
그의 청춘은 쉽게 꺼지지 않았다.
낡은 기타를 붙잡고 노래를 만들었고,
그렇게 30여 년을 금융맨으로 살아왔다.
요즘은 자격증 공부로 바쁜 나날을 보내지만,
일주일에 한 번,
그때의 자신을 다시 만난다.
“시간을 다시 돌릴 수 있다면요?”
누군가 묻는다면,
그는 웃으며 대답할 것이다.
“당연히, 그때로 갑니다.”
비디오방의 불빛이 꺼지고,
춘천의 커피 향이 가라앉고,
오사카의 무전이 조용해질 때,
부산의 밤은 여전히 반짝인다.
‘돼지국밥 한 그릇 하실랍니까?’
그 한마디는
지금도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뜨겁게 끓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뜨거움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이 도시의 밤을,
우리의 청춘을,
조용히 데우고 있다.
조카가 원고를 다 읽더니,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이모, 이거… 영화네.”
그녀는 잠시 눈을 깜빡이며 덧붙였다.
“근데 그때 그 90년대는 도대체 뭐야?
왜 그렇게 다들 그리워하고,
아직도 마음속에 살아 있는 거야?”
그 질문엔 단순한 호기심보다
조금의 아쉬움이 섞여 있었다.
자신이 모르는 시대에 대한,
조용한 부러움 같은 표정이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창밖을 바라봤다.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오후빛,
저마다의 주파수를 품은 방들,
그리고 화면 어딘가에서 깜박이는 신호.
조카가 다시 말했다.
“오늘의 우리도 언젠가
누군가에게는 ‘그 시절’이 되겠지?”
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지금도 잘 녹음해 두자.
우리가 보낼 다음 신호를 위해.”
비디오방의 불빛,
오사카의 커피 향,
춘천의 로스터기,
부산의 돼지국밥 냄새,
그리고 서울의 밤하늘까지
그 모든 건
지금의 우리에게 닿은
하나의 주파수였다.
커피잔이 식어가고,
빛은 천천히 저물어갔다.
띠–띠–딸깍.
신호음이 들린다.
어디선가 아주 작게,
오래된 전파 하나가
시간의 벽을 통과한다.
그 미세한 떨림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서로를 향해 송신 중이다.
To. 추억 열차에 탑승하신
사랑하는 독자님들께
황금연휴 특집,
〈90년대 학번이라 죄송합니다〉의 ‘독자 사연 편’에
오늘도 함께 탑승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이번 여정에는 특히
오사카에서 서평을 보내주신 코사카 작가님,
부산에서 뜨거운 청춘을 들려주신 감성반점 작가님,
그리고 댓글창을 환하게 밝혀주신
수많은 작가님과 독자님들께
깊은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이 연재의 댓글창은 언제나 빛이 납니다.
그곳에는 여전히 자기 시대를 기억하고,
누군가의 문장을 응원하며,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저에게 ‘90년대’란,
단지 과거를 회상하는 시절이 아니라
지금을 단단히 살아가게 해주는 에너지원입니다.
그때의 음악, 거리, 냄새, 말투,
그리고 미처 표현하지 못했던 마음들.
우리는 그 기억을 다시 꺼내
‘그때 못다 한 이야기’를
지금의 언어로 완성해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90년대를 그리워하는 이유는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때처럼 순수하게, 뜨겁게, 진심으로
다시 지금을 살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요.
다음 정차역에는
또 다른 사연과 새로운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열차는 멈추지 않습니다.
당신의 기억, 당신의 문장, 당신의 노래가
이 추억열차의 다음 연료가 됩니다.
댓글창이라는 창문 너머로
당신의 ‘그 시절’을 들려주세요.
그 사연이 주인공이 되어
함께 웃고, 함께 회상하고, 함께 기록하겠습니다.
비디오방의 불빛,
춘천의 커피 향,
오사카의 밤공기,
부산의 돼지국밥 냄새,
그리고 서울의 밤하늘 아래
당신이 남긴 한 문장까지
모두 이 열차의 창문 밖에서
아직도 반짝이고 있습니다.
오늘도 함께 타주셔서 고맙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연결 중입니다.
〈90년대 학번이라 죄송합니다〉 작가
유혜성 드림
P.S.
그 시절을 기억하는 모든 이들에게,
우리의 다음 신호가 닿기를.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comet_you_
https://www.threads.com/@comet_you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