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브런치 작가 유혜성님의 브런치북 <90년대 학번이라 죄송합니다>에 대한 짧은 감상문입니다.
저는 90학번입니다. 그래서 이 브런치북을 읽는 동안 ‘서평’이라는 말이 자꾸만 어색해졌습니다. 평을 더하는 대신, 오래전에 같은 거리를 걷고 같은 신호를 주고받던 사람끼리 주고받는 인사가 먼저 떠올랐습니다. 문장을 읽는 동안 저는 활자를 따라가는 독자가 아니라, 기억의 지도를 다시 펼쳐 걷는 보행자가 되었습니다. 낡은 전화박스의 금속 냄새, 주머니 속 동전의 온기, 손바닥에서 미묘하게 떨리던 호출기의 진동이 페이지 가장자리에서 되살아났습니다.
당시의 우리 세대는 기다림으로 친밀해졌습니다. 삐삐에 486이나 1004를 남기고, 공중전화의 수화기를 귀에 꼭 대고 짧은 용기와 길어진 숨을 교환했습니다. 시티폰의 사정거리는 마음보다 늘 짧았고, 약속의 좌표는 서점 앞 시계탑이나 지하상가 입구였습니다. 만나지 못한 날엔 다음 약속을 더 단단히 묶었습니다. 연결의 기술이 제한되던 시절이었지만, 그 제약이 오히려 관계의 결을 깊게 만들었음을 이 브런치북을 통해 다시 확인했습니다.
장소의 결도 반가웠습니다. 종로서적 앞의 인파, 피맛골의 바닥에 맺히던 눅눅한 공기, 압구정 유리창 너머의 저녁빛, 하이퍼텍나다로 내려가는 어두운 계단. 저는 그 계단을 내려가며 표를 쥔 손끝에서 미세한 떨림을 느꼈고, 영사가 멈춘 뒤에는 한 블록 더 걸었습니다. 그 걷기에는 목적지가 아니라 여운이 있었습니다. 이 연재는 그 여운의 온도를 잘 느끼게 해줍니다. 스마트폰 화면을 스와이프하는 감각으로는 도저히 대체되지 않는 어떤 시간이 있었고, 그 시간은 도시의 여백과 맞물려 우리를 더 또렷하게 만들었습니다.
매체의 순환도 익숙했습니다. 라디오를 켜면 새벽의 공기를 포개어 주던 목소리가 있었고, PC통신에는 두 시 이후에만 활기를 띠는 대화방이 있었습니다. 익명과 별명이 삶의 전술이던 시절, 우리는 보이는 이름보다 보이지 않는 마음의 문법을 먼저 익혔습니다.
아이러브스쿨이 불러온 재회의 열기, 프리첼과 MSN의 창, 싸이월드의 배경음악까지——지금의 플랫폼이 사용하는 ‘접속’의 언어는 그때의 세계를 형식만 바꾸어 이어 쓰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이 브런치북이 반가운 이유는, 과거를 유리 장식장에 고정하지 않고 오늘의 쓰기(브런치라는 현재의 접속)로 자연스럽게 번역해낸다는 데 있습니다.
세대의 자의식 역시 또렷합니다. ‘90년대 학번이라 죄송합니다’라는 문장은 자조처럼 시작해도, 끝내 사과하지 않겠다는 작은 선언으로 들립니다. IMF 전후의 공기, 비정형의 취업, 얇은 벽과 낮은 책상, 늘 모자라던 예산. 결핍과 불안은 우리를 때로 치열하게, 때로는 우회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연재는 헤맴을 실패로, 결핍을 수치로 묶지 않습니다. 그 모든 궤적의 리듬이 오늘의 생활 감각을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같은 세대로서 저는 이 태도가 고맙습니다. 세대론의 과장 대신 생활의 단면으로, 낭만의 과잉 대신 감각의 디테일로 말하려는 선택 말입니다.
읽다 보면 관계의 기술이 바뀌어도 마음의 문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만남을 위해 도시의 좌표를 외웠고, 부재를 견디기 위해 작은 징표를 남겼습니다. 지금 우리는 메시지함을 비우고 알림을 잠그며, 과잉 접속 속 고립을 조절합니다. 방식은 달라졌지만 질문은 같습니다. “나는 누구와 어떻게 연결될 것인가.” 이 연재의 회상이 과거로 도피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옛 도구를 이야기하면서도 다시 오늘의 접속 예절과 감정의 보관법을 묻기 때문입니다.
소품과 습관의 디테일도 오래 남습니다. 주머니에서 엉키던 볼펜과 동전, 약속장에 적힌 환승 메모, 계산대 앞에서 갑자기 고른 시집 한 권, 라디오 사연 코너에 보냈다가 읽히지 못한 짧은 글. 그 모든 것이 지금의 “연재”와 “발행”을 미리 연습하게 해준 노트였습니다. 과거의 저에게 쪽지였던 것은, 지금의 저에게 포스트잇처럼 붙어 있는 문장 초안이 되었습니다.
이 브런치북을 덮고 나면 오래된 플레이리스트를 뒤지고, 기억 속 동선을 지도로 확대해 보게 됩니다. 종로에서 광화문을 지나 시청으로 걷던 발걸음, 압구정 로터리에서 강북으로 건너오던 밤의 바람, 그 틈에 스며 있던 한두 문장이 다시 선명해집니다.
저는 오늘의 플랫폼에서 이 연재를 읽는 경험 자체가 하나의 ‘연결 의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의 접속을 현재의 접속으로 번역하는 일, 그 번역을 통해 세대의 기억을 과거형으로 가두지 않는 일. 같은 90년대 학번으로서 이 시도가 반갑고 든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