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브런치 작가 슈리엘 아샬라크님의 브런치북 <모니터의 여행자>에 대한 저의 짧은 서평입니다.
브런치북 「모니터의 여행자」는 상실을 겪은 한 가족을 다루는 이야기입니다. 작가는 설명을 길게 늘어놓지 않습니다. 인물의 몸짓, 방에 남은 물건, 불빛과 그림자 같은 장면을 앞세워 독자가 스스로 의미를 짚어가게 합니다. 그래서 읽는 내내 마음이 한쪽으로 쏠리지 않습니다. 누구의 잘못을 따지기보다, 같은 순간을 다른 눈으로 다시 보게 됩니다.
여기에는 세 사람이 있습니다. 새엄마인 화자, 말을 거의 하지 않는 아이 시아, 그리고 말을 아끼는 남편. 세 사람은 한집에 살지만 조금씩 다른 속도로 하루를 보냅니다. 작가는 그 엇박자를 섣불리 고치려 하지 않습니다. 대신 식탁 위 그릇의 자리, 문지방을 지나는 발끝, 화면 앞에 앉는 자세처럼 작고 구체적인 단서들을 차곡차곡 쌓습니다. 그 단서들이 모여 어느 순간 독자의 생각을 바꿉니다.
화자는 남편과 재혼해 아이 시아와 함께 살게 됩니다. 시아는 거의 말하지 않고, 대부분의 시간을 모니터 앞에서 보냅니다. 화자는 이유를 알지 못한 채 불안과 거리감을 느낍니다. 그러던 중 베란다에서 아슬아슬한 순간이 지나가고, 집 안에 남은 물건과 영상 기록, 친구의 편지 같은 단서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냅니다.
처음에는 냉담해 보였던 제스처가 다른 뜻을 품고 있었을지 모른다는 가능성이 열리면서, 화자는 시아의 행동을 새롭게 읽어 보기 시작합니다. 이야기는 바로 그 ‘다시 읽기’가 가족을 어떻게 바꾸는지 보여주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이 브런치북은 셀레스트 응의 『내가 너에게 절대로 말하지 않는 것들』을 생각나게 합니다. 두 작품 모두 “말하지 못한 것들”이 가족 안에서 어떻게 오해와 단절을 낳는지 따라가며, 물건과 일상 장면을 단서처럼 쓴다는 점이 닮았습니다(편지·목걸이·책상 위 소품 등).
다만 응의 소설은 1970년대 오하이오를 배경으로 중국계 미국인 가족의 인종·성별 기대가 핵심 축을 이루고, 가족 구성원 각자의 시점이 교차하며 소녀의 죽음을 둘러싼 원인을 추적하는 쪽으로 나아갑니다. 반면 「모니터의 여행자」는 새엄마 1인칭에 가까운 시선으로 현재의 생활 단서들을 모아 해석을 바꾸는 데 무게를 두고, 게임·모니터라는 동시대 매체를 “문제”가 아니라 “마음이 돌아올 좌표”로 재배치합니다.
응의 작품이 사회적 압력과 수사적 구조를 통해 비극의 원인을 파고든다면, 이 브런치북은 집 안의 순서를 손보고 약속을 만들어 가는 과정을 통해 관계의 회복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다시 돌아와서, 이 연재의 강점은 사건을 키우는 대신 증거가 되는 장면을 정확히 고르는 데 있습니다. 초반에 스쳐 지나간 이미지가 뒤쪽에서 다른 의미로 돌아옵니다. 독자는 “그래서 그때 그게 필요했구나” 하고 뒤늦게 이해합니다. 작가는 그때조차 해명을 늘어놓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 발 물러서서 독자가 스스로 결론을 찾도록 자리를 비워 둡니다. 그 여백이 이야기의 신뢰를 만듭니다.
게임과 모니터를 바라보는 관점도 눈에 띕니다. 많은 작품이 화면을 문제의 근원으로 다루지만, 이 연재는 다르게 접근합니다. 화면은 현실을 지워 버리는 구멍이 아니라, 마음이 한 번 숨을 고르고 돌아오기 위한 좌표로 제시됩니다.
그래서 화면을 무작정 끄거나 치우는 장면이 나오지 않아도 답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약속을 세우고 지키는 모습이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옵니다. 무엇이 옳은지 단정하기보다, 무엇이 지금 가능한가를 먼저 묻는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문장은 정돈되어 있고 과장되지 않습니다. 1인칭 시점의 독백이 중심이지만, 시야가 좁아지지 않도록 감각 정보를 적절히 섞습니다. 빛이 번지는 방향, 바닥의 질감, 손이 머무는 시간 같은 요소들이 장면을 붙들어 줍니다. 대사는 꼭 필요할 때만 나옵니다. 이 절제가 이야기를 가볍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 줄의 말이 등장할 때 그 무게가 또렷해집니다.
인물의 변화는 생활 속 동작으로 표현됩니다. 화자는 답을 캐묻는 질문보다 곁을 지키는 말을 선택합니다. 그러자 식탁의 자리가 달라지고, 방문을 여닫는 방식이 달라지고, 화면 앞에 앉는 시간이 달라집니다. 작가는 이 작은 변화를 서사의 중심으로 끌어올립니다. 누군가를 설득하는 명장면 대신, 하루의 순서가 새로 정리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처음엔 낯설었던 집이 조금씩 살 만한 공간으로 바뀝니다.
읽는 재미는 오해의 방향이 바뀌는 순간에서 가장 크게 생깁니다. 처음에는 거부처럼 보였던 손동작이 사실은 구조 신호였을 수도 있다는 단서가 나올 때, 독자는 앞쪽의 장면들을 마음속에서 다시 배열합니다. 그 재배열이 억지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초반부터 필요한 조각들이 제자리에 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치밀함이 연재의 힘입니다.
브런치라는 플랫폼과도 궁합이 좋습니다. 회차마다 제목이 분명하고, 글 말미에 다음 회를 예감하게 하는 한 줄이 붙습니다. 모바일 화면에서 읽어도 문단이 길게 늘어지지 않아 집중이 흐트러지지 않습니다. 어디에서 읽기 시작해도 앞뒤를 다시 찾아가게 만드는 구성입니다. 독자는 자연스럽게 첫 회로 돌아가 처음의 장면을 새 의미로 다시 보게 됩니다.
마지막 회를 앞둔 지금, 독자로서 바라는 점은 단순합니다. 이미 쌓인 단서만으로도 결말은 충분히 설득력을 갖출 수 있습니다. 생활에 관한 약속이 분명한 한 문장으로 확인되고, 그 말이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는 모습이 짧게라도 담긴다면 어떨까요. 예를 들어 화면을 쓰는 시간과 방법을 함께 정하거나, 귀가 이후의 순서를 새로 맞추는 식으로 말이죠. 큰 선언이나 사건보다 보다 그런 합의가 오래 남습니다.
결국 「모니터의 여행자」가 보여주는 것은 타인의 장면에 섣불리 레테르를 붙이지 않는 법입니다. 같은 행동도 맥락이 달라지면 뜻이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 그 당연함을 다시 배우게 합니다. 책을 덮고 나면 누구나 자신의 생활로 돌아가 비슷한 순간을 떠올릴 것입니다. 현관에서 나눈 한마디, 화면 앞에서 지킨 약속, 식탁에 둘러앉은 짧은 시간. 이 작품은 그 몇 장면만으로도 집 안의 질서가 달라질 수 있음을 차분하게 보여 줍니다.
그래서 읽고 나면 마음이 가벼워집니다. 누군가를 바꾸려 애쓰기보다, 같이 살 수 있는 방식을 찾는 일이 먼저라는 점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장이 그 방향으로 닿는다면, 이 연재는 오래 기억될 것입니다. 제목이 말하는 ‘여행’이 화면을 지나 생활의 새로운 순서로 연결되는 순간, 독자는 자신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한 줄을 얻게 됩니다. 그 한 줄이 내일의 집 안을 조금 다르게 만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