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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학번이라 죄송합니다

12화 X세대의 사랑법, 그리고 지금

by 유혜성

12화 <X세대의 사랑법, 그리고 지금>


조카의 질문, 세대의 질문


“이모, 그때는 진짜 ‘고백’만 하면 다 사귀었어?”


조카의 질문은 늘 돌직구다. 나는 한참 웃다가 대답을 미뤘다.

아마 조카 눈엔 90년대가 판타지 영화 속 ‘마법부’ 같은 세계일지도 모른다.


“꼭 그렇진 않아. 하지만 우리 세대에도 나름의 주문이 있었지.

라디오, 삐삐, 잡지, 비밀 방명록… 다 마법 같은 도구였거든.”


“마법?”


“그래, 너희가 앱에서 ‘좋아요’를 누르는 게 주문이라면,

우리는 주파수를 맞추고, 숫자 암호를 보내고,

비밀글을 남기는 게 주문이었단다.”


나는 잠시 조카를 바라보다가,

내 청춘의 심장을 대신해 뛰어주던 작은 기계를 떠올렸다.

손바닥만 한 라디오.

나는 그 시절, 전파 속에 살던 아이였다.

1. 라디오의 밤, 고백의 주파수


라디오는 그 시절 우리의 인터넷이었다.

80~90년대 청춘의 심장은 밤마다 주파수를 타고 뛰었고,

나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라디오 키즈’였다.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로 감성을 배우고,

정은임의 〈FM 영화음악〉에서 영화의 언어를 익혔다.

새벽의 잔향 속 그녀가 읊조리던 영화 대사 한 줄은

다음 날 내 일기를 바꿔놓곤 했다.

낮에는 김기덕의 〈2시의 데이트〉에서 위트를,

밤에는 김광한의 팝 프로그램에서 세계를 익혔다.

라디오 앞에서 ‘김기덕 vs 김광한’을 번갈아 듣던 시절.

그 시간 자체가 이미 청춘의 교과서였다.


무엇보다 배철수의 〈음악캠프〉는 나의 생활표였다.

1990년 시작된 그 방송은 저녁 여섯 시가 되면

자동으로 켜지는 신호 같았고,

하루를 정리하는 나만의 종소리였다.


지금은 아이돌 시스템의 설계자이자

SM엔터테인먼트의 창립자로 불리는 이수만도,

내게는 먼저 목소리로 다가온 DJ였다.

스튜디오 부스 안에서 흘러나오던 그의 차분한 멘트는

늘 새로운 팝을 소개해 주던 ‘DJ 오빠’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그 목소리들은 멘토이자 친구였고,

때론 남사친처럼, 때론 연인처럼 다가왔다.


사연을 보낸다는 것도 일종의 의식이었다.

바른손 팬시 전문점에서 예쁜 엽서를 사고,

용돈을 모아 편지지에 글씨를 꾹꾹 눌러 담았다.

조금이라도 눈에 띄고 싶어 삐뚤빼뚤 그림을 곁들이기도 했다.

처음엔 우편, 그다음엔 팩스와 PC통신 게시판,

나중엔 휴대전화 문자, 그리고 지금은 ‘MBC mini’ 앱.

방식은 바뀌었지만, 누군가에게 마음을 건네려는 본질은 늘 같았다.


라디오에 내 사연이 흘러나오는 순간,

시간은 멈춘 듯했고, 우주는 나만을 향해 조명을 비추는 듯했다.

DJ의 목소리로 내 고민이 읽히고,

짧은 조언이 전파를 타고 번져올 때면

그건 상담이자 위로, 그리고 작은 기적이었다.

책, 음반, 영화 예매권 같은 선물은

오늘날의 인스타 이벤트 당첨보다 더 큰 전율이었다


그리고 사랑도 전파를 탔다.

“OO라는 남학생, OO라는 여학생을 오래전부터 좋아해 왔대요.”

그 한 문장이 전파를 타고 흘러나오는 순간,

방 안의 공기는 고요히 멈추었고,

내 심장은 낯선 이름 하나에 요동쳤다.


나 역시 라디오를 통해 고백을 받은 적이 있었다.

사연이 흘러나온 다음 날이면, 책상 위엔 빨간 장미와 LP판이 놓여 있었고,

하굣길 신발장에는 초콜릿이나 쪽지가 몰래 숨어 있곤 했다.


같은 반 친구나 여후배들 사이에서 은근히 인기를 얻었던 나는,

그 시절 유행처럼 번졌던 ‘진한 우정 고백’을 자주 받곤 했다.

사랑이라기보다는 서로를 특별한 존재로 여기는 마음,

지금 말로 하면 ‘솔메이트’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선배, 저는 선배가 제 진짜 사랑 같아요.”

“친구야, 우리 영혼의 단짝 맞지?”

직접 들으면 쑥스럽기만 했던 말들도,

라디오 사연으로 흘러나오면 이상하게 더 간질간질하게 다가왔다.

나는 그 낯선 떨림과 부끄러움을 고스란히 품은 채 자라났다.

대학생이 된 뒤의 사랑은 어딘가 서툴렀다.

나를 좋아하는 이도 있었지만,

고백해 놓고 이내 떠나거나, 가까워지려 하면 멀어졌다.

그래서일까, 나는 무대 위 스타들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현실의 어긋난 인연을 달래며,

그들의 노래 속에 나의 사랑을 대신 담았다.


90년대, 신해철은 내 정신적 지주였다.

새벽을 찌르는 그의 직설은

라디오만이 줄 수 있는 가장 생생한 사유였고,

〈고스트스테이션〉의 귀환은

다시 한번 내 청춘을 흔들어 깨웠다.


그리고 유희열이 DJ이던 어느 날,

방송 말미에 흘러나온 한마디.

“솔로부대 모여라.”

나는 노트북을 덮고 곧장 여의도 MBC 앞으로 달려갔다.

이미 같은 주파수로 호출된 얼굴들이 거리에 가득했다.

거창한 로맨스가 성사되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 밤의 들뜸 자체가 이미 사랑의 이벤트였으니까.


라디오는 내 사춘기의 학교였고, 사랑의 교과서였다.

음악, 영화, 팝, 상담, 퀴즈, 그리고 고백까지.

한 시대의 사랑법이 전파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지금 우리가 앱에서 하트를 누르고, DM을 주고받는 것처럼,

그때 우리는 주파수를 맞추고, 엽서를 쓰고, 사연을 띄웠다.

달라진 건 도구뿐,

사랑을 부르는 신호는 언제나 같았다.

2. 잡지와 영화, 연애의 교과서


“이모, 그때는 영화 뭐 봤어?”

조카의 질문은 언제나 호기심으로 가득하다.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웃으며 대답했다.

“〈접속〉, 〈편지〉, 〈약속〉… 우리 세대의 로맨스 교과서였지.”


얼마 전 일본 여행을 다녀온 조카가 눈을 반짝였다.

“이모, 나 <러브레터> 촬영지 다녀왔어! 홋카이도 오타루 알지? 영화에 나왔던 언덕이랑 운하 거리, 도서관 건물도 그대로 있더라니까. 눈 내리던 그 장면처럼 ‘오겡끼데스까?’ 하면서 사진 찍었지!”


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이모 때는 그 영화가 정식 개봉도 안 돼서 비디오테이프로 몰래 돌려봤단다.

VHS 밀반입, DVD 구워서 친구들끼리 돌려보던 시절이었지.

아직도 집 어딘가에 그 테이프가 남아 있을 거야.”


“헐, 완전 보물관이네!” 조카가 웃으며 말했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그 영화 주인공, 나카야마 미호는 우리 세대의 첫사랑 같은 배우였어.

얼마 전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 한편이 덜컥 내려앉더라.

네가 그 영화에 빠져 홋카이도까지 갔다 왔다니, 참 묘하다.

우린 작은 브라운관으로 몰래 보다가, 나중에 커다란 스크린으로 다시 만났거든. 그 감동을 지금도 잊을 수 없어.

스크린 위의 오타루는, 조용히 눈이 내리던 그 장면처럼… 훨씬 넓고, 훨씬 슬펐어.”


조카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근데 일본 영화 말고, 또 뭐 봤어?”


“우리 세대를 휩쓴 건 단연 홍콩 영화였지.”

나는 기억을 더듬었다.

“남학생들은 성룡, 이연걸, 주윤발이 나오는 액션에 열광했고,

여학생들은 왕가위 감독의 멜랑콜리한 화면에 빠져들었어.

〈중경삼림〉, 〈타락천사〉 같은 작품 말이야.

양조위, 금성무, 장국영, 유덕화… 포스터만 붙어 있어도 가슴이 뛰던 별들이었지.

여배우들은 장만옥, 왕조현, 그리고 영화 속에서 흘러나오던 〈캘리포니아 드림> 같은 OST가 우리의 심장을 흔들었고.”


홍콩의 네온사인과 오타루의 설경, 그리고 한국의 극장가.

우리 청춘의 감정은 그렇게 여러 도시의 불빛과 풍경을 오가며 반짝였다.


영화관, 설렘의 무대


데이트라면 정답은 언제나 영화관이었다.

충무로, 대학로, 종로 일대 극장들.

서울극장, 단성사, 피카디리 앞에서 표를 꼭 쥐고 줄을 서던 순간부터

이미 가슴은 두근거렸다.


심야 상영도 유행이었다.

동대문 프레야타운이나 정동의 작은 극장에서

밤새 세 편을 연달아 보고,

새벽 공기와 함께 밖으로 걸어 나오던 그 기분.

좋아하는 친구와 나란히 앉아 꾸벅꾸벅 졸며 스크린을 바라볼 때,

우린 이미 ‘하룻밤을 함께 보낸 사이’였다.


영화가 끝난 뒤엔 종로 맥도널드.

햄버거와 콜라 두 잔 사이로 오가는 웃음,

“아까 그 대사 기억나?”라는 짧은 질문.

그건 사실상 고백이었다.


조카가 웃으며 눈을 찡긋했다.

“근데, 진짜 영화만 본 거 맞아?”

나는 한참을 웃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땐 같이 있는 게 전부였어.

손끝이 스치기만 해도 심장이 뛰었거든.”


극장을 나서면 이미 해가 떠 있었다.

아침 햇살이 번지는 거리를, 밤새 눌러 담은 설렘과 함께 걸어가던 기억.

그 청춘은 아직도 내 안에 싱그럽게 살아 있다.

영화 이야기, 사랑의 언어


〈접속〉(1997, 전도연·한석규)은 PC통신 화면 속 깜빡이는 커서처럼, 서로의 외로움을 더듬어가며 이어진 두 사람의 사랑을 그렸다.

〈편지〉(1997, 박신양·최진실)은 죽음조차 끊어낼 수 없는 마음을,

〈약속〉(1998, 박신양·전도연)은 끝내 붙잡지 못한 운명 같은 인연을 담았다.

〈8월의 크리스마스〉(1998, 한석규·심은하)는

카메라 뷰파인더 속 짧은 순간을 영원처럼 남겼고,

관객은 숨조차 고르지 못한 채 그 정적에 함께 머물렀다.


지금의 눈으로 보면 촌스럽다고 웃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촌스러움이 곧 설렘이었고,

그 설렘이 우리 청춘의 색이었다.

스크린 위 인물들의 이야기가

곧 우리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TMI BOX – 90년대 영화, 사랑과 청춘의 지도

한국의 사랑 영화

〈접속〉, 〈편지〉, 〈약속〉, 〈8월의 크리스마스〉 외에도

〈편지 못한 편지〉, 〈고스트 맘마〉가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사랑을 그리며 많은 관객을 울렸다.

일본의 첫사랑 아이콘-<러브레터〉, 그 눈 속의 시간

• 이와이 슌지 〈러브레터〉(1995)는 “오겡끼데스까?” 한 줄로 아시아의 가슴을 두드린 영화. 나카야마 미호는 우리 세대의 첫사랑 얼굴로 남았다

• 촬영지

대부분 홋카이도 오타루(Otaru)에서 촬영됐다.

후나미자카 언덕, 오타루 운하, 구 니폰유센 도서관 건물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어 ‘러브레터 투어’의 성지가 되었다.

여행객들은 여전히 그곳에서 “오겡끼데스까?”를 외치며 사진을 찍는다.

• 한국 개봉 연도

1999년 11월, 한국에서 정식 개봉.

그전까지는 비디오로 몰래 돌려보던 입소문 명작이었다. 관객들 대부분이 20대 후반~30대 초반 세대였다. 그들은 ‘비디오 세대’로서 처음으로 이 영화를 큰 스크린에서 만나는 순간, 마치 첫사랑을 다시 만난 듯한 묘한 감정에 잠겼다.

• OST

엔딩곡 〈A Winter Story〉(by Mariya Takeuchi).

눈 덮인 오타루의 풍경과 함께,

지금도 겨울이면 마음속에서 조용히 재생되는 노래.

홍콩의 푸른 밤

왕가위 〈중경삼림〉(1994), 〈타락천사〉(1995)는

네온과 고독의 미학을,

장국영은 〈아비정전〉(1990)·〈해피 투게더〉(1997)로

사랑과 외로움의 아이콘이 되었다.

〈천장지구〉(1990, 유덕화·오천련)는

남학생들에게 ‘의리와 사랑’의 멜로드라마로 전설이 됐다.


이처럼 90년대의 극장은 단순한 상영관이 아니라,

우리 세대가 사랑을 배우고 청춘을 투영하던 가장 큰 거울이었다.

잡지, 사연, 고백의 매개


잡지는 우리에게 또 하나의 교과서였다.

〈스크린〉, 〈로드쇼〉는 스타들의 일상과 흥행 소식을,

1995년 이후 등장한 〈씨네 21〉, 〈프리미어〉, 〈키노〉는

비평과 철학을 담아 영화 좀 안다는 친구들의 필독서였다.

특히 〈키노〉는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만남”이라는 문구처럼

X세대 영화 청춘의 아이콘이었다.


여학생들 사이에선 사연 코너가 인기였다.

〈내일의 편지〉, 〈사랑과 우정 사이〉 같은 꼭지는

뒤표지 엽서를 뜯어내 주소와 마음을 적어 보내면

잡지 지면에 이름이 실리기도 했다.

작은 선물, ‘영화표나 팬시 굿즈‘가 집으로 도착할 때면

그건 공개 고백이자 설렘의 인증서였다.


나는 친구와 함께 예쁜 편지지에 사연을 써서

사진을 동봉해 보낸 적도 있다.

잡지를 열어 우리 글이 인쇄돼 있는 걸 발견했을 땐

둘이 손을 꼭 잡고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녔다.

그 순간만큼은 우리가 주인공이었다.


감성 잡지 <PAPER>도 빼놓을 수 없다. 책장이 아니라 일기장 같았고, 친구에게만 몰래 보여주고 싶은 시 같은 문장들이 빼곡했다.

〈이매진〉처럼 잠깐 반짝이고 사라진 잡지도 있었지만, 텍스트의 힘을 믿던 세대라 그 몇 줄의 글귀는 오래 마음에 남았다.

패션지 인기도 대단했다. 세시(Ceci), 올리브와 엘르걸, 그리고 엘르(ELLE)까지…

여학생들 가방 속엔 늘 한 권씩 있었고, 화보를 오려 노트에 붙이며

“이런 옷 입으면 나도 고백받을까?” 하고 거울 앞에 서던 밤들도 있었다


잡지 속 퀴즈도 작은 이벤트였다.

“이 영화 OST는?” “이 배우의 데뷔작은?”

정답을 적어 엽서를 보내면

영화표나 굿즈가 따라왔다.

내 이름이 인쇄될까 두근거리던 기다림이

이미 고백의 또 다른 형태였는지도 모른다.


그 시절, 잡지는 단순한 활자가 아니었다.

사랑을 연습하고, 마음을 예행연습하는 무대였다.

요즘 세대가 인스타 DM으로 마음을 주고받는다면,

우리는 엽서 한 장, 잡지 한 권으로 사랑을 배웠다.

3. PC통신과 비밀 방명록


“그 시절, 컴퓨터 앞에서도 우리는 사랑했어.”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

거기서 우린 또 다른 이름으로 살았다.

‘푸른 별’, ‘별빛소녀’ 같은 닉네임 뒤에 숨어서.


공개 게시판에는 못 쓰는 고백을

‘비밀글’로 남기곤 했다.


“네 이름 세 글자 쓰고 지웠다. 오늘은 그냥 남겨둔다.”


아침엔 지워졌다가,

며칠 뒤 다시 나타나기도 했다.

유령처럼 사라졌다 돌아오는 메시지.

그 흔적 하나에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어느 날은, 잊고 있던 네 이름을

비밀 방명록에서 발견하기도 했다.

“오랜만이야. 나야. 잘 지냈니?”

짧은 문장 하나에 온종일 얼굴이 달아올랐다.

프로필 사진도, 이모티콘도 없었지만

그 말 한 줄이 세상을 다 흔들어놓았다.


그땐 사랑이,

‘지금 여기’보다’ 기다림과 흔적’으로 존재했다.


4. 노래방, 고백의 무대


노래방은 고백의 무대였다.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 한 소절이

방 안의 공기를 바꿔놓았다.


누가 누구를 보고 있는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다 알았다.

어떤 친구는 〈깊은 밤을 날아서〉를 부르다 울컥했고,

다른 누군가는 김광석 노래에 맞춰

술잔을 부딪치며 목청껏 따라 불렀다.


지금의 ‘노래방 앱’에서 녹음해 주고받는 음성 메시지와 비슷하다고 할까.

하지만 그때 우리에겐, 한 방 안에 모여 같은 노래를 따라 부르며

동시에 뛰던 심장들이 있었다.

요즘도 노래방은 여전히 있지만, 그 시절의 노래방은 단순한 여가가 아니었다.

고백이 묻어나고, 우정이 흔들리며, 사랑이 불현듯 드러나는 무대였다.

그래서 같은 노래방이라 해도, 그 결은 확실히 달랐다.


5. IMF, 사랑의 시험대


1997년 외환위기.

곳곳에서 셔터가 내려앉고, 불이 꺼진 창문들이 늘어갔다.

내일이 흔들리는 것 같았지만, 사랑만큼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간절해졌다.

누군가를 붙잡고 싶었고, 놓치고 싶지 않았다.

편지는 더 많이 쓰였고, 노래방의 밤은 더 길어졌다.


“위기인데 왜 더 사랑했을까?”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그때의 사랑은

프로필 없는 닉네임으로 불리던 이름,

비밀 방명록에 남긴 한 줄,

노래방 마이크를 사이에 두고 터뜨린 마음이었다.


X세대의 사랑법은 느리고 우회적이었지만

그만큼 오래 남았다.

지금도 불현듯 떠오르는 건

누군가 남긴 그 짧은 문장.

“오랜만이야. 나야. 잘 지냈니?”

그 한 줄만으로도, 아직도 가슴이 뛴다.


그리고 요즘도 불현듯 울리는 DM 알림음 앞에서,

나는 다시 그 시절의 방명록 앞에 서 있는 듯하다.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께,


황금연휴 잘 보내고 계세요? 이번 12화는 조금 특별합니다. 그동안 1화부터 11화까지 달려온 이야기를 한 번 더 “추억 열차”에 태워 되돌아보는 편이니까요. 때로는 고속으로 스쳐 지나가던 풍경을, 때로는 서행으로 창밖에 오래 머물던 장면들을, 오늘만큼은 정차해서 칸칸이 점검해 보려 합니다.


우리가 지나온 역들을 떠올려 봅니다.

라디오 역—주파수에 마음을 접속하던 밤들, DJ의 한 문장이 고백이 되던 순간.

잡지·영화 역—엽서와 스크랩, 심야 상영의 떨림과 스크린 위의 첫사랑.

PC통신 역—닉네임으로 불리던 우리, 비밀 방명록의 한 줄 떨림.

미니홈피 역—방문자 수보다 방명록 한 문장이 더 중요하던 시절.

노래방 역—한 곡이 고백이 되고, 떼창이 우정이 되던 무대.

IMF 역—모든 것이 흔들릴 때도 사랑만은 멈추지 않던 시간.


이번 화 〈X세대의 사랑법, 그리고 지금〉은, 이 모든 정거장을 다시 지나며 “그때의 우리”와 “지금의 우리”가 얼마나 닮아 있는지 살펴보는 여행입니다. 도구는 달라져도 신호는 같다는 걸.

삐삐의 숫자 암호와 오늘의 DM 알림이 서로를 부르는 같은 방식이었다는 걸, 천천히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요즘 세대가 카세트테이프와 CD 플레이어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들여다보듯, 우리도 그 시절의 마음을 현재의 언어로 다시 해독해 보려 합니다.


연휴의 장점은, 급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죠. 그래서 오늘만큼은 열차를 멈추고, 우리가 스쳐 왔던 역들을 함께 걸어보려 합니다. 혹시 아쉬워 스치기만 했던 역이 있었나요? 더 오래 머물고 싶은 플랫폼이 있었나요? 라디오의 어느 프로그램, 잡지의 어떤 코너, 비밀 방명록의 한 문장, 노래방에서 부르던 그 노래, IMF의 밤을 견디게 한 사연… 댓글이나 메시지로 꼭 알려주세요. 여러분이 손들어 주시는 역은, 다음 운행에서 시간이 허락하는 한 플랫폼 연장을 하겠습니다. 필요하다면, 예정에 없던 임시열차라도 붙일게요.


연휴 동안 동행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달과 송편 사이로 반짝이는 여러분의 기억을 받으며,

우리 열차는 잠깐 속도를 늦출 뿐 멈추지 않습니다.

다음 역에서 또 만나요. 그리고, 여러분의 이야기, 기다리고 있을게요.


따뜻한 마음을 실어,

〈90년대 학번이라 죄송합니다〉 작가 유혜성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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