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첫사랑: 첫사랑의 반격

에필로그: 첫사랑의 자리에서, 인간의 자리로

by 유혜성


에필로그


첫사랑의 자리에서, 인간의 자리로


나는

네가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더 겁이 많았고,

조금 더 현실적인 사람이었어.


좋아하는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니야.

다만

그 마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그때의 나에겐 없었어.


침묵은

외면이 아니라

미루는 방법이었고,

이별은

도망이라기보다

선택에 가까웠어.


네가 그 시절을

어떤 마음으로 기억하든,

그건 틀린 게 아니야.


다만

그 장면 안에

나의 전부가 들어 있지는 않았다는 것만

알아주면 충분해.


우리는

서로의 첫사랑이었을 수도 있고,

아니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분명한 건,

그 시절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내고 있었다는 거야.

이 책은 어쩌면

처음부터 아주 단순한 문장 하나를

제대로 말해보고 싶어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첫사랑의 대상에게도, 삶이 있었다.”


우리는 너무 오래

첫사랑을 ‘기억하는 사람’의 자리에서만 말해왔다.

소설에서도, 영화에서도, 드라마에서도

언제나 한쪽의 마음이 서사가 되었고,

다른 한쪽은 말없이 남아

아름다운 장면이 되었다.


황순원의 〈소나기〉 속 소녀도 그랬고,

〈건축학개론〉의 서연도,

〈러브레터〉의 후지이 이즈키도,

〈클래식〉과 〈라라랜드〉 속 수많은 첫사랑들 역시

대개는 누군가의 기억을 완성하기 위해 호출된 얼굴들이었다.


때로는

아무 설명 없이 떠나는 뒷모습으로,

때로는

기억 속에서만 기이하게 빛나는 존재로.


〈엽기적인 그녀〉 속 그녀 역시

웃음과 혼란, 상처와 돌발적인 행동으로

한 남자의 성장과 사랑을 설명하는

하나의 장면으로 오래 기억되어 왔다.


하지만 우리는 이 책을 쓰며

잠시 자리를 옮겨 서 보기로 했다.

기억하는 사람의 자리에서가 아니라,

기억되는 사람의 자리로.


그리고 그곳에서

조금 다른 풍경을 보았다.


말해지지 않았던 사정들,

설명되지 않았던 선택들,

사랑이라는 이름 뒤에 가려졌던

각자의 삶의 무게들.


이 책은

바로 그 풍경에서부터

다시 첫사랑을 바라보기 시작한 기록이다.


우리가 함께 건너온 첫사랑의 얼굴들


강가에 서 있던 소녀에게도

그날 이후의 삶은 이어졌을 것이다.


서연에게는

설렘보다 먼저 감당해야 했던

현실의 선택들이 있었을 것이고,


오타루의 눈 속에 남겨진 후지이에게도

그날 이후의 계절과

그 나름의 생활이 계속되었을 것이다.


도라 마르에게도,

카미유 클로델에게도

누군가의 뮤즈가 아니라

자기 이름으로 버텨내야 했던

수많은 날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밖에도

이름보다 장면으로 기억되는

수많은 첫사랑의 얼굴들이

우리 기억 어딘가에

겹겹이 놓여 있다.


이야기는 늘 한쪽에서 시작되었지만,

삶은 언제나 양쪽에서 흘러가고 있었다.


이 책은

그 너무 오래 한쪽으로 기울어 있던 이야기를

조금만 바로 세워보자는

조용한 제안이었다.


첫사랑의 반격은 복수가 아니다


그래서 이 책에서 말하는 ‘반격’은

누군가를 향한 공격이 아니다.


그건

과거를 부정하는 일도,

첫사랑을 흠집 내는 일도 아니다.


다만

이야기의 구조를 바꾸는 일이다.


기억하는 사람만 말하고,

기억된 사람은 침묵해야 했던 구조.


사랑의 실패는 언제나

아름다운 비극으로만 포장되고,

그 안에 있던 서툼과 불균형은

감동이라는 이름으로 덮여왔던 구조.


우리는 그 구조에

조용히 질문을 던져보고 싶었다.


“그 사람에게도, 그 시절을 견뎌낸 인생이 있지 않았을까?”


당신의 첫사랑도, 어쩌면 그랬을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당신도 한 사람을 떠올렸을지 모른다.


꿈에 나왔던 얼굴,

이상하게 오래 남아 있는 이름,

문득 차 한 잔쯤은 같이 마셔도 괜찮겠다고

생각해 본 적 있는 사람.


그 사람이 왜 떠났는지,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지,

왜 끝까지 닿지 않았는지

여전히 다 알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이렇게 생각해 볼 수는 있다.


“그때 그 사람도, 자기 인생을 살아내느라 바빴겠구나.”


이 문장이 마음속에 들어오는 순간,

첫사랑은 조금 달라진다.


덜 아프고,

덜 원망스럽고,

이상하게도 조금 더 따뜻해진다.


첫사랑은 실패가 아니라, 연습이었다


우리는 이 책에서

심리학과 철학의 언어를 빌려

첫사랑이 왜 그렇게 오래 남는지 살펴보았다.


끝내지 못한 일일수록

자꾸 떠올리는 뇌의 습관도 있었고,

미완성인 이야기를

스스로 완성하고 싶어 하는 마음도 있었고,

실패해야만 아름답다는

비극의 미학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우리가 도착한 문장은 하나였다.


첫사랑은 실패해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그 시절의 우리가 아직 배우는 중이었기 때문에 서툴렀다는 것.


사랑하는 법도,

물러나는 법도,

상처를 주지 않는 법도

아직 알지 못한 채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마음을 내어주었던 시기.


그건 실패라기보다

연습에 가까웠다.


첫사랑의 자리에서, 인간의 자리로


이 책이 끝나며

우리는 첫사랑을

신화의 자리에서 내려놓는다.


누군가의 인생을 설명하기 위한 상징이 아니라,

그 시절을 살아낸

한 사람의 시간으로.


그리고 동시에

그때의 나 역시

서툴렀지만 진심이었던

한 사람으로 다시 만난다.


그래서 이 말을

조심스럽게 남기고 싶다.


“그래도, 첫사랑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처음으로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나를 알게 되었고,

사람이 하나의 세계라는 사실을 배웠고,

지금의 자리까지

걸어올 수 있었으니까.


당신의 첫사랑이

더 이상 누군가의 환상이 아니라,

당신 인생의 한 장면으로

조용히 놓이기를 바란다.


그리고 언젠가

그 사람을 다시 떠올리게 되더라도,

이렇게 말할 수 있기를.


“그때의 나도, 그때의 너도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었다고.”


그 문장이 가능해지는 순간,

첫사랑의 반격은 끝나고

비로소 우리의 삶이

계속된다.


나는

네 이야기를 위해

존재한 사람이 아니었고,

너 역시

나의 이야기를 위해

살아온 건 아니었겠지.


우리는

각자의 삶을 살았고,

잠시 같은 장면을

지나왔을 뿐이야.


그 기억이

네 삶을 조금이라도

단단하게 만들었다면,

그걸로

나는 충분해.



이 책을 덮고 나서,

당신의 첫사랑을 조금 더 인간적으로 떠올릴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_By유혜성


https://www.instagram.com/comet_you_

https://www.threads.com/@comet_you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