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첫사랑:첫사랑의 반격

첫사랑의 반격:이제는 ‘그들의 서사’가 시작된다

by 유혜성

9장 첫사랑의 반격:이제는 ‘그들의 서사’가 시작된다


첫사랑은 끝난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처음 배웠던 자리였다.

_By유혜성




첫사랑 이야기는

왜 항상 비슷할까.


가만히 서 있던 얼굴,

끝내 잡지 못한 손,

아무 말 없이 떠난 뒷모습.


이 장면,

어디서 한 번쯤은 다 본 것 같다.


소설에서도, 영화에서도, 드라마에서도

첫사랑은 늘 이런 식으로 끝난다.

그리고 이야기는

대개 한 사람의 기억에서 정리된다.


누가 더 좋아했는지,

누가 더 기다렸는지,

누가 상처를 안고 남았는지.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그때,

말하지 못했던 사람은

도대체 어디에 있었을까.


그 사람은 정말

아무 생각도 없었을까.

아무 사정도 없었을까.


아마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 장면의 바깥에서

그 사람도 자기 나름의 삶을

살고 있었을 테니까.


이 장은

그동안 한 번도 제대로 불리지 않았던

그 사람의 자리에

조금 가까이 가보려는 이야기다.


첫사랑을 부수려는 게 아니라,

첫사랑을

조금 더 사람답게 만들기 위해.


이제부터는

혼자만의 기억이 아니라,

조금은 다른 방향에서

첫사랑을 다시 바라보려 한다.


이것이

첫사랑의 반격이다.

1. “나는 당신의 환상이 아니었다” : 말하기가 생겨나는 순간


심리학자 ‘하인츠 코헛‘은

인간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종종

타인을 내 욕망을 비추는 거울처럼 바라본다고.


조금 어렵게 들릴 수 있지만,

첫사랑에 대입하면 이야기는 금세 쉬워진다.


우리는 첫사랑 속의 그 사람을

모르는 사이

우리 청춘을 설명하기 위한 장면으로 불러왔다.


풋풋함을 말하고 싶을 때,

아쉬움을 정리하고 싶을 때,

실패를 너무 아프지 않게 남기고 싶을 때.


그 사람은

나의 설렘을 더 빛내는 배경이 되었고,

나의 성장을 증명하는 증거가 되었고,

나의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한 장면으로 남았다.


하지만 그 사람에게도

그 시절은 분명 자기 인생의 시간이었다.


상처를 받았을 수도 있고,

선택 앞에서 오래 망설였을 수도 있고,

어쩌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자기 자신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쯤에서

기억의 방향이

아주 조심스럽게 바뀐다.


그 사람은

누군가의 서사를 완성하기 위해

등장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저

그 시절을

자기 방식으로 살아가던

한 사람이었을 뿐이다.


“나는

당신이 만든 장면 속에서만

살아온 존재는 아니었다.”


이 문장은

비난도 아니고,

과거를 지우자는 말도 아니다.


기억을 부수는 대신,

기억의 폭을

조금 넓히자는 제안에 가깝다.


환상으로만 남아 있던 자리에

한 사람의 현실을

겹쳐 놓는 일.


그 순간부터

첫사랑은

한 사람의 이야기에서 벗어나

두 개의 삶이 잠시 스쳤던 사건으로

다시 읽히기 시작한다.

2. 왜 첫사랑의 관계는 늘 어긋났을까: ‘나–사물’에서 ‘나–너’로


마르틴 부버는

20세기 독일의 철학자다.


이 사람의 철학은 의외로 단순하다.

그는 인간의 모든 관계를

딱 두 문장으로 나눴다.


“나는 그것과 관계한다.”

그리고

“나는 너와 마주한다.”


부버는 이걸 이렇게 불렀다.

• I–It (나–사물)

• I–You (나–너)


말이 어려워 보이지만,

사실은 아주 생활적인 구분이다.


I–It 관계에서는

상대가 ‘사람’이기보다

기능이나 의미에 가깝다.


필요한 만큼만 보고,

필요한 역할만 맡긴다.


반면 I–You 관계에서는

상대가 내 계획 안에 들어오지 않는다.

예측할 수 없고,

통제되지 않고,

그래서 진짜로 마주해야 하는 존재가 된다.


그리고 부버는 말한다.

사람은 평생

이 두 관계를 오가며 산다고.


이제 이걸

첫사랑에 가져와 보자.


조금 솔직해져도 괜찮다면,

첫사랑은 대부분

I–It 구조였다.


우리는 그 사람을

‘만나는 존재‘라기보다

‘내가 변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대했다.


그 사람은

내가 어른이 되는 배경이었고,

내가 아파야 할 이유였고,

내가 성장했다는 증거였다.


말은 사랑이었지만,

구조는 종종

나–사물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 사람에게는

그 사람의 삶이 있었다.


우리가 묻지 못한 이유들,

우리가 보지 못한 선택들,

우리가 상상하지 않았던 사정들.


그 사람은

내 성장 서사의 소품이 아니라,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었다.


여기서

관계의 방향이 바뀐다.


첫사랑의 반격이란

그 사람을

다시 I–You,

‘너‘의 자리로 되돌려놓는 일이다.


상징이 아니라,

장면이 아니라,

의미가 아니라,


말을 걸 수 있고,

대답할 수 있고,

거절할 수도 있는 존재로.


그 순간

첫사랑은 더 이상

한쪽 마음의 독백이 아니다.


두 삶이

아주 서툴게,

아주 잠시

교차했던 하나의 사건으로

다시 읽힌다.


그리고 그때서야

우리는 비로소 깨닫는다.


첫사랑이 어긋났던 이유는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아직

‘너‘를 만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3. 기억의 주인이 바뀌면, 사랑의 온도도 바뀐다


기억은 원래

기억하는 사람의 것이다.


그래서 첫사랑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조금 기울어진 상태로 시작된다.


누가 더 오래 기다렸는지,

누가 먼저 떠났는지,

그날을 어떻게 견뎠는지는

대개

말하는 사람 쪽에서 정리된다.


말은 늘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오고,

다른 한 사람은

설명되지 않은 채 남는다.


그런데

이야기가 달라지는 순간이 있다.


그동안

이야기 속에만 있던 사람이 아니라,

이야기에서 빠져 있던 사람이

입을 열기 시작할 때다.


무대 한가운데 서 있던 사람이 아니라,

늘 가장자리에 머물러 있던 사람이

천천히

자기 자리로 걸어 나올 때.


그 순간,

기억의 방향이

조금 바뀐다.


그때 우리는

뒤늦게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기억한 그 사람은

그 사람 자체라기보다,

그 시절의 내가

필요해서 만들어 둔 얼굴이었구나.”


이걸 받아들이는 일은

솔직히

조금 아프다.


왜냐하면

그 얼굴은 분명

그 사람의 것이었지만,

그 안에 담겨 있던 감정은

내 청춘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사랑의 온도가 달라진다.


환상이 식고,

이미지가 걷히고,

그 자리에

한 사람의 현실이 들어온다.


그때 우리는

처음으로

누군가를 만난다.


내 기억 속 인물이 아니라,

내 성장 서사의 배경이 아니라,

나와는 다른 무게로

그 시절을 살아낸

한 명의 사람으로.


이 순간은

조금 늦었지만,

그래서 더 중요하다.


첫사랑을

아름답게 간직하는 대신,

정직하게 다시 바라보는 선택.


그 선택을 하는 순간

첫사랑은

더 이상

한쪽의 이야기가 아니다.


두 사람이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이유로

그 시간을 통과해 왔다는 사실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때,

사랑은

기억의 자리를 떠나

이해의 자리로 옮겨간다.


4. 그 사람에게도 생은 있었다: 침묵의 이면


우리가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까”라고

뒤늦게 되묻고 있던 그 시간에,


그 사람은

전혀 다른 고민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시험 하나를 더 걱정하고 있었을 수도 있고,

집안 사정 때문에

하루를 버티는 데 에너지를 쓰고 있었을 수도 있고,

그저

자기 삶을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벅찼을 수도 있다.


혹은 아주 단순하게,

그 감정을 붙잡을 만큼

그때의 자신이

아직 준비되어 있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들은

누군가의 기억을 완성하기 위해

등장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 시간 속에서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삶을 살고 있던

한 명의 사람이었다.


그래서 침묵은

무심함이 아니라

버티는 방식이었을 수도 있고,


이별은

무책임이 아니라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을 수도 있다.


이 장에서

우리는 이런 생각 앞에 잠시 멈춘다.


“나는

그 사람의 침묵에 대해

한 번도 묻지 않았구나.”


이 문장은

첫사랑을 부정하려는 말이 아니다.

다만 그 사랑을

조금 덜 오해하게 만든다.


그렇게 기억은

조금 가벼워진다.


첫사랑은

아름답게 붙들어야 할 이야기가 아니라,

지나온 하나의 경험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리고 그 이동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조금 달라져 있다.

5. 관계의 평등성 : 첫사랑을 다시 쓰는 시대


정치철학자 ‘낸시 프레이저‘는

‘정의’를 이렇게 설명한다.


정의란

누가 더 옳은지를 가리는 문제가 아니라,

누가 말할 수 있었고

누가 끝내 말하지 못했는가의 문제라고.


이 말을

첫사랑에 가져와 보면

의외로 간단해진다.


관계는

한 사람만 계속 말할 수 있을 때,

이미 조금 기울어져 있다는 뜻이다.


첫사랑의 서사가

대개 그랬다.


기억하는 사람은

자기 이야기를 이어갔고,

침묵한 사람은

설명될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그 사람은

점점 ‘한 사람’이 아니라

‘한 장면‘으로 남는다.


웃던 얼굴 하나,

돌아서던 뒷모습 하나,

끝내 꺼내지 못한 말 하나로.


하지만

말이 오가기 시작하면

관계의 공기가 달라진다.


사랑은

더 이상 한 사람의 기억으로만

정리되지 않는다.


누가 기다렸는지,

누가 먼저 떠났는지,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질문들이

한쪽을 향하지 않고

서로를 향하기 시작할 때,

첫사랑은 비로소

‘이야기‘가 아니라

‘관계‘가 된다.


그래서 지금은

첫사랑의 시대가 아니라,

서로의 시대다.


6. 이제, 첫사랑은 이렇게 남는다


예전의 첫사랑은

대개 이런 문장으로 끝났다.


“그녀는, 혹은 그는

나의 첫사랑이었다.”


이 문장은

단정했지만,

끝까지 혼자만의 말이었다.


이제는

이렇게 말해도 괜찮다.


“그도, 그녀도

자기 삶을 살아가던

한 사람이었다.”


이 문장이 들어오는 순간,

첫사랑은

신화에서 내려온다.


더 이상

나의 청춘을 설명하기 위한 상징이 아니라,

그 시절을 건너온

한 사람의 시간이 된다.


이상하게도

이렇게 생각하고 나면,

첫사랑은 덜 아프다.


미화하지 않게 되었고,

굳이 원망할 필요도 없어졌기 때문이다.


사랑이 사라진 건 아니다.

다만

제자리를 찾았을 뿐이다.


그 자리에 놓인 첫사랑은

더 이상 붙들 필요도,

애써 밀어낼 이유도 없다.


그저

이미 지나온 한 시절로

기억 속에 조용히 남아 있다


7. 첫사랑의 반격이 남기는 것


첫사랑의 반격은

과거를 뒤집는 이야기가 아니다.


과거를

조금 더 넓게 바라보게 만드는 이야기다.


나의 마음도,

그 사람의 마음도,

그 시절의 서툼도

하나씩 꺼내

같은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일에 가깝다.


그래서 이 장의 끝에서

우리는

이런 말을 할 수 있게 된다.


첫사랑은

아름다운 환상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사람은

그 환상을 살아야 할 이유까지는 없었다.


그걸 이해하게 되는 순간,

첫사랑은

비극이 아니라

이미 건너온 한 번의 만남이 된다.


완벽하지 않았지만,

그래서 더 인간적인.


조금 늦었지만,

그래서 더 진심인.


너에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상처를 줬다는 걸 알고 있어.


그렇다고

할 말이 없었던 건 아니야.

오히려

너무 많아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


그때의 나는

사랑보다 먼저

현실을 배워야 했고,

감정보다 먼저

버티는 법을 익혀야 했어.


네 기억 속에서

내가 어떤 사람으로 남아 있든,

그건

네가 지나온 시간이 만든 얼굴이겠지.


나는

그 얼굴을 부정하지 않을게.


다만

그 시절의 내가

조금 더 서툴렀다는 것만

조용히 남기고 싶어.


우리는

서로를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각자의 시간을

건너오게 한 사람은 되었을 거야.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참고문헌 · 각주


1. 하인츠 코헛, 『자기의 분석』, 이재훈 옮김, 학지사, 2003.

2. 마르틴 부버, 『나와 너』, 김혜숙 옮김,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2006.

3. 낸시 프레이저, 『정의의 경계: 재분배, 인정, 대표의 정치』, 이현재 옮김, 그린비, 2010.

https://www.instagram.com/comet_you_

https://www.threads.com/@comet_you_

에피톤 프로젝트 '첫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