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수 Sep 17. 2024

세계 끝의 버섯

애나 로웬하웁트 칭_세계 끝의 버섯


두 달에 걸쳐 ‘자본주의의 폐허에서 삶의 가능성에 대하여’ 송이버섯을 연구하며 “다종의 세계 만들기”에 대해 풀어나가고 뻗어나간 <세계 끝의 버섯>을 읽었다. 내가 어려워하니 이 책을 읽은 지인은 세계를 종회무진 넘나들며 쓰고 있는 게 황홀했던 이 책에 대해 이해되냐 안 되냐가 중요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했는데,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최근 나의 생각들은 이 책에서 나온 날아다니는 포자처럼 이 책과 들러붙어 다니기 일쑤였고, 어렵지만 그럼에도 매우 흥미로운 여정이었기에 즐거움이 컸고, 이리저리 연결됨이 커졌기 때문이다. 굉장히 여전히 인간중심적 사고의 틀이 큰 나에게 포스트휴머니즘 문화인류학으로서 이 책은 매번 길을 잃을 것 같고 모호한 경계 같았지만, 끊임없이 지치지 않고 알아차리기 위한 모먼트를 전해주려는 것 같았다. 인간이 오직 자기 자신만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은 얼마나 큰 환상이며 오만이겠는가. 이 세계의 연결망은 인간뿐 아니라 비인간 존재들과의 행위와 실천으로 가능하고, 인간 역시 그것에 의존하고 얽혀 살아가는 존재이다. 이 작은 생각의 변화, 그러나 쉽지 않아 엄청 큰 변화일 ‘너머’는 다수의 생물종이 마주치고, 얽히고, 충돌하며 만들어가는 공동의 삶에 대해 사유할 수 있게 하며 이 책은 송이버섯 곰팡이와 소나무를 통한 패치로서 살펴봄을 가능케 해주었다. 이 다종의 세계 만들기는 서로 마주치고 충돌하며 협력하고 생존을 이루기도 하는데, 이때 서로의 서식지를 ’겨란‘하며 서로를 ’오염‘한다. 나는 여기서 <휘말린 날들>의 감염시키다, 가 아닌 “감염-하다”를 생각해본다. 다종의 세계 역시 가/피해 구도로서가 아닌 상호의존하며 교란-하기와 오염-하기로서 말이다. 그렇기에 폐허를 만드는 자본주의적 교란과 다른 것. 이분법적 선택지나 세계관이 아니라, 자본주의•비자본주의 영역을 넘나들며 이뤄지는 행위들, 마주침, 그 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행위자들, 불안정성, 불확정성 속에서(도) 연결하고 작동되는 배치, 패치의 체계로서 바라보면서 제3의 공간이나 감각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 그것이 조금 다른 것을 찾아가보는 과정 아닐까. 답인가 아닌가를 넘어. ‘진보 없이도 헤쳐 나가려면 우리의 손을 이용해 충분히 느껴야 한다’. 이 진행 중인 모험은 내게사는 어떻게 퍼져나갈까, 여전히 마무리 되지 않지만, 이것이 반가움의 요소이기도 하다.


&이 책을 더 쉽게 사유하기 위해 도움이 될 김초엽 작가의 <파견자들> 적극 추천.


<세계 끝의 버섯>, 애나 로웬하웁트 칭 지음, 노고운 옮김, 현실문화


p7-8 인간이 다른 모든 존재를 짓밟고선 살아남을 수 없다.


p13 송이버섯 연구는 우리를 분과 학문적 지식 너머로 이끌 뿐 아니라 다양한 언어, 역사, 생태, 문화적 전통이 세상을 형성하는 곳으로 데려간다.


p25 현재의 불안정성 중 그 절반은 지구의 숙명에 관한 것이다. 과연 우리는 어떤 종류의 인간에 의한 교란을 안고 살아갈 수 있을까? 지속가능성이 이야 기되고는 있지만, 우리가 다종의 후손들에게 거주할 만한 환경을 물려줄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p27 그러나 송이버섯 상업은 20세기식 발전의 꿈으로 이어지지는 못한다. 나와 이야기를 나눈 버섯 채집인 대부분은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고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는 등 끔찍한 일 경험했다. 생계를 이어갈 다른 방도가 없는 이들에게 상업적 채집은 근근이 살아 가는 방식보다 더 나은 방법이다. 하지만 이는 어떤 종류의 경제인가? 송이버섯 채집은 자영업이며, 채집인을 고용하는 회사는 없다.

임금이나 혜택도 없으며, 채집인은 그저 자기가 찾은 버섯을 팔 뿐이다. 버섯이 나지 않는 해도 있는데, 그런 시기에 채집인은 경비 손해에 더해 수입도 없다. 상업적 야생 버섯 채짐은 사회보장이 제 공되지 않는 불안정한 생계의 한 예다.

 이 책은 송이버섯 상업과 생태를 추적하면서 불안정한 생계와 불안정한 환경을 이야기할 것이다. 나는 각각의 사례를 통해 뒤얽 힌 삶의 방식들이 열린 배치의 모자이크를 이루면서 그 하나하나 가 시간적 리듬과 공간적 원호의 모자이크를 향해 더 깊게 열리는, 말하자면 나 자신이 패치성에 둘러싸여 있음을 깨닫는다. 우리는 현재의 불안정성을 지구 전체의 상태로 이해해야만 우리 세계가 처한 이 상황을 알아차릴 수 있다.


p51-52 실로 남은 것은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곰곰이 생각해보자. 국가의 유효성과 자연 풍경에 대한 자본주의의 대대적인 파괴를 고려할 때, 우리는 국가와 자본주의의 기획 바깥에 있던 것들이 오 늘날 왜 살아남았는지 질문할 수 있다. 이 질문에 답하려면 다루기 힘든 가장자리의 것들을 관찰할 필요가 있다. 미엔인과 송이버섯이 오리건주에서 함께 모이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언뜻 사소해 보이는 이런 질문이 모든 것의 방향을 뒤집어, 예측 불가능한 마주침을 핵심적인 것으로 보도록 이끌지도 모른다.

 우리는 날마다 불안정성에 관한 뉴스를 접한다. 일자리를 잃은 사람도 있고, 일자리를 가져본 적이 없어 분노하는 사람도 있다. 고릴라와 민물알락돌고래는 멸종 위기다.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태평양군도 전체가 물에 잠긴다. 그러나 대체로 우리는 이런 불안정성을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에서 예외적 상황이라 여긴다. 불안정성은 체계에서 '예외'라고 말이다. 그런데 만약 불안정성이 내가 생 각하는 것처럼 우리 시대의 조건이라면 어떨까? 아니, 달리 말해서 우리 시대가 불안정성을 인지할 단계에 이른 것이라면 어떨까? 불안정성과 학생양이 또 우리가 사소하게 여기는 무언가야말로

우리가 추구하는 체계성의 중심을 이루는 것들이라면?

 불안정성은 타자들에게 취약한 상태를 말한다. 예측 불가능한 마주침은 우리를 변모시킨다. 우리는 우리 자신조차 통제할 수 없다. 공동체의 안정적인 구조에 의존할 수 없는 우리는 가변적인 배치로 내던져지고, 이로써 우리와 관계된 타자뿐 아니라 우리 자신도 재형성된다. 우리는 현재의 상황에 의존할 수 없다. 우리의 생존 능력을 포함한 모든 것이 유동적이다. 불안정성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다른 방식의 사회 분석이 가능하다. 불안정한 세계는 목적론이 없는 세계다. 시간 본연의 무계획성을 뜻하는 불확정성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지만, 불안정성을 놓고 생각해보면 불확정성도 삶을 가능게 한다는 사실이 명확해진다.


p64 나는 생존을 그런 의미로 사용하지 않겠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도 열린 마음으로 다른 의미를 생각해보기 바란다. 어떤 생물종이든 살아 있기 위해서는 살기에 적합한 협력 필요하다는 것이 이 책이 주장하는 바다. 협력이란 차이를 주용하며 일한다는 의미로, 이것은 곧 오염으로 이어진다. 협력하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는 죽는다.


p66 불안정성이란 우리가 다른 존재에 취약하다는 것을 인지하는 상태다.


p75 오염된 다양성은 다양한 형태의 편견과 강탈을 헤쳐나가는 와중에 확산한다.


p85 송이버섯 숲과 대조해보자. 사탕수수 클론과 달리 송이버섯은 다른 생물종과 변형적인 관계를 맺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송이버섯은 숲ㅇ 특정한 나무와 어울려 지내는 땅속 곰팡이의 자실체다. 이 곰팡이는 숙주 나무 뿌리와 상리공생 관계를 맺는데, 나무에게 양분을 찾아주고 자신은 나무로부터 탄수화물을 얻는다. 송이버섯 덕택에 숙주 나무는 비옥한 부엽토가 없는 척박한 땅에서도 살아갈 수 있다. 그 대가로 곰팡이는 나무에게서 영양분을 공급받는다. 이 변형적인 상리공생 때문에 인간의 송이버섯 재배는 불가능했다. 일본의 연구기관들이 송이버섯을 재배하기 위해 수백만 엔을 들여 노력해왔지만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 송이버섯은 플랜테이션 농장의 환경 조건에 저항한다. 송이버섯에게 필요한 것은 숲의 역동적인 다중적 다양성, 그리고 이를 통해 서로를 오염시키는 관계성이다.


p122 이상하게도 피퀴드호에 탑승한 모든 작살잡 이는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태평양군도 출신으로, 미국 문화에 동화되지 않은 토착민들이다. 미국의 산업 규율에 따른 훈련이라곤 조금도 받지 않은 사람들의 전문 기술이 없으면, 그 배는 단

한 마리의 고래도 잡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의 작업으로 얻은 생산물은 종국에는 자본주의적 가치 형태로 번역되어야 한다. 그 배는 자본주의적으로 조달된 자금이 있었기 때문에 항해할 수 있다. 토착 지식이 자본주의적 수익으로 전환되는 것이 바로 구제 축적이다. 고래의 생명이 투자로 전환되는 것 역시 마찬가지로 구제 축적이다.


p124 야만과 구제는 종종 쌍둥이와 같다. 구제는 폭력과 오염을 이윤으로 번역한다.


p148 송이버섯 채집은 ‘노동’이 아니지만 노동이라는 유령에 사로잡혀 있다.


p222-223 그렇다면 송이버섯 상품사슬에서 내가 지금까지 서술한 역사를 발견할 수 있다. 즉 [수출입하려는] 지역의 토박이 파트너를 찾는 일본인 무역가, 정규직에 대한 희망에서 벗어난 미국인 노동자, 그리고 미국식 자유의 이름으로 일본 회사의 재고품을 한곳으로 모이게 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열망을 가로질러 이루어지는 번역 작업을 볼 수 있다. 나는 상품사슬이 조직되는 양상을 분석할 때 야 비로소 미국의 글로벌 리더십에 대한 과장 광고를 통해 감춰졌을 이와 같은 역사가 드러나게 된다고 주장한다. 별 것 아닌 상품들로 거시사를 설명하게 될 때, 세계 경제는 역사적 국면에서 창발하는 형태, 즉 마주침의 불확정한 양태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p248-249 어떤 패치도 ‘대표적’이지 않으므로 홀로 진행되는 각 집단의 투쟁은 어떤 것도 자본주의를 전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것이 정치의 끝은 아니다. 배치는 우리에게 내가 나중에 잠복해 있는 공유지라고 부르는 것, 즉 공동의 목적에 동원될 수 있는 얽힘을 다양한 모습으로 보여준다. 항상 협업이 우리와 함께 하기 때문에 우리는 협업의 가능성을 통해 전략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 우리는 다양하고 이동하는 연합체의 힘을 가진 정치가 필요할 것이고, 이것은 단지 인간만을 위해서가 아니다.


p271 한 일본인 과학자는 송이버섯이 “의도치 않은 경작”의 결과라고 설명했는데. 그 이유는 인 간의 기술만으로 송이버섯을 경작하지는 못한다는 것이 사실임에도 인간의 교란이 있어야 송이버섯이 생길 가능성이 더 높기 때문이다. 사실상 소나무, 송이버섯, 인간은 모두 의도치 않은 방식으로 서로를 경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들은 상대방의 세계-만들기 프로젝트가 가능하게 한다. 이 관용구를 통해 나는 어떻게 풍경이 훨 씬 더 일반적인 방식으로 의도치 않은 디자인, 즉 많은 인간 및 비

인간 주체의 세계-만들기 활동이 겹쳐져 만들어진 산물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디자인은 풍경 생태계에 명확히 존재한다. 그러나 그 주체 중 누구도 그러한 효과를 계획하지 않았다. 인간은 의도치 않은 디자인의 풍경 만들기에 다른 존재와 함께 참여한다.


p 280 바로 이러한 방식처럼, 우리는 배치를 이해하기 위해 배치가 존재하는 개별 방식을 주시함과 동시에 산발적이지만 그 결과로 발생하는 조율을 통해 그 선율들이 어떻게 합쳐지는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더 나아가 끊 임없이 반복될 수 있어 예상 가능한 악보로 적힌 음악과 달리, 다 운율의 배치는 상황이 변화함에 따라 바뀐다. 이제 이러한 방식으로 듣는 법을 연습하고자 한다.


p284-285 교란은 생태계에 명백한 변화를 야기하는 환경 조건의 변화다. 홍수와 산불은 교란의 형태다. 인간 및 다른 생물 또한 교란을 야기할 수 있다. 교란은 생태를 파괴할 수도, 재생시킬 수도 있다. 교란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는 규모와 같은 여러 요소에 달려 있다. 어떤 교란은 사소하다. 숲의 나무가 쓰러지면 작은 공백이 만들어진다. 어떤 교란은 거대하다. 이를테면 쓰나미는 핵발전소를 무너뜨린다. 시간의 규모 또한 중요하다. 단기간의 손상이 무성한 재성장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교란은 새로운 풍경의 배치를 가능케 하면서 변형을 가능케 하는 마주침이 발생하도록 그 풍경을 개방시킨다.

 교란을 생각하는 데 익숙하지 않은 인문학자는 교란을 손상과 관련짓는다. 그러나 교란은 생태학자가 사용하는 개념으로, 항상 나쁜 것만도 아니고 항상 인간에 의한 것도 아니다. 인간이 일으키는 교란은 생태 관계를 유발하는 독특한 능력이 아니다. 게다가 교란은 하나의 시작으로, 항상 도중에 일어난다. 즉, 교란이라는 용어에는 교란 이전에는 조화로운 상태였다는 전제가 없다. 교란은 다른 교란을 뒤따른다. 따라서 모든 풍경은 교란되어 있고, 교란은 일상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이 용어의 범위를 제한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교란에 대해 질문하면서 풍경의 역학을 탐구하고 논의를 계속할 수 있다. 교란이 심각한지 아닌 지는 뒤따라 일어나는 배치들의 재구성을 통해 해결될 문제다.


p400 혼란스러운 번역과 불참자들이 있는 학회에서 간격과 패치들은 유지된다.

 가끔 개인들은 패치들을 가로질러 번역하는 과정에서 차이를 만들면서 새로운 발전에 영양분을 제공한다.


p420 움직이는 것은 생태계다. 인간이 매우 많은 다른 생물종을 의도하지 않고 이동시킨 것이 놀라운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새로운 생태계를 창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물을 바꾸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다.


p450 정치적으로 듣는 행위는 아직 분명하게 표현되지 않은 공통의 의제들이 남긴 흔적을 발견하는 것이다.

(…중략…) 브라운이 한 것처럼, 나는 좋은 의도라는 이유로 차이를 종이로 덮어 가려버리는 방식을 거부하면서 차이를 인정할 것이다. (…중략…)잠재적인 협력자를 알아차리기 위해 우리에게는 많 은 종류의 각성이 필요하다. (…중략…) 그러나 불확정성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에 게 그러한 희미한 빛은 정치적인 것이다.


p487-488 우리는 촉각에만 의지해 송이버섯을 찾고 있었는데, 내게 그것은 숲을 배우는 새로운 방법이었다. (…중략…) 진보 없이도 헤쳐 나가려면 우리의 손을 이용해 충분히 느껴야 한다.


p490 불안정성은 계획을 세우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불안정성으로 인해 실제로 이용 가능한 것을 동원해 일하게 되므로 알아차림이 활성화된다. 다른 존재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모든 감각을 사용해야 할 필요가 있다.


p497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지구를 파괴하지 않는 것은 더 어렵다. 다 행히 여전히 인간과 비인간의 일행이 함께 있다. 파괴된 우리 풍경 들의 제멋대로 자란 변두리를 자본주의적 규율, 확장성, 그리고 자원을 생산하는 방치된 플랜테이션 대농장의 가장자리를 -여전히 탐험할 수 있다. 우리는 잠복해 있는 공유지의 냄새를-그리고 찾기 힘든 가을 향기를 -여전히 붙잡을 수 있다.


작가의 이전글 점거 당한 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