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보이어_언다잉
간단한 수술로 몸이 아프고, 어떤 질병/질환을 갖게되면 몸의 속도가 늦어지는 것 혹은 그래야 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했던 지난 연말이었다면, 이 책을 읽으면서는 다른 생각을 하였다. 아픈 몸, 질병을 치료하는 현재진행형의 몸은 마찬가지로 현재진행으로 노동하는 몸이기도 하고, 무언가를 계속해서 하는 몸이기도 하다는 것을. 그러나 쉽사리 ‘아픈 몸’이라는 것이 지워진다는 것을. 혹은 노동하는 등 무엇을 ‘하는 몸’이라는 것이 쉽게 무시된다는 것을. 그리고 역시나 쉽게 그 몸을 가진 이의 행태를 꾸짖기 쉽다는 것을. 너무나 쉽게 건강을 기원한다는 것을. 그것에 대해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도 나 역시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언다잉>, 앤 보이어, 플레이타임
p32 새로 삽입한 케모 포트쪽에서 통증이 느껴진다. 젊을수록 더 아프기 마련이라고 간호사들은 말한다. 암과 관련된 모든 것이 젊을수록 더 아픈 법이라고. 나는 목욕과 치장을 거부하고, 아무 데나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것도 그만둔다. 다른 신체 부위들에 대해서는, 그 부위들이 여전히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하지도 않는다.
p38 사람들은 암이 맞서 싸워야 할 침입자라든가 우리 존재가 가진 어떤 엇나간 측면이라든가 야심이 과한 세포라든가 자본주의에 대한 비유라든가 더불어 살아야 할 자연 현상이라든가 일종의 죽음의 대리인이라고 말한다. 암이 우리의 DNA 안에 있다거나, 이 세상 속에 있다거나, 유전자와 환경이 뒤섞인 복잡한 혼합물 안에 자리 잡고 있어 누구도 정확한 위치를 찾아낼 수 없거나 찾아내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들 한다. 암의 원인이 우리 내부에 있을 수도 있다는 한쪽의 시끌벅적한 추정만 들리고, 암의 근원이 우리가 공유하는 이 세상 곳곳에 퍼져 있을 수도 있다는 다른 한쪽의 조용한 추정은 결코 들리지 않는다.
p40 미국에서는 당신이 누군가의 자녀 혹은 부모나 배우자가 아닌 이상 타인을 돌보는 데 필요한 외출 시간을 법으로 보장받지 못한다. 미국 법은 가족이라는 울타리 밖에서 사랑받는 사람에게는, 그 사람이 얼마나 깊이 사랑받고 있든, 신경 쓰지 않는다. 이 세상의 모든 비공식적 사랑이 당신을 감싸고 있더라도, 다른 사람의 돌봄이 필요하면 잘게 쪼개진 타인의 시간 일부를 빼앗아야 한다.
p70-71 접수처 직원, 간호 조무사, 의료 기사, 간호사에게 요구되는 업무는 내 몸의 정보를 데이터베이스에 입력하는 것에 그치지 않으며, 이들은 그런 일을 수행하는 와중에도 나를 돌보아야 한다. 병원에서 내 소변량을 측정하고 차트에 기록하는 사람은 내게 대화를 걸며 안심시켜 주는 사람과 동 일 인물이다. 이는 고통스러운 절차가 덜 고통스러워지도록 해 주는 조치다. 내 이름을 두 차례 부르는 노동자와 내가 차고 있는 의료용 손목 밴드를 스캔하는 노동자와 내 가슴에 삽입된 케모 포트에 항암 화학 약물을 주입하기에 앞서 정확성 강화를 위해 교대로 투여량을 확인하는 두 노동자는 내 낯빛에 두려움의 기색이 역력할 때 팔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는 노동자들과 동일 인물이다. 채혈 담당 노동자는 농담을 던지는 일도 한다. 돌봄 노동과 데이터 노동은 모종의 역설적인 동시성 속에 공존한다. 즉 두 노동은 대부분 여자가 수행한다는, 그리고 역사 속에서 여자의 일로 간주된 다른 모든 노동과 마찬가지로 전혀 눈에 띄지 않고 간과되곤 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이 노동은 보통 부재할 때야 존재감을 얻는다. 깨끗한 집보다 지저분한 집이 더 눈길을 끄는 것처럼 말이다. 별다른 노력이 투입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배경은 어마어마한 노력을 기울여야만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돌봄 노동과 데이터 노동은 요란하지 않고, 일상적이고, 끈질기며, 절대 완수되지 않는다. 환자 정보가 들어 있는 파일은, 마치 사람이 살고 있는 집처럼, 부단히 인간 존재를 유지시켜 주는 노동 현장이다.
p92 유방암 치료의 전 과정을 거치고 나면 총파업에 가까운 상황이 펼쳐진다. 머리카락도 파업하고, 속눈썹도 파업하고, 눈썹도 파업하고, 피부도 파업하고, 생각도 파업하고, 언어도 파업하고, 감정도 파업하고, 활기도 파업하고, 식욕도 파업하고, 에로스도 파업하고, 모성도 파업하고, 생산성도 파업하고, 면역 체계도 파업하고, 번식력은 무용해지 며, 유방도 무용해진다.
p142-143 질병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치료는 절대로 이데올로기적이지 않은 것이 아니다. 사망률에늗 반드시 정치가 깃들어 있다.
p176 그런데 그간의 지속적인 의학적 발전에도 불구하고 현재 많은 유방암 환자가 더 이상 그런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 통증 관리가 충분히 이루어지지도 않은 상태로 퇴원해야 하고, 유방 절제술 이후에 찾아 오는 고통과 거동 관련 문제를 해소해 줄 물리 치료도 받지 못하며, 휴직할 수도 없다. 유방을 잃었다는 사실은 유방암 발병 후에 겪은 가장 중대한 사건에 끼지도 못한다.
p194 유방암에 걸리면 모든 달이 핑크토버가 되고, 실제로 매해 10월은 지옥 같은 철이다. 유방암에 걸려 죽은 이들이 태도가 불량했거나 소시지를 먹었거나 경력이 짧은 종양 전문의의 말을 믿지 않아서 죽기라도 한 것처럼, 세상은 그야말로 체면의 정치와 핏빛 핑크로 물든다. 내가 받는 항암 화학 요법이 효과를 보이는 듯하자 사람들은 내가 당연히 생존할 줄 알고 있었다면서 마치 나는 몹시 특별하고 강인한 사람인데 반해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던 것처럼 말한다.
p223 유방암으로 죽는 것은 죽는 사람의 허약함이나 도덕적 실패를 보여 주는 증거가 아니다. 유방암과 관련된 도덕적 실패의 책임은 유방암으로 죽는 사람에게 있지 않다. 그 책임은 그들을 병들게 만들고, 치료를 받다 파산하게 함으 로써 역시나 병들게 만들고, 그러다가 그 치료가 수포로 돌아가면 그들에게 죽음에 대한 책임까지 물어 버리는 이 세상에 있다.
p253 때로 나는 나 자신을 '병든 사람'이라고 칭했고, 병들지 않은 다른 모두를 '미래에 병들 사람'으로 간주했다. 또한 이 세상이 현재 병들어 있는 사람과 현재 자신이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생각도 했지만, 사람들을 이 두 범주로 나누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확신하건대 나는 내가 알아차리기 전부터 병든 상태였다. 질병이 일종의 공간이고 고통이 일종의 지속 기간이라 한다면, 둘 중 무엇도 하나의 정체성이 될 수 없다.
p269 소진된 자들 또는 적어도 그중 대다수는 매일매일 잠자리에서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렇게 거의 매일 일어난다는 사실은 그들이 느끼는 감정과 그들이 하는 행동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입증해 준다.
사람은 의지에 따른 선택으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자 시도할 수 있고 많은 경우 그렇게 하는데,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그럴 의욕이 없어서인 경우는 거의 없다. 소진된 자들은 정말 못 하겠다는 마음이 얼마나 크든, 살아 있는 상태이기만 하면 쉼 없이 시도한다. 도저히 할 수 없 는 시점이 올 때까지 하던 일을 계속하는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소진된 자들도 쉼 없이 시도하지만, 소진된 자들은 아직 소진되지 않은 이들보다 단지 더 비참하게 시도할 뿐이다. 살아가려면, 그러기 위해 음식을 먹고 물을 마시려면, 그리고 음식을 먹고 각종 공과금과 세금을 내고 화장실을 이용하고 옷을 입고 사랑하는 이들을 보살피기 위한-노동이나 사랑 같은- 방법을 찾으려면, 적어도 가끔은, 몸을 일으켜야만 한다. 소진된 자들이 자신에게 주어 진 일을 완수할 가능성은 높은 반면, 고갈된 상태인 만큼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할 가능성은 미미하다.
p303 내 곁에 나를 돌봐 줄 파트너는 없었지만, 친구들이 보내 준 선물은 내가 이 세상에서 그보다 더 좋은 동지들을 갖고 있음을 보여 주는 증거였다. 온갖 것을 박탈하는 이 세상의 구조가 초래한 불가피성을 둘러싸고 왈가왈부 논쟁이 벌어지기는 하지만, 세상이 박탈로만 가득 차 있는 건 아니다. 암은 완강했지만 내게는 그 완강함을 누그러뜨릴 창의적인 형태의 사랑이, 파트너나 가족으로 묶이지 않아 전적으로 법의 테두리 밖에 존재하는 비공식적인 유형의 사랑이라 할지라도, 그런 사랑이 있었다. 하지만 아픔이 찾아올 때면 내게 친구가 하나도 없었거나 어떤 이유에서건 내가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를, 행여 나중에라도 그런 처지가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생각하며 차디찬 슬픔에 젖기도 했다. 어떤 친구들은 나를 떠났지만, 또 어떤 친구들은 얼마 있지도 않은 돈과 시간을 그러모아 나를 돌봐 주었다. 돈이 있는 친구들은 수표를 써 주었고, 그러면 세심한 돌봄을 베풀어 줄 수 있는 다른 친구들이 그 덕에 비행기를 타고 곧장 내게로 와서 내 몸에 달린 배액 주머니를 비워 주었다. 어떤 친구들은 책을, 어떤 친구들은 믹스테이프를 보내 주었다. 돌봄 문제에 대처한 우리의 해결책은 미흡한 임시 방편이었기에 하나의 척도로 측정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내가 그 시기를 견뎌 낼 수 있게 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