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혜진_법정 밖의 이름들
“소외되고 배제된 사람들의 권리에 관심이 많기는” 했지만, 했다. “무언가를 바꾸겠다거나 대단한 정의를 구현하겠다는 마음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서혜진 변호사는 “단지 조금 민감했고, 주어진 일을 성실히 했고, 하루하루 버티듯이 피해자를 변호했을 뿐”이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조금 민감한 것. 그리고 견디고 버텨나가는 것. 그래서 그 자리에 그가 있다는 든든함과 신뢰가 생기는 것. 그가 말하는 마음이 있는 법이라는 것은, 그런 속에서 가능해질 수 있는 것일테다. 상상 속 유토피아만으로만 남는 것이 아니라.
<법정 밖의 이름들>, 서혜진 지음, 흐름출판
p13 내게 법정 밖이란 단순한 '공간의 외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곳은 누군가의 고통이 시작되고, 갈등이 쌓이며, 해결이 절실한 현장이다. 그러니 결국 변호사에게 필요한 일은 밖으로 나가 사람 을 만나는 것이다.
p15 하지만 무언가를 바꾸겠다거나 대단한 정의를 구현하겠다는 마음은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조금 민감했고, 주어진 일을 성실히 했고, 하루하루 버티듯이 피해자를 변호했을 뿐이다.
p28 사실 그전까지만 해도 '나는 좀 달라. 감수성이 있지.라고 자만했던 나에게 수미는 내가 가진 피해자에 대한 통념, 편견의 무용함을 깨닫게 했다. 성폭력 피해자도 그저 수많은 사람 중 하나라는 당연한 사실을 인식하게 했다. 피해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라는 고민은 그들에 대한 이해나 배려가 아닌, 또 다른 편견의 발로였다.
p41 처벌을 못 해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법률이 강압적 통제와 폭력의 늪에서 벗어나려는 피해자들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는 것이 근본적 문제이다. 피해 지원 기관이나 현장에서는 강압적으로 통제하는 것부터가 폭력의 시작이라고 교육한다.
p45-46 친밀한 관계는 폭력을 능숙하게 감춘다. 관계 속에 숨은 폭력은 가끔은 사랑, 관심, 질투, 집착이라는 본능에 기대어 구실을 찾는다. 하지만 사랑은 본래 폭력의 정반대 편에 서 있는 존귀한 것이다. 관심, 질투, 집착은 사랑의 편에 서느냐 폭력의 편에 서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친밀함 속에 숨은 폭력 깨뜨리기를 두려워하면 안 된다. 그 관계에서 벗어나려는 사람, 또는 폭력을 공론화하는 사람에게 너무 늦지 않게, 너무 멀지 않게 법률이 먼저 다가가야 한다.
p64 폭력은 침묵과 울음이라는 가장 깊은 흔적을 남겼다.
p76 2020년, 딥페이크 성범죄가 성폭력 처벌법으로 들어올 때만 하더라도 "실제 찍힌 것이 아닌", 즉 진짜가 아닌 것이기 때문에 범죄 성립이 까다로웠다. 법정형도 신체를 직접 촬영한 불법촬영 에 비해 낮았다. 법률 역시 '진짜 피해'와 '가짜 피해'를 구분했던 것이다.
하지만 피해는 같은 피해일 뿐이다. 수십, 수백, 수천 장의 영상물이 퍼지고, 기술은 날마다 정교해지고, 합성 여부조차 구분하기 어려운 수준까지 도달한 지금, 피해자는 가짜가 아닌 '진짜 피해' 를 겪는다.
p77 물론 법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법률의 변화는 우리 사회가 피해자에게 보내는 최소한의 응답이자, 책임 있는 대답이기도 하다. 모든 것을 범죄로 만드는 것이 능사는 아니지 만, 피해를 입었음에도 피해자로 불리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져서야 되겠는가? 법이 변해도 미라가 한 경험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더는 미라 같은 사람이 법이 부여한 피해자의 자리 밖에서 외로이 머물지 않도록 법은 끊임없어 뛰어가야 한다. 피해자의 곁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법은 먼 곳이 아닌, 우리가 살아가는 바로 이 현실에 존재해야 한다.
p118 결과적으로 나는 이윤택에 대한 고소를 돕기로 했다. 고소 의사를 밝힌 피해자들은 대략 스무 명 남짓이었다. 일회성 피해는 드물었고, 한 사람이 여러 번의 피해를 입었다. 여러 명의 피해자, 여 러 건의 피해·•• 이런 사건을 혼자 변호하기는 힘들었다. 다행히도 이들을 돕기로 뜻을 모아준 변호사들이 있었고, 변호사단이 꾸려지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p135 수치심은 말 그대로 부끄럽고 창피한 감정이다. 그러나 성범죄는 더 이상 여성의 정조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중대한 침해로 이해해야 한다. 부끄럽거나 창피한 일이 아니고 명백한 권리 침해이자 범죄이다.
p164 이들의 피해를 법률이 진정으로 위로하려면, 미정과 유나가 살아온 각자의 시간과 그 시간에 새겨진 세대의 기억까지도 조 금 더 깊이, 더 진심으로 들여다보아야 한다. 법은 감정을 줄 세우 는 도구가 아니라, 각자의 감정을 존중하는 울타리여야 하기 때문이다.
p232 강의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도 자신이 소진된 줄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피해자를 지원하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도와야 하는 사람'이라고 믿기에, 자기 상태를 돌아볼 여유조차 없다.
피해자의 고통 앞에서 본인의 감정은 사치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이들 역시 침묵당하고 있다. 그들의 피로와 좌절, 무력감은 당연시되고,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으며, 배려받지 않는다. 그리고 마침내 혼자 조용히 무너진다.
소진은 단지 '피곤함'이 아니다. 정서적 균열이고, 관계적 단절이며, 때로는 삶의 의미가 흐려지는 상태이다.
p250 때때로 어떤 판결문은 피해자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계기가 된다. 세상으로 나가는 작은 문이 되기도 한다. 나는 법에도 마음이 있듯 판결문에도 마음이 있다고 믿는다. 마음이 있는 법률 은 피해자를 혼자 두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