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노베이션팹랩 ‘구혜빈’ 디렉터 인터뷰]
알 수 없는 이 숫자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다면, 아래를 보자.
34 Years 254 Days 13 Hours 21 Minutes 40 Seconds
그렇다. 이 숫자들은 어떤 시간을 의미한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이 시간들은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해 1초마다 줄어들고 있다. 이것은 팹시티(Fab City) 프로젝트가 목표로 한 시점, 즉 D-Day까지 남은 시간을 실시간으로 보여주고 있는 일종의 타이머다. 역으로 계산해 보면, 팹시티는 2054년을 D-Day로 삼는다.
팹시티 프로젝트란, 2050년 세계 인구의 75%가 도시에 거주할 것이라는 유엔(UN) 전망에 따라 2054년까지 도시의 자급자족률을 50% 이상 끌어올리려는 글로벌 프로젝트이다. 생산의 재분배와 도시 구조의 재조명, 시민 주도권 그리고 디지털 기술을 통해 자원을 소비하는 도시에서 자체 생산력을 갖춘 도시로의 전환을 목표로 한다. 지난 2014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시작한 이후 파리, 암스테르담 등 전 세계 34개 도시가 동참하고 있으며, 서울은 2018년 파리에서 열린 <국제팹시티서밋>에서 팹시티 선언을 함으로써 이 글로벌 프로젝트에 함께하고 있다.
*참고사이트: 팹시티 글로벌 이니셔티브(https://fab.city)
앞으로 35년 후, 팹시티 프로젝트에 동참하는 세계 곳곳의 도시,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서울은 어떤 모습으로 변화할까? 솔직히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적어도 3~4번은 강산이 변할 만큼의 시간이 우리에게 주어졌으니 말이다. 다만 확실한 건 기나긴 마라톤의 출발선에서 이제 막 발을 뗀 서울의 팹시티 프로젝트는 바로 이곳 서울혁신파크, 그 안에서도 제작동 1층에 자리한 메이커스페이스(Maker Space) ‘서울이노베이션팹랩’을 스타디움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막연한 상상 대신 ‘팹시티 서울’을 향해 마라톤을 시작한 서울이노베이션팹랩의 구혜빈 디렉터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어 보기로 했다.
실험과 프로젝트 중심의 메이커스페이스
구혜빈 디렉터를 처음 본 건 올해 5월에 열렸던 <팹랩 아시아 네트워크 5(이하 FAN5)>에서다. 행사장 곳곳에서 마주쳤던 그녀는 국내외 메이커들과 시민들을 살갑게 맞이하고 구석구석 행사를 챙기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녀가 FAN5 행사를 유치하고 준비하는 데 얼마나 많은 역할을 했을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서울이노베이션팹랩을 제안하고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기존 메이커스페이스 운영 방식의 틀을 깨고 실험과 프로젝트가 중심이 되는 메이커 커뮤니티를 만들고자, 2016년 7월 서울이노베이션팹랩의 문을 열었다.
“보통 메이커스페이스는 단순히 무료로 장비를 쓸 수 있는 공간이라는 인식이 강한데, 사실 팹랩은 서로 다른 기술과 아이디어,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모임 공간’으로서의 의미가 더 커요. 여기 모인 사람들의 공통점은 남을 위해서 무언가를 만들고자 한다는 거예요. 그런 그들이 실험을 더 잘 할 수 있게끔 하려면 어떤 것들이 필요한지 고민했고, 지금의 이노베이션팹랩이 만들어졌죠.”
서울이노베이션팹랩은 개소와 동시에 글로벌 팹랩 네트워크인 ‘팹 파운데이션(Fab Foundation)’에 등록되어 세계적인 메이커 네트워크에 참여하고 있는 것은 물론 팹시티 서울의 중심 기지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곳에서 그녀는 팹랩 공간을 운영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 메이커들의 제작 활동과 시민들의 참여를 돕는 코디네이터(Coordinator)이자 인스트럭터(Instructor)로서의 역할을 한다.
커뮤니티 문화 조성이 곧 팹시티의 기반
구혜빈 디렉터가 팹랩이 국내에 활성화되기 이전부터 메이커 문화에 빠져 자칭 ‘메이커 덕후’가 된 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관심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청년들이 마음껏 실패할 수 있는 기회, 장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그런 기회들을 만들려면 어떤 게 필요할까 고민하다가 팹랩(FAB Lab)이란 걸 알게 됐어요.”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 그 이상을 넘어 직접 발로 찾아다니며 메이커 문화를 체득한 구 디렉터는 2002년 노르웨이 링겐 지역에서 최초의 팹랩이 생겨난 지 10년이 지난 2012년 즈음에야 국내에 팹랩이 알려지고 메이커스페이스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는 함께 모여서 뭔가를 만들어내는 커뮤니티 문화의 부재에서 기인한다고 설명한다. 커뮤니티 문화 조성이 곧 팹시티의 기반을 조성하는 일이라는 게 그녀의 생각이다.
커뮤니티를 만드는 일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은 당연하고, 메이커와 메이커, 메이커와 시민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교류와 소통이 일어날 수 있도록 조정하고 엮어주는 중간자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팹시티 프로젝트의 성공적인 수행을 위해 사람 자원이 절실한 이유다.
“팹시티의 가치와 지향점에 공감하고 역량 있는 분들의 팹시티 참여가 필요해요. 이와 더불어 중간지원조직 역할을 하는 이들이 메이커들의 실험을 지원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다시 말해 혁신가들을 혁신적으로 지원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생각해 봐야 해요. 팹시티 매니페스토 10가지 중에 10번이 실험적, 즉 실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새로운 실험을 지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적극적으로 새로운 실험을 지원한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지원하는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이야기죠.”
팹시티 프로젝트 공모사업
서울이노베이션팹랩은 매년 공모를 통해 디지털 기술과 시민 참여를 바탕으로 하는 다양한 팹시티 프로젝트를 모집, 지원하는 ‘팹시티 프로젝트 공모사업’을 진행한다. 메이커들의 제작 활동과 실험을 다각적으로 지원함으로써 팹시티 참여를 독려하는 것은 물론 시민참여단 운영을 통해 일반 시민들에게도 팹시티를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올해 공모사업에 선정된 팀은 총 25개다. 이 중 4개는 오픈소스형 프로젝트로, 말 그대로 프로젝트를 통해 얻은 데이터들을 오픈소스로 공유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데이터를 공유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기술의 발전을 멈추겠다는 뜻으로 여긴다. 최대한 많은 오픈소스들이 전 세계를 떠돌게 하는 것, 그것이 팹랩과 팹시티의 취지다. 하지만 오픈소스 역시 우리에게는 아직 익숙하지 않은 문화라고 구 디렉터는 이야기한다. 오픈소스 문화를 좀 더 장려하기 위해 오픈소스형 프로젝트팀에게는 운영비를 지원한다.
오픈소스형 프로젝트의 또 하나의 특징은 시민참여단의 모집 및 운영이다.
“주로 어떤 분야에 관심 있는 분들, 기계나 기술을 다루는 것에 관심 있어서 같이 만들어 보고 싶은 분들이 참여하세요. 계획했던 인원보다 2~3배수 이상이 지원을 하는데, 그래서 본의 아니게 선발 절차가 있어요. 어떤 역할로 기여하고 싶은지, 무엇을 배우고 싶은지 등을 적어서 제출하게 하고, 프로젝트 팀과 함께 상의해서 선정을 해요.”
시민참여단은 분과별로 나누지 않고 통합적으로 운영하기 때문에 모두가 서로 교류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자연스럽게 팹랩 공간은 회원들 간에 소통의 장이 되고, 기술은 소통을 돕는 촉진제 역할을 하게 된다고 구 디렉터는 설명한다. “원래는 우리가 어떤 기술을 잘 만들기 위해서 사람들을 모은 건데, 오히려 이 기술이 사람들을 모으고 대화를 하게 하고 아이디어를 만들어내는 도구 역할을 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대중과의 공감이나 소통 가능성이 팹시티 프로젝트의 선발기준이 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정보와 기술의 격차를 줄일 수 있는지 이다. 이는 팹시티의 핵심 가치 중 하나다.
시민형 프로젝트는 오픈소스형과는 달리 굉장히 자유롭게 운영이 된다. 모집 기간이나 수행 기간 등의 구애를 받지 않고 누구든지 수시로 실험을 진행하고 아이디어를 실행할 수 있다. 또한 팹시티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하지 않더라도 팹랩의 취지에만 맞는다면 장비교육이나 전문가 멘토링, 공간과 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
다만 시민형 프로젝트가 의무적으로 수행하여야 하는 과제는 이곳 팹랩에서 배운 것과 제작한 콘텐츠를 시민들에게 공유하고 가르쳐주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몇 차례 공모 프로젝트 운영을 통해 점차 발전시킨 공모사업의 핵심 내용으로, 메이커들이 제작한 기술이나 제품, 서비스 등을 실제로 사용하게 될 사람들로부터 의견을 듣고 반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기록하고 공유하고 소통하라
그렇다면 시민들은 시민참여단이나 공유회를 통해 실제로 얼마나 팹시티나 팹랩을 친숙하게 여기고 이해하게 될까? 질문에 대한 구혜빈 디렉터의 대답은 이러했다.
“팹시티라는 단어를 모든 시민에게 주입하거나, 개념을 이론적으로 전달하는 것보다는 체험이나 참여를 통해 작은 행동, 생각의 변화를 이뤄내는 방법이 대중과 소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시민참여단을 운영할 때 꼭 염두에 두는 것 중에 하나가 ‘거시적인 문제를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해결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자’는 것이에요. 그런 측면에서 봤을 때 각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시민참여단들은 확실히 팹시티의 전반적인 콘셉트나 맥락을 이해하고, 실천하고 싶어 하세요.”
그녀는 또한 FAN5 때 진행했던 ‘팹시티 캠퍼스’ 역시 시민들의 이해를 돕고 참여와 소통을 끌어내기에 아주 좋은 수단이라는 소감을 밝혔다. 팹시티 캠퍼스를 선보였던 이전의 다른 도시들과는 달리, 다양한 주체들이 컨소시엄 형태로 참여하여 캠퍼스를 설계하고 준비한 모든 과정이 팹시티를 충분히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에서 충분히 가치 있는 성과였다.
“FAN5의 모든 과정을 세부적으로 아카이빙 했다면 사람들이 이 행사 자체만으로도 영감을 받을 수 있는 부분이 많지 않았을까 싶어요.”
팹시티 프로젝트 공모사업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 중 하나는 바로 ‘아카이브’이다. 메이커들에게도 모든 과정을 사진 찍고 기록하도록 항상 강조하고 있다. 그렇게 기록된 자료를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오픈소스 이상의 가치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관의 방식이라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아카이브는 결과의 성공 여부를 따지려는 것이 아니라 과정을 남기기 위한 것이며, 이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는 게 구 디렉터의 설명이다. 다만, 이를 효과적으로 기록하고 공유할 수 있는 플랫폼이 아직 없다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다양한 자원과 주체들이 함께 어우러져 만드는 미래
오는 2022년 서울에서는 서울혁신파크를 거점으로 세계 최대의 팹시티 행사인 <국제팹시티서밋>이 열린다. 이 행사는 팹시티 프로젝트에 동참하는 세계 도시 대표들과 민간 협의회, 시의 각 부서 공무원, 때로는 시장이나 부시장이 참가하여, 각 도시의 팹시티 목표와 진행 경과를 공유하는 자리다. 또한 팹시티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연구와 실험, 프로젝트들을 발표하고 배우는 시간이기도 하다.
구혜빈 디렉터의 목표는 행사가 열리는 2022년까지 더 많은 도시들이 팹시티 선언을 하도록 하는 일이다. 다행히 관심 있어 하는 도시들은 많지만, 안타까운 것은 민간에서보다 시 정부에서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팹시티는 스마트시티와 다르게 민간이 주도해서 만들어 나가는 거예요. 때문에 반드시 민간의 참여가 있어야만 해요. 민간 팹랩들의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하면 팹시티 선언을 할 수가 없어요.”
팹시티는 거대하고 복잡한 프로젝트다. 팹시티 프로젝트를 위해 세계의 도시들이 긴밀히 네트워크를 이루고 커뮤니티를 통해 그 과정과 성과들을 공유하고 발전시켜 나가듯, 한 도시를 이루는 수많은 자원과 인프라를 유기적으로 엮어내고 시민과 메이커, 중간지원조직, 시 공무원 등 다양한 주체들이 협력하고 노력해야 지속 가능한 미래 도시, 팹시티를 실현할 수 있다.
결코 쉽지 않을 ‘팹시티 서울’을 향한 서울이노베이션팹랩의 도전! 그리고 그 앞에 놓인 몇몇 과제들. 민간 협의회의 구성,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팹시티 프로젝트 운영과 지원, 민간 팹랩으로서의 올바른 자리매김 등, 이 모든 이야기들을 풀어내자면 훨씬 더 많은 페이지들을 할애해야만 한다. 아쉽지만, 구혜빈 디렉터와의 첫 만남과 그 안에서 나눴던 수많은 대화들은 이쯤에서 마무리를 짓기로 했다. 팹시티 서울의 마라톤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고, 우리는 언제든지 다음을 기약할 수 있으니!
인터뷰 & 글_ 슬리퍼
사진_ 슬리퍼, 서울이노베이션팹랩, 구혜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