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모임에 빠질 수 없는 와인, 그리고?
제목 그대로다. 우리말로는 '짠!' 하는데 영어로는 'Clink!' 한다. 와인 잔을 부딪혀 이 소리를 내는 데에도 간단한 매너가 있는데,
와인 잔 주둥이 주변을 부딪히지 말 것(Never clink the rims, 자칫하면 잔이 깨질 수도 있다),
잔의 둥근 배 부분으로 건배할 것 (Clink the bell, 잔이 깨지지도 않고 상쾌한 소리도 즐긴다),
와인을 꽉 채우지 말 것 (Don't fill it, 일반적으로 잔의 3분의 1을 넘어가지 않는 편이 좋다고 한다. 와인 양이 너무 많아지면 상쾌한 잔 부딪히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나)
등이다. 잘 읽어보면 이 clink 소리를 '제대로' 내기 위한 에티켓이 따로 존재하는 셈인데, 중세 유럽인들은 이 소리가 교회의 종소리를 닮아서 주변의 악마들이 달아난다고 믿었기에, 축제 때 잔을 부딪히며 흥을 돋운 것으로부터 건배 문화가 생겨났다는 걸 생각해보면 꽤나 그럴싸하다.
하지만 역시 기본 중에 기본은 이것 아닐까. Make eye contact when cheersing.
상대방의 눈을 마주 보며 건배.
이걸 처음 배운 날이 지금도 기억난다. 십 년 전쯤 병아리 신문 기자 시절의 연말 모임. 대학 교수님들과의 네트워킹을 위한 모임. 유독 교수님들 앞에서는 '기자' 아니라 '제자'가 된 것 같이 어렵기만 하던 이십 대 중반의 어린 날이다.
잔은 상대방 교수님보다 아래로 낮춰서, 최대한 공손하게 건배를 하는데 모 대학 공학 교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박 기자, 와인으로 건배할 때는 잔을 같은 높이로 들고, 상대방의 눈을 바라보면서 해야지."
초짜 티가 풀풀 나는 어린 기자를 살짝 짓궂게 놀리고 싶으셨는지, 이 분은 내게 이어서 세 번 정도 건배 연습을 시키셨다.
그런데 같은 날, 자리에 참석한 또 다른 교수님(경제학 교수님으로 기억한다)은 십여 년이 흐른 지금도 어려운 지혜를 가르쳐 주셨다.
"박 기자, 사람의 마음을 얻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말이야, 그중에 하나가 일단 그 사람에게 크게 신세를 지는 겁니다. 그리곤 그걸 확실하게! 갚는 거예요. 그러면 평생 갈 사람을 얻을 수 있지."
차라리 와인 매너가 쉽겠다. 제대로 이해도 가지 않았다. 크게 신세를 지라고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신세 지고 내 사람 만들기' 전술이 어려웠다기보다는, 불편했던 것 같다.
'폐 끼치지 말자', '얕보이기 싫다', '실수해선 안 된다'는 생각에 끙끙 앓던 사회 초년생 시절이었다. 신문사 입사 동기들 중에도 노안에 속하는(혹시나 이 글을 읽는다면 미안합니다) 오빠들이 취재원들과 대화를 잘했다. 그러니 당연히 고급 정보를 잘 물어왔다. 기자인지 제자인지 모를 여자애로 보이기 싫다는 생각에 한껏 웅크리고 있는데 그런 말을 들었으니, 들으라고 일부러 하는 소리처럼 찔리더라는 얘기다.
이제 세월이 흘러 조금은 능글맞아진 나는, 상대방이 베푸는 호의에 망설이지 않고 산뜻하게 감사 인사를 할 수 있어서 참 좋다. (열흘 전에는 비슷한 동네에 사는 고객 분이 회의 끝나고 차를 태워주겠다 하셔서 즐거운 대화 하며 함께 귀가하기도 했다!) 잔을 어떻게 잡고, 포크는 어디 놓인 것부터 쓰고 이런 것도 중요하지만, 호의를 부탁하거나 베풀고, 또는 받아들이는 과정이 산뜻하게 이뤄지는 게 더 중요한 매너 아닐까.